<스파이럴>

<스파이럴>

‘쏘우’가 돌아왔다. 8번째 작품이었던 <직쏘>가 개봉한 지 4년 만이다. 유기적으로 이어지던 ‘쏘우’란 제목도 버린 채 이번엔 스핀오프라는 컨셉으로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스파이럴>이란 이름을 달고서 관객들과 만난다. 나름 인지도 있는 크리스 록과 사무엘 L. 잭슨 그리고 맥스 밍겔라가 캐스팅됐고, 2편부터 4편까지 연출을 맡아 시리즈를 확장시킨 대런 린 보우즈만이 다시 연출로 복귀한 새로운 ‘쏘우’는 기존 시리즈들에 비해 2배가량 커진 제작비가 투입됐다. 프랜차이즈를 잘 이해하고 있는 연출자의 참여로 장기간 멈췄던 시리즈에 정통성을 부여할 명분은 갖췄지만, 동시에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약점도 지닌 만큼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호기심이 증폭된다. 게다가 여덟 편이나 이어지며 직쏘의 모든 이야기는 한 단락이 마무리된 모양새라, 이번 스핀오프로 또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여할지도 귀추가 모아진다.


고문 포르노이자 역대 호러 시리즈 사상 5위 흥행작

<쏘우> 리 워넬

(왼쪽부터) 리 워넬, 제임스 완

<쏘우>는 호주 출신의 영화학도 제임스 완과 리 워넬이 2003년에 만든 10분 남짓의 단편에서 모든 게 시작됐다. 애초 장편 각본을 완성했지만 호주에서 예산을 유치할 수 없었던 제임스 완과 리 워넬은 제작자를 구하기 위해 동명의 단편을 찍었고, 이 독특한 아이디어와 재기발랄한 스토리에 감복한 에볼루션 엔터테인먼트의 제작자들이 아예 호러 스릴러 전문 영화사 트위스티드 픽처스를 차려 이들을 지원했다. 결과는 누구나 다 아는 대성공. 120만 달러로 만들어진 <쏘우>는 무려 전 세계에서 (제작 대비 85배가 넘는) 1억 달러를 돌파하며 시리즈화 되었다. 애초 후더닛 혹은 와이더닛에 가까운 스릴러였지만, 매년 편수를 거듭하며 기상천외한 트랩과 캐릭터 반전에 함몰돼 고문 포르노라는 악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모든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며 21세기 최강의 호러 프랜차이즈이자 라이언스게이트의 효자 상품에 등극한다.

여타의 호러 시리즈들이 그렇듯 <쏘우> 역시 장기화되며 점점 망작이 되어가는 저주와도 같은 잔혹한 운명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첫 편의 신선함과 기발함은 휘발된 채 무의미한 학살만 무한 반복된다는 것도 일견 그렇다. 다만 먼치킨이 되어가는 다른 살인마들과 달리 <쏘우>에선 원조 존 크레이머의 존재감은 뒤로 갈수록 옅어져가고, 그 흔한 섹스 신 하나 없이 자극적인 고어 효과에만 몰두해 신상 매운 라면처럼 더 독해져 다가온다는 점은 현재 호러 신의 변화와 사회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반영한다. 결국 할로윈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시리즈는 7년 개근으로 막을 내렸고, 다시 7년이 지나 깜짝 부활을 알렸지만 4년 만에 간판을 바꿔 달게 되었다. 평소 <쏘우> 시리즈를 좋아하던 크리스 록이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제작에도 직접 참여하며 이번 스핀오프를 진두지휘했다.


‘쏘우’ 음악의 아버지 찰리 클로저

그런 점에서 <스파이럴>은 <쏘우>의 분위기를 공유하지만, 또 <쏘우> 시리즈와는 살짝 다른 면모를 갖는다. 열댓 명씩 죽어나가던 킬 카운트도 확연히 줄었고, 악명 높은 수위를 자랑하던 3편부터 7편까지의 고어 효과에 비해 훨씬 순(!)해졌다. 시리즈 전반에 걸쳐 의료보험 문제를 건들던 핵심 뇌관은 최근 이슈화되는 인종 문제로 재빠르게 대체됐다. 그럼에도 이 프랜차이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모든 시리즈에서 음악을 담당한 찰리 클로저의 존재감이다. 1963년 미국 뉴햄프셔에서 태어난 찰리 클로저는 90년대 몇몇 얼터너티브 밴드에서 활동하다 나인 인치 네일의 트렌트 레즈너와 조우하며 키보디스트이자 작곡가이며, 프로듀서고, 리믹서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나인 인치 네일을 매개로 자연스레 인더스트리얼과 메탈 신에서 당대 주름 잡던 아티스트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주효했다.

마릴린 맨슨과 화이트 좀비(롭 좀비), 데이빗 보위와 람슈타인, 프롱, 앨리스 쿠퍼 등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그의 도움을 얻었고, 그 역시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영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찰리 클로저도 자연스레 이들이 작업한 영화음악에 참여하게 됐는데, <내추럴 본 킬러>에 쓰인 “섬싱 아이 캔 네버 해브(Something I Can Never Have)”를 비롯해, <매트릭스>의 “드래귤라(Dragula)”, <매트릭스 리로디드>의 “리로드(Reload)”의 리믹스 버전이 모두 그의 솜씨다. 사실 그는 밴드 시절 이전인 80년대 중후반부터 방송계에서 작곡가들을 도와 신스와 드럼 프로그래머로 활동한 이력이 있기에 영화음악이 전혀 생소하거나 낯선 영역은 아니었다. 탁월한 조력자에 머물러있던 그를 비로소 전면에 내세운 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 솔로로 나선 영화음악 데뷔작 <쏘우>에서부터였다.


호러 고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반전 테마곡, 헬로 젭!

호러 프랜차이즈에서 유난히 걸출한 테마와 특유의 분위기를 직조해낸 영화음악가들이 존재하는데, <할로윈> 시리즈를 책임진 존 카펜터를 시작으로, <13일의 금요일>의 심장과도 같던 해리 맨프레디니, <스크림> 시리즈의 숨은 공신 마르코 벨트라미나 <조종자>의 진정한 마스터 리차드 밴드, <환타즘>의 프레드 마이로 그리고 최근의 <컨저링> 유니버스와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양분한 조셉 비샤라 등이 바로 그들이다. 실제 이들이 담당한 음악들은 전설이 된 호러 캐릭터 못지않게 프랜차이즈 내에서 상징적인 존재감을 갖게 됐다. 아울러 존 윌리엄스의 <죠스>나 버나드 허먼의 <사이코>처럼 후속편 음악을 맡지 않았음에도 그 테마를 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찰리 클로저 역시 <쏘우> 전편에 참여하며 “헬로 젭(Hello Zepp)”이란 불세출의 테마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퍼즐이 하나씩 맞아떨어지며 모든 상황을 복기하고, 뒤통수를 강하게 때릴 때마다 플래시백과 함께 울려 퍼지는 D단조 3노트 선율의 강렬한 테마 “헬로 젭(Hello Zepp)”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포, 전율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안겨준 반전 음악의 대명사다. 클래시컬한 스트링 4중주를 위시해 초조함을 가중시키는 일렉트릭 효과와 강력한 메탈 베이스의 사운드가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미니멀한 선율은 클린트 만셀의 <레퀴엠>이나 존 머피가 언더월드를 대동했던 <선샤인> 등을 언뜻 떠올리게 하는데, 그보다 더 락킹하고 강력한 스타일로 영화팬들을 사로잡았다. 이 테마 하나로 그를 빼놓고 <쏘우>를 얘기할 수 없으며, <쏘우> 역시 그의 음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관계가 되었다. 영화를 만들며 나인 인치 네일의 곡들을 템프 트랙(영화 편집 과정에서 임시로 배치된 음악)으로 활용했던 제임스 완과 리 워넬은 그 사운드를 매조지었던 찰리 클로저에게 아예 영화음악을 의뢰하며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유지하고자 했다.


비인간적인, 암울하고 차가운 소리의 총합 그리고 21새비지

트랩이라는 메카닉적인 설정과 인간으로서 저지르기 쉬운 과오를 처단하기 위해 무자비한 보복을 단행하는 직쏘의 엽기적인 조치에 맞춘 차갑고 암울한 기운의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선보인 찰리 클로저의 기용은 신의 한 수였다. 제작비를 보존하기 위해 오케스트라 대신 신디에 의존한 7∼80년대 호러 스코어들이 특유의 정서와 냉혹한 질감을 갖게 된 것처럼 <쏘우> 시리즈의 엠비언트와 일렉트릭 그리고 메탈이 뒤섞여 만들어낸 특유의 황폐하고 과격하며 파괴적인 심상은 영화가 지닌 성격에 완벽하게 재단된 학살 찬가를 제공한다. 희생자들의 단말마적 비명처럼 오싹하게 다가오는 서늘한 기운과 고약한 장난을 넘어 기괴하며 불유쾌한 관음적 시선을 교차시킨 이 끔찍한 시청각적 고문은 그의 음악으로 방점을 찍었다. 언제 어디서고 맞닥뜨릴 수 있는 경고와도 같은 스코어들은 다른 여타의 강력한 하드코어 헤비메탈 삽입곡들과 잘 조화되며 인기를 누렸다.

상업적인 이유로 영화에 포함되지도 않은 곡들을 잔뜩 수록한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은 1편부터 7편까지 꾸준히 발매됐지만, 아쉽게도 찰리 클루저의 <쏘우> 오리지널 스코어를 온전하게 다룬 앨범은 2장의 CD로 소개된 앤솔로지 앨범이 전부다. 그래도 500개가 넘는 전체 큐(Cue)들 중에서 영화음악가가 직접 엄선한 곡들이 담겨 영화의 짜릿한 감흥을 느끼기엔 손색이 없다.

이번 신작 <스파이럴>에서는 크리스 록과 사뮤엘 L. 잭슨이 메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만큼 멈블 랩의 대표주자인 21새비지가 쏘우의 상징과도 같은 찰리 클루저의 “헬로 젭(Hello Zepp)” 테마를 샘플링해 만든 신곡 “스파이럴”을 선보인다. 마약과 무기 소지는 물론 영국 출신으로 국적 논란과 불법 체류자로 몰리기까지 했던 그의 이력을 봤을 때 범죄와 인종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번 새로운 쏘우 스핀오프 엔딩 곡의 주인공으로 그가 발탁된 건 나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