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 괜찮다고 손 내밀어주는 이들의 체온. 대수롭지 않다며 어깨를 감싸주는 어른의 존재가 마냥 귀하게 느껴지는 요즘. '우리가 살면서 진정으로 좋은 어른을 만날 확률은 몇 프로쯤 될까'라는 다소 의미 없는 생각을 해본다. 현실 속에서 '찐' 어른을 곁에 두기란 쉬운 일은 아니기에, 영화 속으로 시선을 돌려봤다. 비록 랜선이지만, 큰 비중은 아니지만 말 한마디로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네던 영화 속 좋은 어른들.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영화 속 '인생' 어른들을 소개한다. 현생에 치인 '어른이들'은 잠시 잊었겠지만,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어바웃 타임 About Time, 2013

팀의 아빠(빌 나이) - 낭만적인 어른

<어바웃 타임>은 팀(돔놀 글리슨)과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의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로 기억되곤 하지만, 결국 <어바웃 타임>은 팀의 아버지(빌 나이)가 전하는 메시지들로 잘 엮어진 작품이다. 영화의 초반부, 하이라이트, 그리고 엔딩의 중심에 서 있는 팀의 아버지는 <어바웃 타임>의 입이 되어,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어바웃 타임>은 제목 그대로 시간에 관한 영화다. 시간을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팀의 인생이 때론 환상적으로, 때론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순간들을 포착해 관객들에게 시간과 삶에 대한 의미를 되묻는다.

제 아들은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 인생에서 특별히 자랑스러운 점은 없는데요. 팀의 아버지라는 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어바웃 타임> 팀의 아빠 대사 중

그 속에서 팀의 아빠는 중요한 순간마다 얼굴을 비추며 길을 헤매는 아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넨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들에게 평범한 하루와 일상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라는 문장을 반복한다. 아버지의 말이 특별하게 뛰어나다거나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니나, 아버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팀의 인생을 휙휙 변화시킨다. 아들을 향한 각별한 애정은 물론이거니와,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겸손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아버지는 아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인생이란, 시간이란, 결혼이란, 죽음이란, 추억이란, 사랑이란. 때때마다 중요한 질문을 맞닥뜨린 아들에게 이렇게나 낭만적인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아버지. <어바웃 타임>은 아들을 향한 각별한 사랑을 가진 아버지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을 담아낸 영화다. 이런 아버지가, 이런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혜원의 엄마(문소리) - 닮고 싶은 어른

<어바웃 타임> 속 팀의 아버지가 아들의 인생 방향키를 손수 매만져주는 인물이었다면,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엄마(문소리)는 좀 다르다. <리틀 포레스트>는 임용고시 시험에 낙방하자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의 시골 라이프를 담는다. 편의점 도시락에 더부룩함을 느끼던 혜원은 제철 음식에 속이 편안해지고, 어긋난 관계들에 얽혔던 서울과는 달리 어릴 적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제 본모습을 찾아간다. 그럼에도 혜원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데. 그 이유는 엄마가 떠올려서다. 우리는 고향이나 시골을 상상하면 연이어 그곳에서 두 팔 벌려 자녀들을 반겨주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곤 하지만. 혜원의 집엔 혜원뿐이다. 혜원을 홀로 키운 엄마는 혜원이 성인이 되자마자 혜원을 떠났고,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혜원의 엄마는 매정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혜원의 성장을,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다. 육아의 끝은 독립이라는 말이 있듯, 혜원의 엄마는 혼자 잘 살아가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알려준 것뿐이다. 어릴 적부터 혜원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때때마다 해야 할 일들을 습득시킨 엄마는 혜원의 곁을 떠나며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독립과 지혜를 손에 쥐여준다.

이 곳의 흙 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리틀 포레스트> 헤원의 엄마 대사 중

시골 생활을 시작한 혜원이 꿋꿋하게 홀로서기를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엄마 덕분이다. 헤원도 어릴 적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를 서서히 존경하며 더 단단해진다. 어쩌면 혜원의 엄마는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어른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훈수나 간섭을 하지 않고 한 발짝 멀리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고 응원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딸이 제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수 있는 모터를 달아준 그녀의 결단과 마음가짐이 유달리 새롭게 다가온다. <어바웃 타임>의 팀의 아버지를 보며 '저런 어른이 내 곁에 있었다면'을 떠올렸다면, 혜원의 엄마에게선 '나 역시 저렇게 살 수 있을까'를 돌아보게 되는바. 어쩌면 혜원의 엄마는 인생 멘토라기보단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롤모델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펄먼 (마이클 스털버그) - 기대고 싶은 어른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올리버(아미 해머)의 사랑의 시간을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게 펼쳐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를 조명한 영화다. 러닝 타임을 꽉 채우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감정으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인생작으로 꼽힌다.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을 눅진하게 녹여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많은 관객들이 마음을 기울여 쏟아낼 수밖에 없는 캐릭터는 단연 엘리오다. 인생에서 처음, 사랑이 만들어낸 거센 물살에 빠지게 된 엘리오는 매 순간이 혼란스럽고 저릿저릿하기만 하다. 그때 그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는 건 부모님, 특히나 엘리오의 아버지인 펄먼이다. 영화의 후반부, 꽤나 긴 시간 동안 엘리오에게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는 펄먼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최고의 명대사, 명장면으로 남았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단 한 번 주어지지, 마음은 갈수록 닳아 해지고 몸도 똑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져. 지금 너의 그 슬픔 그 괴로움을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펄먼의 대사 중

어른답게 위로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 듯한 펄먼은 아들의 감정과 상황을 다 포용하는 건 물론이오. 한여름 밤의 열병처럼 겪은 감정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엘리오에게 전한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필요한 날, 아니 나보다 인생을 더 산 어른의 말 한 마디가 필요한 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말들과 선 넘는 가르침, 맥락 없는 조언에 부딪혀 왔는가. 그래서인지 펄먼 교수가 아들의 상처를 진심으로 보듬어주는 방식을 보고 있노라면, 저런 아버지를 둔 엘리오에게 부러움의 감정이 샘솟기도 한다. 자신의 아들을 제 소유물이 아닌, 가르쳐야 하는 존재가 아닌 한 명의 귀한 인격체로 대하는 펄먼의 모습. 많은 관객들의 마음속에 그가 기대고 싶은 어른으로 자리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이런 존재가, 나도 이런 존재가…라는 두 가지 마음을 공존하게 하는 펄먼의 토닥임은 여전히 많은 관객들의 맘속을 부유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Maundy Thursday, 2006

모니카 수녀 (윤여정) - 용서하는 어른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윤여정이란 배우, 윤여정이란 어른을 이야기하고 싶어 고른 작품이다. 요즘 MZ 세대라 일컫는 이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킨 윤여정은, 젊은 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어른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했다. 거침없이 솔직하게 제 할 말을 다 펼쳐내면서도, 무례하지 않게. 그리고 제 인생관을 누군가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윤여정은 현시대가 원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윤여정은 여러 작품을 통해서도 멋진 어른을 연기해 왔는데, 오랜만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속 모니카 수녀의 얼굴을 꺼내 보게 되었다.

윤여정이 연기한 모니카 수녀는 서로 다른 세상에 놓여져 있던 두 사람 윤수(강동원)과 유정(이나영)을 마주 앉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상처에 얼룩진 이유는 다를지라도, 두 사람만이 서로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은 모니카 수녀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윤수와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유정의 손을 이어주며 두 사람 모두에게 희망을 심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속 모니카 수녀는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어른이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이들의 내면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온 마음을 쏟는 모니카 수녀는 (그것이 직업적 소명일지라도) 차가웠던 두 사람의 인생을 들끓게 만들 만큼 따뜻하고 푸근하다. 인생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준비를 마친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매 장면, 아니 매 순간 존재의 귀함을 이야기하던 모니카 수녀는 한 줌의 희망이 가진 의미를 전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좋은 어른을 이야기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 비교적 ‘쿨’한 (척하는)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해 온 윤여정의 자상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의미가 깊다.

죽고 싶다는 말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다시 거꾸로 뒤집으면 잘 살고 싶다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다는 말 대신 잘 살고 싶다고 말해야 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모니카 수녀 대사 중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다니엘 (데이브 존스) - 비겁하지 않은 어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연대의 힘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지병으로 일을 그만두게 됐지만, 지병 수당과 실업급여 수령에 번번이 실패하는 다니엘(데이브 존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제도적 절차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는 인물이다. 제 목숨을 걸고 사회복지 제도와의 처절한 싸움을 결심하는 굳센 주인공이기도.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딸과 아들을 홀로 키우는 미혼모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가 등장한다. 자신 역시도 최악의 삶을 마주하고 있지만, 다니엘은 케이티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며 모두가 눈물을 흘렸던 장면이 있다. 참을 수 없는 굶주림에 지배돼 식료품 가게에 있는 통조림을 손으로 퍼먹던 케이티. 스스로 너무나도 놀라 눈이 벌게지도록 눈물을 흘리는 케이티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할 것 없다며 마음을 토닥여주던 다니엘의 모습. 관객들은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었다. 돈을 위해서 유흥업소 일을 시작한 케이티를 보며 펑펑 눈물을 흘리는 다니엘은 자신보다 약자인 이들을 위해 거리로 나선다. 제 상황 역시 녹록지 않을지언정 타인을 외면하지 않고, 비겁하게 갈등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어른. 많은 이들이 여전히 다니엘과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이유일 것이다.


씨네플레이 유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