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의 클래식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는 계속된다. 2010년 팀 버튼이 연출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대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디즈니는 2014년 <잠자는 숲 속의 공주>(1959)를 색다르게 변주해낸 <말레피센트>부터 매년 자사의 고전 만화영화들을 실사화한 작품들을 공격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2015년 <신데렐라>, 2016년 <정글북>, 2017년 <미녀와 야수>, 2018년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그리고 2019년엔 무려 <덤보>, <알라딘>, <라이온 킹>까지 세 작품을 개봉했다. 코로나 기간인 2020년에도 <뮬란>을 공개했으며, 아울러 2016년엔 앨리스의 속편인 <거울의 나라의 앨리스>를, 2019년엔 <말레피센트>의 속편을, 그리고 디즈니+가 개국한 2020년엔 <레이디와 트램프> 실사판을 준비하는 등 자사의 콘텐츠를 빼어난 CG와 스타 배우, 베테랑 연출진들로 포장해 업그레이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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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만난 <크루엘라>

그리고 이 라인업에 새로 추가될 작품이 바로 <101마리 달마시안>의 악녀 ‘크루엘라 드 빌’을 전면에 드러낸 오리지널 프리퀄 <크루엘라>다. 언제나 디즈니의 빌런을 뽑으면 빠지지 않고 순위권에 오르는 위엄을 자랑하는 크루엘라는 특유의 광기와 탐욕, 집념과 예술혼 그리고 엄청난 재력으로 본편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달마시안들과 레드클리프 부부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려왔다. 90년대 처음 실사화된 작품에서도 당연히 주연보다 글렌 클로스가 연기한 크루엘라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기대에 답하며 흥행에 성공해 속편까지 제작됐다. 이미 빌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말레피센트> 시리즈로 재미를 톡톡히 본 디즈니는 <조커>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뒤섞어낸 컨셉에 펑크록 시대인 7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크루엘라 드 빌의 삶을 쫓아간다.

크루엘라의 페이소스를 담아낼 감독으로 뽑힌 건 <아이, 토냐>로 삐뚤어진 심리의 인물군상을 탁월하게 다뤄 본 적 있는 크레이그 질레스피다. 호주 출신으로 광고계에서 굵직한 이력을 쌓아온 그는 패션업계의 다툼을 본격적으로 담아낼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스타일리쉬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타이틀 롤을 차지한 젊은 크루엘라 역으론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엠마 스톤이 일찌감치 캐스팅됐고, 엠마 톰슨과 폴 월터 하우저, 조엘 프라이, 마크 스트롱 등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이 합류해 실사화에 그럴 듯한 무게감을 부여했다. 선배 크루엘라였던 글렌 클로스는 엠마 스톤과 함께 제작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휘황찬란한 패션계를 묘사하기 위해 오스카 의상상에만 10번 후보로 올라 두 번이나 차지한 제니 비번이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했고, 피오나 크롬비가 가공한 세련된 프로덕션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해지펀드 출신의 오스카 후보 영화음악가 니콜라스 브리텔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건 <크루엘라> 음악으로 처음 디즈니에 입성한 니콜라스 브리텔이다. 배리 젠킨스의 <문라이트>와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각종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을 받은 그는 1980년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영화음악가다. 뉴욕의 유대 가정에서 자란 브리텔은 피아노에서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며 줄리어드 음대에 들어갔으나 이내 왜 인간이 음악에 매료될까에 궁금증을 느껴 하버드 심리학과로 전공을 바꾼다. 그러나 대학시절 꾸준히 힙합 연주그룹에서 키보드 주자로 활동하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심취했고, 동기였던 나탈리 포트만이 처음 연출한 단편 <EVE>에서 그의 “Forgotten Waltz No.2”가 처음 쓰이며 영화음악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후 포트만이 참여한 <뉴욕 아이 러브 유>의 한 꼭지를 비롯해 여러 단편 작업을 이어가며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음악가로 전업한 건 <노예 12년>에 이르러서였다. 한스 짐머가 맡은 스코어 외에 브리텔은 영화에 흐르는 흑인 영가와 댄스곡, 바이올린 소스, 편곡 등에 참여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실제 유행하던 스타일에 맞춰 철저한 고증 끝에 완성된 곡들로, 빌보드 매거진은 그를 두고 “<노예 12년> 음악의 비밀병기”라 극찬을 보냈다. 재밌게도 브리텔은 영화음악가가 되기 전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헤지펀드 매니저로 일했고(그래서 <빅 쇼트> 음악 때 감독이 그의 대본에 적힌 전문적인 금융(음악이 아니라!)업계 용어 메모에 놀라기도 했다!),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단편 영화에 제작으로 참여한 바 있는데, 그게 바로 데이미언 셔젤의 <위플래쉬>였다. 장편화 됐을 때도 제작에 이름을 올리고 일부 음악에 도움을 줬다. 이런 다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그가 확고히 영화음악가로 자리매김하게 된 건 배리 젠킨스와 아담 맥케이와 함께 한 일련의 작품들이 인정받으면서부터였다.


광기와 욕망, 상처를 다룬 컬러풀한 엘레지

영화의 배경이 되는 70년대 영국은 레드 제플린과 퀸, 딥 퍼플, 블랙 사바스, 핑크 플로이드, 섹스 피스톨즈 등 록음악이 폭발적으로 득세하던 시절이었고, 화려한 패션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디자이너들의 튀는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해 니콜라스 브리텔은 중의적인 의미에서 (마치 록 스타들에게 어울릴 법한) 일렉 기타를 스코어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이는 플로렌스 앤 더 머신과 함께 만든 주제가와도 직접 연결된다. 왜곡된 잔향이 휘몰아쳐가며 점점 더 흑화 되어가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기타의 존재감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울러 그의 본류와도 같은 피아노 역시 적극적으로 활용해 톡톡 튀는 발랄함과 꿈과 희망을 품은 뮤직박스 같은 서정성, 그리고 시련의 위로를 동시에 건넨다. 순수한 욕망과 광기, 그로테스크함을 복합적으로 암시하는 여성 보컬로 에스텔라와 크루엘라의 이중적인 속내를 드러내는 한편, 두터운 스트링이 만들어내는 처연함과 애절한 선율은 인간적인 동정심도 덧입힌다.

기존의 디즈니 영화음악을 맡았던 알란 멘켄이나 대니 엘프만, 제임스 뉴턴 하워드, 패트릭 도일, 존 데브니 등과 같은 고전적인 풀 심포닉 사운드의 드라마틱한 위용 대신, 모던하고 대중적인 감각을 취한 니콜라스 브리텔의 선택은 동화를 벗어나 현실로 성큼 다가온 <크루엘라> 세계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는 <문라이트>나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혹은 <빅 쇼트>와 <바이스> 때의 브리텔 음악과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며, 익숙한 그의 미니멀하고 절제된 양식이 아닌 왈츠 풍에 엔니오 모리꼬네를 연상케 하는 감각으로 만화 원작에 걸맞게 과장되고 컬러풀한 매력을 과시한다. 힐더 구드나도티르가 <조커>로 광기의 팡파레가 아닌 자기연민적이고 무너져가는 내면에 집중했던 것처럼 니콜라스 브리텔도 화려한 껍데기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상처와 굴욕, 시련의 소리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는 쟁쟁한 삽입곡들에 맞서 그의 스코어가 비집고 들어가 윤활유 역할을 하며 크루엘라 탄생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전설적인 삽입곡 그리고 원작에게 바치는 주제가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은 <크루엘라>를 위해 대략 50여 개에 이르는 노래들을 선곡했다. 사운드트랙에는 그 중 15곡만 추려져 있다. 아티스트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말이 필요 없는 퀸과 도어즈를 비롯해, 비지스, 니나 시몬, 이케와 티나 터너, 블론디, 더 크래시, ELO(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수퍼트램프, 조지아 깁스, 오하이어 플레이어 등 가히 전설들의 나열이다. 수록곡들은 (오차가 조금 있지만) 70년대 정수와 공기를 그대로 품고 있다. 라이브에서 더 빛을 발하는 “Bloody Well Right”를 필두로, 메탈 사운드의 시초로 일컬어지는 “Five to One”, 탁월한 멜로디메이킹으로 사랑받는 “Livin’ Thing”, 질주감의 하드 록 “Stone Cold Crazy”, 데보라 해리의 악마적 카리스마와 뇌쇄적 보컬로 중무장한 “One Way or Another”, 스투지스의 원곡을 존 맥크레가 커버한 “I Wanna Be Your Dog”, 감각적인 기타 리프로 사로잡는 “Should I Stay or Should I Go”, 펑키한 “Fire” 등 흥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반면 안소니 뉴리의 뮤지컬 넘버 “Feeling Good”과 콜 포터의 뮤지컬 넘버 “I Love Paris”, 희극배우 출신의 켄 도드가 부른 “Love Is Like A Violin” 등 감성적인 빈티지 곡들이 전달하는 고풍스런 비련과 애수는 캐릭터의 사연을 강조하고 아이러니를 극대화한다. 사운드트랙 중 “Call me Cruella”만 유일한 오리지널 곡으로 플로렌스 앤 더 머신과 니콜라스 브리텔이 함께 만든 주제가다. 밴드의 프론트 우먼인 플로렌스 웰시는 <크루엘라>에 참여한 소회를 밝히며 자신이 노래하는 법을 배운 것들 중 하나로 디즈니 노래를 뽑았는데, 종종 빌런들이 최고의 노래들을 갖고 있다며 그런 점에서 <크루엘라> 주제가를 만드는 건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을 이루는 것과 같다고 밝혔다. 그래서 이들의 노래는 1961년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 대한 경배를 바치듯 조지 브런스와 멜 레벤이 만든 “크루엘라 드 빌”과 유사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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