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항상 바뀔 수 있고, 진심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터뷰는 조금 조심스럽다.” 이수혁이 과거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단어를 두고, 충분한 고민의 시간을 갖는가 하면. 정확하지 않은 다른 말로 대체하기보다는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쪽인 듯하다. 구태여 에둘러 표현하거나. 흔히 ‘인생 영화’라고들 하는 것에도 조심스럽다. 영화를 사랑해온 이 배우가 최근에는 어떤 작품에 감명을 받았을지 궁금했다. 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며 그는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고 한 번 더 짚고 넘어간다. 이런 식이다. 말 한마디의 무게를 아는 그의 태도는 작품에 임할 때도 다름이 없었고. 이런 태도의 총체가 책임을 통감할 줄 아는 이 배우의 10년 후가 더 궁금해지는 이유가 된다.

<파이프라인>의 제작보고회가 있던 지난 5월 20일 이수혁을 만났다. 수백억이 걸린 도유 작전을 설계한 건우로 돌아온 그는, 돈 앞에 자비 없는 캐릭터의 정석을 보여줬다. 이수혁에게서 들은 <파이프라인> 비하인드 스토리를 독자에게 전한다.


<파이프라인>

<파이프라인>을 2019년에 찍었는데. 드디어 개봉했다.

찍은 지 시간이 좀 지났지만 여러 가지 후반 작업 때문에 지금 개봉하게 됐다. 연습했던 것만큼 멤버들과의 합이 잘 표현돼서 영화도 재밌게 봤다.

시나리오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나.

기억난다. 일단 건우라는 인물이 매력적이었다. 유하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영광스러웠고.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감독님께서 내 새로운 모습을 끌어내 주신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유하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감독님 영화를 워낙 재밌게 봐왔다.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같이 강한 누아르 영화를 많이 만드셨기 때문에, 처음에 <파이프라인>도 전작과 비슷한 영화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대화를 하면서 감독님이 오락 영화로서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 하신다는 걸 알았는데. 건우 캐릭터도 기존의 빌런들과 다른 지점이 있고. 망가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이런 부분들을 관객분들도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다.

건우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악역이다. 캐릭터에 어떻게 접근했나.

<밤을 걷는 선비>에서 악역을 해보긴 했는데, 이번엔 결이 좀 달랐다.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 현장이 조금 다르기도 하고. 준비 시간이 좀 더 있어서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하며 준비했다. 작가님이 계시긴 했지만 감독님도 각본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감독님이 언급하시는 바를 최대한 따르려 했고. 나라면 이 상황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연기했다. 물론 실제로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어찌 됐든 그건 스토리 안에서 건우가 나머지 도유 멤버들과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얘기였다고 생각했고.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고 나를 상황에 적용하려 했다.

땅굴에서 고생하며 촬영했다고 들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내가 땅굴에 들어가서 참여한 시간이 다른 멤버들과 같진 않지만, 그래도 현장에는 거의 함께 있었다. 영화에서 어떤 에피소드가 벌어지기 전후에 내가 항상 등장하기 때문에. 가서 함께 합을 맞췄고 촬영하는 것도 지켜봤는데. 일단 공간 자체가 너무 협소하고, 특수 효과 들어갈 것도 많아서 스태프들과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상대적으로 덜하긴 했지만.

<고교처세왕>에 이어 서인국과 세 작품째 함께하고 있다. <파이프라인>과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됐는데. 호흡이 어땠나.

<파이프라인>의 경우, 핀돌이(서인국)와 건우가 스토리상 정확히 대립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서로의 합이 중요했다. <멸망>의 경우 사실 붙는 신 자체가 많지 않다. 각자 다른 스토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호흡을 맞췄다기보다는, 대본을 보고 나서 의견을 주고받거나 격려를 많이 했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멸망>의 인기가 좋다. 지금껏 극에서 어두운색의 옷을 주로 입었던 것 같은데. 주익은 밝고 따뜻한 톤으로 감싸인 인물이다.

<멸망> 권영일 감독님과 임메아리 작가님의 팬이었다. 꼭 같이하고 싶었다. <멸망>은 판타지 로맨스 장르이긴 하지만. 그리고 주익이 건물주이기도 하고 능력도 좋긴 하지만, 내가 해왔던 역할들과 비교할 때 오히려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자연스럽게 연기하려 했다. 옷 스타일도 지금까지의 센 이미지에서 나와서 부드러운 이미지, 현실에서 여러분이 좋아하실 수 있을 만한 팀장님의 룩을 만들어 보려 했다. 감독님께서 스타일링이나 비주얼 적인 것에 대해서는 배우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주시는 편이라 내 의견도 많이 말씀드렸다.

주익은 차갑게 보이는 수도 있는 인물인데. 속은 또 다르다. 실제 성격과 겹치는 부분은 없던가.

주익이랑 비슷한 부분이 분명 있다. 쓸데없는? 쓸데없다기보다는 좀 필요한 행동, 필요한 말 위주로 많이 하게 되고. 나도 주익이처럼 정확하기도 하고. 주익은 내가 맡았던 다른 역할에 비해 나를 닮았고, 또 내가 닮았으면 하는 사람이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극 중 주익은 웹 소설, 주로 멜로 소설을 끊임없이 읽는데. 영화를 가려보지 않는다고 듣긴 했지만, 이수혁도 <그녀> <어바웃 타임> <로미오와 줄리엣> 등 멜로를 좋아한다. 이런 영화를 볼 때 과몰입하는 편인가.

영화를 볼 때는 항상 최대한 집중하려 한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걸 즐기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나는 보통 많이 찾아보고 영화를 본다. 보고 나서도 감독님의 의도나 배우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연기했는지에 대해 찾아보려 하고. 과몰입하는 것 같다.

<파이트 클럽>을 정말 좋아하더라.

일단 배우라면 한 번쯤 해봤으면 좋겠다 싶은 캐릭터들이 여럿 나온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기도 하고.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타일, 촬영기법, 사운드트랙 등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은 퀄리티의 영화다. 좋아하는 배우가 여러 명 있지만 그중에서도 브래드 피트를 많이 좋아하는데.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이라는 캐릭터로 그분의 인생 연기를 볼 수 있어서 <파이트 클럽>을 좋아한다.

영화 삽입곡도 많이 듣는 것 같던데. 어제 ‘씨네타운’에 나와서 몇 곡 추천한 걸 봤다.

그건 사실. 나는 오히려 차트에 있는 노래를 더 많이 듣는다. 어제는 아무래도 나간 자리가 ‘씨네타운’인 만큼 추천곡을 영화 OST 위주로 뽑았었다. 웬만하면 인터뷰나 어떤 자리에서 뭘 추천할 때, 그때 당시의 것보다 팬분들이 오래 봐주시기 좋은 걸로 고르게 된다. 추천한 곡들도 물론 평소에 즐겨 듣는 노래들이긴 하다.

지난해 인터뷰에서는 <아이리시맨>을 많이 언급했는데. 업데이트해 보자. 최근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나.

<듄>의 예고편을 재밌게 봤는데. 개봉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아쉬운 마음에 티모시 샬라메 필모그래피를 도장 깨기 하듯 보고 있다. 그중 최근 <더킹: 헨리 5세>를 봤다. 로버트 패틴슨도 그렇고 티모시 샬라메도 그렇고 캐릭터를 너무 잘 소화해서 같은 배우로서 부럽더라. 최근에 본 영화, 딱 그거다. 뭐, 최근에 본 것 중(!) 좋은 게 아니고. (웃음) 가장 최근에 본 영화.

잠깐 <멸망>으로 돌아와서. 동경(박보영)과 주익의 티키타카가 좋더라. 박보영은 절친 김영광과 <너의 결혼식>으로 만나기도 했었는데. 혹시 박보영과의 호흡에 대해 전 상대 배우, 김영광과 이야기한 건 없는지 궁금해지더라.

방향성에 대해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현장에서 박보영 배우가 체구와는 다르게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본인 연기도 잘하지만 상대 배우에 대한 리액션도 너무 좋고. 꼭 함께해보고 싶었던 배우였는데, 이번에 같이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최근 김영광이 출연한 <안녕? 나야!>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고, 둘이 자주 만난다고 들었다. 평소에 연기 관련해서도 의견을 나누는 편인가.

인국 배우랑은 작품이나 연기에 관해 얘기를 많이 하는데. 김영광 배우랑은 너무 친해서 그런지 비밀들, 게임 얘기, 음악 추천, 뭐 이런 사소한 얘기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안녕? 나야!>는 김영광도 김영광이지만, <본 어게인> 이현석 감독과의 연이 이어져 출연하게 됐다고 들었다. 장기용, 김영광, 그리고 이수혁. 모델 출신 배우들과의 연이 깊은 감독 같은데.

<본 어게인> 촬영하면서 좋은 기억이 있었는데, 새로 작품을 메인으로 연출하신다고 해서 장기용 배우와 내가 뭐라도 도와드리고 싶다고 했다. 대본도 같이 보며 카메오로 나갈만한 틈을 찾았다. 더 기분 좋게도 김영광 배우가 주연으로 활약하는 작품이었다. 좋게 말하면 기분이 정말 좋은 거고, 대충 말하면 일타쌍피인 거다. (웃음) 감독님께도 잘 보이고, 영광이 형도 도와주고.

<멸망> 직전에 참여한 웹드라마 <핸드메이드 러브>도 판타지 장르다. <밤을 걷는 선비>도 그렇고. 이수혁에게는 익숙한 장르인 듯한데. 어떤 설정에서든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이야 매한가지이겠지만, 작중 몽환의 세계에 몰입해야 하는 작업이 추가적으로 필요한 장르다.

가장 중요한 건 대본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거다. 보시는 분들이 작중 서사를 납득하실 수 있게끔, 비주얼이든 행동이든, 대사 톤 조절이든, 연출님과 회의를 해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경험을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미니시리즈나 장편 드라마를 주로 했었는데, <핸드메이드 러브>라는 숏폼 드라마를 하면서 단시간에 여러 스태프분들이 모여서 이만한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숏폼에 대한 내 인식도 바뀌었다. 이런 플랫폼에서 실험적인 캐릭터를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핸드메이드 러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많이 봐주시기도 했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들어보니 제작진과의 대화를 특히나 중요시하는 것 같다.

그런 편이다. 어릴 때는 캐릭터 위주로 작품을 선택하려 했었는데. 점점 내 캐릭터보다는 연출님, 작가님들이 기준이 되는 것 같다. 같이 해보고 싶은 분들이. 그러다 보니 대화도 많아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

중간중간 <일리있는 사랑> <동네의 영웅> 같은 고마운 작품들 덕에, 이수혁의 목수, 고시생 캐릭터를 만날 수 있긴 했지만. 멀끔한 이미지 덕일까, 종종 검사, 본부장 등 수트를 주로 입는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흐트러진 인물에 대한 갈증은 없나.

항상 있다. 좋은 배우가 되는 게 꿈인데, 모델 때의 이미지도 있어서. 체중을 증량한 것도, <동네의 영웅> 같은 작품을 선택했던 것도,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했던 도전들이었다. 연기를 시작했을 때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많이 했어서. 제작발표회나 인터뷰를 할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번엔 사람 역할이에요,” 이런 식으로 유쾌하게 말한 적도 있다. 이제는 그래도 시청자분들께서 내가 주익이 같은 인물을 연기해도 팀장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는 것 같고. 이런 지점에서 조금은 발전이 있지 않았나 싶다.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고, 이것저것 많이 해보고 싶다.

필모그래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도 <일리있는 사랑>을 꼽았더라.

가장 성장, 성장이라고 말하면 웃길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연기적으로 스스로 배움의 폭이 가장 컸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일리있는 사랑>이다. 한지승 감독님께서 많이 가르쳐주셨다. 아직까지도 김준, 김목수 역할을 좋아한다.

겸손하다. ‘성장’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러워하고.

내가 내 입으로 하기가 좀. 배움이 가장 적당한 단어인 것 같다.

전에는 감추는 걸 미덕으로 여겼는데, 생각이 바뀌어 SNS도 업로드하고 작년에는 예능까지 출연했다. 연기 외 또 도전하고 싶은 게 있을까.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기에 일단 기준점은 연기다. 예전에는 배우로서 무언가를 보여드려야겠다는 것에 갇혀있었다. 예능이나 다른 콘텐츠를 통해 인사드리고 나서 팬분들이 너무 좋아해 주시는 걸 보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걸 팬분들이 좋아하시는구나’, ‘팬분들 위해 이런 모습도 더 많이 보여드려야겠다’ 생각하는 정도다. 다른 걸 욕심낸다기보다는.

이수혁의 인스타그램에서 최근 종종 발견되는 코멘트가 있다. ‘내일 삭제 예정.’ 팬들은 사진을 오래오래 보고 싶어 할 텐데, 왜 삭제하려 하나.

그건! 최근에 시작한 거다. (웃음) 얼마 안 됐다. 너무 감사하게도, 내가 사진을 올리면 팬분들은 바로 알아채 주시니까 지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냥, 뭐랄까. 내 인스타그램에 어떤 기준이 있는 건 아닌데. 가끔 스스로 올리기 오글거리는 사진이나 글에 괜히 지운다고 해본 것 같다. 몇 번 안 했다. (웃음) 두어 번쯤 한 것 같다.

<투사부일체> 단역도 있었지만, 주연 작품으로 치면 <이파네마 소년>부터 10년 넘게 연기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어떤 기분인가.

<이파네마 소년> 찍을 때 굉장히 행복했다. 촬영 기간이 길었는데. 너무 부족하지만, 영화의 규모와 상관없이 어쨌든 첫 작품에 한 스토리를 끌고 나갈 수 있었고 그게 너무 좋았다. 가끔 다시 보면 좀 오그라들기도 하지만, 내 어릴 때 모습이 남아있는 영화이기도 해서 아끼는 영화다. 그때로부터 10년 후에, 내가 영화를 보러 오던 극장에 내 얼굴이 이렇게 걸려있다는 게.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던 유하 감독님과 작품을 같이하게 됐다는 게. 참 재미있다. 더 열심히 해야겠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최근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란 건 팬분들이나 나를 오래 지켜봐 주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찍었다. <파이프라인> 많은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멸망>도 파이팅이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

사진 YG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