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더라” 야구를 그만두었을 때 어땠냐는 광호(정재광)의 물음에 민철(이규성)이 건넨 대답이다. 어쩌면 민철에게도 야구는 어느 시기에는 삶의 전부였을지 모른다. 절실했던 것과 이별해 본 민철은 자신이 고민했던 그 순간에 한발 들어선 광호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광호의 절박함에 손을 내밀어주다가도 어느새 계속 꿈을 좇으라고 내민 손을 거두는 민철의 마음에서 서먹하지만 감춰진 온기가 느껴진다.

화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시청자들이 너무나도 궁금해하던 까불이가 이규성이 연기한 흥식이로 밝혀진 순간, 그는 시청자들의 관심과 미움(?)을 단박에 차지하게 됐다. 주목받던 시기 차기작으로 <낫아웃>을 선택한 이규성은 자신과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민철의 캐릭터가 너무 맘에 들었다고 한다. 생애 처음으로 방문한 전주국제영화제 게스트 배지의 사진을 민철 사진으로 한 것만 봐도 짐작하기 충분하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 정혜건에 이어 새 영화 <낫아웃>의 민철로 돌아온 이규성을 지난 5월 24일 언론시사 직후 만났다.


<낫아웃>에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동백꽃 필 무렵>(2019) 끝난 직후 제일 먼저 들어왔던 시나리오였다. 내가 데뷔를 <스윙키즈>(2018)라는 영화로 했다. 단편영화 찍다가 갑자기 장편 상업영화로 가버린 거였다. 어떤 면에서 장편 독립영화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 갈증을 느끼던 찰나에 들어온 시나리오였고, 오디션 없이 시나리오가 먼저 들어오는 귀한 경험이기도 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는데 심지어 캐릭터도 좋았다. 그래서 회사에 강력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무조건 하고 싶다고.

<동백꽃 필 무렵>으로 주목받던 시기라 차기작에 대해 고민이 컸을 것 같다.

민철이란 인물은 친구들과 있을 때 내 모습과 가장 비슷한 인물이었다. 어쩌다 보니 계속 어둡고 무거운 인물들을 연기하다가 내 모습과 비슷한 민철을 보니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철이 천연덕스럽기도 하고 현실적인 대사가 인상 깊더라.

감독님과 세 번째 미팅을 했을 때 처음으로 감독님은 내가 대사를 어떻게 하는지를 들으셨다. 그전까지는 그냥 나를 전적으로 믿으셨다. 내가 대사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 물어보면 안 들어도 다 안다고 하시더라.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애드립도 자유로웠다. 첫 장면 같은 경우는 거의 상황극에 가까울 정도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한 모습이 잘 담긴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낫아웃>.

민철의 스타일링이 돋보인다. 탈색한 머리도 그렇고 어떻게 준비했나.

태어나 처음으로 탈색을 해봤다. 심지어 그 머리는 염색까지 해야 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2020)를 동시에 촬영하고 있었는데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통가발을 쓰고 촬영했다. 민철의 나이대나 그가 겪은 일, 현재 하고 있는 일 등 여러가지 상황들이 만들어 낸 민철만의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심리적인 면에서는 조금 하이텐션을 유지하는 것으로 외형적인 부분은 탈색한 머리로 표현해봤다.

민철은 부상 때문에 야구의 꿈을 접었다. 그에게도 어쩌면 야구가 자신의 전부였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광호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민철은 할머니가 아프시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이유도 병원비 같은 현실적인 부분 때문일 것 같았다. 민철도 절실하게 야구를 했던 기간도 있었겠지만 부상이나 경제적 문제 같은 현실적인 벽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왔을 것 같다. 민철이 때 꿈을 계속 고집할 거냐 아니면 현실에 굴복해 지금 닥친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후자 쪽을 선택한 거다. 그러다 보니 광호가 나와 얼마나 친하고 안 친하고를 떠나 돈이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그 절실함을 알고 있으니 무시하지 않고 선뜻 도와주려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겨울 날씨에 오토바이 타는 신이 많았다. 게다가 유독 모든 출연 장면이 밤에 촬영됐다.

정말 이 부분을 꼭 얘기하고 싶었다. (웃음) 민철은 겉멋이 너무 들어있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탈 땐 바람막이를 입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따뜻한 곳에서는 또 패딩을 입고 있다. 추운 곳에서는 더 춥고 따뜻한 곳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따뜻했다. (웃음) 오토바이 탈 때 정말 추웠는데 광호랑 계속 같이 있으면서 함께 추워하니까 왠지 위안이 되고 그러더라. (웃음)

정말 춥다(욕이 섞인)는 대사가 진심이 느껴지더라.

정말정말 추웠다. 그거 연기 아니다. (웃음)

원래 오토바이를 못 탔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SNS에 오토바이와 찍은 사진도 있더라.

오토바이 타는 법은 <낫아웃> 하면서 배웠다. <낫아웃>은 유독 처음인 게 많다. 탈색도 처음, 염색도 처음. 그리고 오토바이도 처음이다. 오토바이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내 인생에 오토바이 탈 일은 없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배우가 어떤 작품을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도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지 않나. 그래서 호의를 가지고 오토바이를 배웠다. 재광이 형은 처음 내 뒤에 타는 것을 엄청 무서워했다. (웃음) 내 연기는 믿는데 오토바이는 기술이니까. 몇 번 촬영을 하고 나니 그제야 형도 안심을 하게 됐고 나도 나중엔 오토바이 타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 그래서 스쿠터를 한 대 구입했다.

이규성 인스타그램(@lee.kyu.sung)

처음인 게 많은 영화 맞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GV를 하기도 했다. 전주영화제 게스트 배지 사진이 극중 민철의 모습이더라.

민철 캐릭터에 대한 애착 당연히 많다. 최근 강한 캐릭터, 그러니까 임팩트가 큰 인물들을 연기했는데 어떤 작품을 재미있게 봤다고 하시면서도 내가 나온 줄 모르시는 분들을 여럿 봤다. 그래서 저를 좀 알리려고 자기 PR을 하고자 그 사진을 선택한 부분도 있다. 영화제라는 게 모든 배우들 마음 한구석에 있는 꿈 같은 거 아닌가. <낫아웃>이 내 꿈을 실현시켜줬고 결과까지 좋았는데 그게 바로 전주에서 이뤄진 거다.

다른 영화제 초대받을 때도 프로필은 그렇게 할 건가.

그래 보려 한다. (웃음)

송이재 배우와 많은 호흡을 맞췄다.

송이재 배우는 가장 나중에 캐스팅됐다. 미리 캐스팅된 나와 재광이 형에게 감독님이 어떤 인물이면 좋겠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었는데 아직 우리 캐릭터도 잘 모르는데 물어보신다 한들 할 말이 있었겠나. (웃음) 그냥 감독님 원하시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재가 뽑혔다. 첫 미팅을 했을 때 ‘아 정말 너무 불법 주유소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 친구라면 주머니에 불법적인 것 하나쯤 있겠다 싶었는데 사실 이재는 정말 너무 건전하게 자라왔더라. (일동 웃음)

오정세 배우와 작품 인연이 깊은데, 최근엔 오정세 배우가 속한 소속사까지 들어갔다.

오정세 선배님과 인연에 대해 누가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성공한 덕후라고. 그전까지는 그냥 덕후였는데 이제 만나 뵙기도 했고 함께 연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내 첫 영화 <스윙키즈>에서 처음 뵙고 정말 팬이라 말씀드렸다. 그러면서 나중에 또 같은 작품에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가서 드라마 <진심이 닿다>(2019)로 두 번째 만나 뵙게 된 거다. 너무 잘됐다 하며 촬영하고 뒤풀이 때 선배님 다음 작품 뭐하시냐 여쭸더니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하시기로 했다는 거다. 저도 <동백꽃 필 무렵> 최종 미팅이 남아 있었을 때여서 선배님께 제가 무조건 이거 붙을 거라 했다. 그러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붙어버려서 세 번째로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곤 이제 더 이상은 못 만나겠지 했는데,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감독님이 제 머리 색깔 보고서 혹시 아역인데 특별 출연해줄 수 있냐 문의하신 적이 있다. 그 아역이 바로 오정세 선배 아역이라 하셔서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네 번을 연달아 만난 거다. 이렇게 우연이 여러 번 겹치니 누군가는 그때부터 오정세 선배님과 내가 같은 회사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더라. 이규성 쟤 너무 오정세 배우한테 끼워 넣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말이다. (일동 웃음)

<동백꽃 필 무렵> 이후 많은 분들에 관심이 쏟아졌다. 이목이 집중된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배우가 영화와 드라마 쪽으로 넘어오면 연기도 중요하지만 인지도도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내가 인지도를 좇는다고 좇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비우려 했다. <동백꽃 필 무렵> 캐스팅되고 나서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많이 했다. 그때 어머니께 이 작품 끝나면 우리 이렇게 같이 편하게 못 걸을 거라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정말 그게 이루어졌다. 고맙고 감격스러웠던 때라 많이 울기도 했고.

<동백꽃 필 무렵> 인터뷰 당시 포털사이트에 이름이 처음 등록되고, 이후엔 조금씩 위로 올라가다 마침내 제일 처음에 이름이 보인다고 기뻐했다 들었다.

맞다. 정말 이겨야 할 상대가 많이 있었다. (웃음) 많은 이규성분들이 조금 적당히 활약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들 잘하셔서. (일동 웃음)

KBS드라마 <오월의 청춘>.

현재 방영 중인 광주를 다룬 드라마 <오월의 청춘>에 정혜건 역으로 출연 중이다.

부모님이 모두 전남대학교 출신이다. 학교 때 만나 결혼까지 하셨다. 부모님 대학 시절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당시에 친구분들도 많이 잃으셨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후 마음속 한구석에 5·18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작품을 배우로서 꼭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작품이 열렸을 때 역할의 크기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무조건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오디션을 봤는데 그 진심이 닿았는지 다행히 캐스팅되었다.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배경은 역사의 한 부분이지 않나. 그러니까 누군가는 내가 연기하는 인물을 보면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정말 필사적으로 준비했다.

앞으로 어떤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고 싶나.

원래 그런 것이 없었다. 무슨 얘기냐 하면 모든 캐릭터는 다 소중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모든 역할이 또 다 조금씩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엔 다시 한번 악역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평범함 속에 선천적인 악이 숨어있는 인물 말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흥식(까불이)을 끝내고 나서 그냥 무엇을 해도 나를 무섭게 보는 분들이 많이 생기셔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웃음)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작년에 찍은 <보이스>(가제)란 영화가 있다. 다음은 아마 이 영화로 찾아뵙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kth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