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주연 배우들. (왼쪽부터) 에밀리 블런트, 존 크래신스키, 노아 주프, 밀리센트 시몬스

존 크래신스키는 시트콤 <오피스>에 나와 이름을 알렸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에밀리 블런트 남편으로 더 유명했다. 오죽하면 지미 팰런 쇼에서 자신을 못 알아본 출입국관리소 직원 에피소드를 자폭개그 하듯 털어놨을 정도니, 대중에게 희미한 존재감의 배우였던 건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반등의 기회가 찾아온 건 브라이언 우즈와 스콧 벡이 쓴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읽고 나서였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 촬영 현장, (오른쪽부터) 에밀리 블런트, 존 크래신스키

막 <잭 라이언> 시리즈에 캐스팅돼 촬영으로 바쁜 일정에도 크래신스키는 각본에 매료돼 직접 각색에 참여했고, (이미 두 편의 연출작이 있었던 만큼) 주연과 동시에 연출도 맡게 된다. 실제 부부가 부부를 연기해야 된다는 부담감 때문에 에밀리 블런트는 출연을 고사했지만, 그녀 역시 각본을 읽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제작비가 1천 7백만 달러에 불과한 이 호러 소품은 전 세계적으로 그 18배에 달하는 3억 달러가 넘는 흥행 초대박을 거뒀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촬영 현장의 존 크래신스키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이를 기점으로 존 크래신스키는 달라졌다. 주연을 맡은 가장 미국스러운 히어로 <잭 라이언>은 순항하며 시즌3 제작이 확정됐고, 그는 케네스 브래너나 존 파브로, 조지 클루니와 벤 애플렉, 조던 필 등의 뒤를 이어 배우이면서도 흥행과 완성도를 갖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후속편 논의가 시작된 것도 당연했다. 속편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작품이었지만, 크래신스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각본을 쓰고 제작에도 뛰어들어 “조용한 장소”의 두 번째 장을 완성했다. 그러나 2020년의 다른 작품들처럼 코로나라는 암초에 부딪쳐 개봉이 1년 이상 밀리고, OTT서비스로 공개될 위기(!)까지 전락한다. 최종적으로 극장 개봉을 고수한 끝에 <콰이어트 플레이스2>는 코로나 이후 북미 최초 1억 달러 돌파작이란 영광을 거머쥐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

코로나 시대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될 이유

이는 개봉 3주 차에 거둔 성적이다. 코로나가 아닌 시기에도 결코 나쁘지 않은 흥행 속도지만, 지난 1년 3개월간 북미 1억 달러 영화가 전무했단 걸 헤아려본다면 의미심장한 업적이다. 먼저 개봉한 영화들이 좋은 분위기를 조성한 점도 한몫했다. 지난 4월에 개봉했지만 <콰이어트 플레이스2>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북미 1억 달러를 넘긴 <고질라 VS 콩>을 비롯해, <크루엘라>와 <컨저링3: 악마가 시켰다> 등이 뜨겁게 박스오피스를 달구며 괴멸에 가까웠던 북미 극장가를 완연히 살려냈다. 그러나 무엇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라는 작품 자체가 가진 높은 완성도와 재미, 그리고 역병이 돌아 고립된 현 시대상황을 의미심장하게 반추해낸 것과 같은 기시감이 흥행을 더욱 부추긴 기세다. 마치 히치콕이나 스필버그를 보듯 정공법적이면서 고전적으로 서스펜스와 스릴을 선사한 존 크래신스키의 연출은 탁월하고도 영리했다.

영화 속 캐릭터들처럼 관객들도 무의식적으로 ‘조용한 공간’을 만드는 데 동참한다는 점에서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새로운 종류의 어트랙션 영화에 가깝다. 누가 소리라도 낼까 봐 팔걸이를 붙잡고 다 같이 숨죽이며, 반딧불이 하나 없는 고요함을 공유하는 체험은 극장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짜릿한 순간을 제공한다. OTT나 스트리밍에선 결코 맛볼 수 없는 불특정 다수가 하나 되는 연대의 시간이자 4D 체험과도 같은 관람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다. 배급사의 끈질긴 권유에도 크래신스키와 블런트 그리고 마이클 베이가 극장 개봉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물론 흥행 지분과 관련된 경제적 이득이 가장 컸겠지만) 극장 관람이 주는 이 영화만의 특권(!)과 전편의 성공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혜안과 고집 덕분이기도 하다.


마르코 벨트라미

디스토피아 전문 영화음악가 마르코 벨트라미

대사조차도 거의 없는 이 영화(브라이언 우즈와 스콧 벡이 처음 쓴 스펙 스크립터엔 대사가 딱 한 줄이었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영화에서도 수화나 감탄사를 제외한 대사는 25개뿐이었다. 무성영화 이후 최저로 대사가 없는 영화였다!)에 특별한 소리들로 구성된 음악을 부여한 건 대니 엘프만 이후 가히 할리우드의 어둠 전담 영화음악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마르코 벨트라미의 솜씨다. 유난히 그의 필모에서 호러와 스릴러 같은 장르물이 두드러지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들이 많은 건 다 이유가 있다. 장인이라 할 정도로 그는 전통적인 할리우드 작법에 실험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결합해 황폐화되고 멸망한 세상에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투쟁기를 음악적으로 잘 구현해냈다. 장중한 브라스와 울부짖는 혼, 파워풀하게 휘몰아치는 퍼쿠션에, 암울함을 달래는 서정적인 스트링 그리고 일렉트릭과 실험적인 소리들을 결합한 독자적인 스타일은 그만의 인장으로 강렬하게 영화에 새겨진다.

(왼쪽부터) 존 크래신스키, 마르코 벨트라미

마릴린 맨슨과 협업했던 <레지던트 이블>을 필두로, 시리즈 중에 가장 무거운 엔딩을 맞이하는 <터미네이터 3 - 라이즈 오브 더 머신>, 자신의 스승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멸망의 징조를 물려받은 <오멘> 리메이크, 본격적인 시한부 멸망론 영화 <노잉>, 전설적인 걸작의 프리퀄인 <더 씽>, 봉준호 감독과 함께한 묵시록 <설국열차>, 좀비로 인해 망하는 <월드워Z>와 <웜 바디스>,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아이 로봇>과 <더 기버: 기억전달자>, 괴물로 망한 세상 사랑을 찾아 떠나는 <러브 앤 몬스터즈> 그리고 멸망한 세계의 가족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에 이르기까지 마르코 벨트라미가 들려주는 잿빛의 마이너한 테마들은 기묘하고 불균질한 엠비언트 소음들과 결합해 무너져버린 세상의 긴장과 공포, 생존에 대한 갈망과 절망, 순수한 악을 담아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 사이에서 언뜻언뜻 들리는 희망적인 테마가 사랑을 이야기하고 감정을 표출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OST

영화가 조용해서 더 효과적인 영화음악

영화 내내 조용히 해야 되는, 그래서 대사가 거의 없는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 아이러니하게 음악의 역할은 더 강조된다. 쓰임이 넘치면 도드라지고 적으면 공허하다. 마르코 벨트라미는 음향과 음악 경계에 놓인 사운드를 통해 정적인 순간의 긴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얼마 들리지 않는 가족의 테마를 최소로 활용하며 이들의 연대감을 강화시킨다. 존 크래신스키는 영화 내에서 등장인물들이 오랜 기간 침묵 속에서 생활해왔기 때문에 음악이 약간 희미하게 들리길 원했는데, 이를 위해 벨트라미는 가족의 테마를 담당하는 피아노 두 대 중 하나의 검은 건반을 1/4단계 디튠(복수의 음원을 갖는 악기로 각 음원의 튜닝이 동일하지 않고 음을 약간 틀리게 만드는 것)시켜 남는 잔향으로 색다르게 들리게 만들었다. 속편에서도 이 방법은 그대로 이어져 이번엔 모든 건반을 1/4단계 디튠시켜 왜곡된 음향으로 소리에 취약해진 사람들의 심리와 감정을 표현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2> OST

대부분의 영화음악가들이 각본을 받으면 먼저 음악을 착상하는 것과 달리 벨트라미는 편집 영상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나리오만으론 행간마다 해석할 여지가 많았기에 대본을 기초로 하는 것보다 실체화된 영상을 마주하고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더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번 속편에서는 아예 자신이 만들었던 1편의 음악을 템프 트랙(영화 편집 과정에서 임시로 배치한 음악)으로 활용했는데, 전작과의 연계성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아예 액션 시퀀스에선 1편 스코어가 고스란히 재활용된 부분도 감지된다. 요한 요한손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서 들릴법한 울부짖는 혼과 심장 박동만큼 빠르게 약동하는 퍼쿠션, 중저음으로 묵직하게 보잉하는 스트링과 울림이 극대화된 피아노의 소리들이 강조돼 이뤄내는 극도의 긴장감의 조합은 ‘입틀막’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와 찰떡궁합을 선사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

보청기 소리와 앞날을 예견하는 2개의 삽입곡

물론 그 속의 살아남은 가족들의 비통함을 담아놓은 애절한 선율과 표현 못하는 슬픔을 꾹꾹 눌러낸 함축된 미니멀한 선율들은 정신없이 몰아치는 조용함의 공포 속에서 부유하다 사라지며 생존이라는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드러낸다. 영화음악 감상에선 다소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음향적인 측면에서 방해되거나 겹쳐지지 않게 정교하게 설계된 마르코 벨트라미의 사운드 디자인은 이전부터 <3:10 투 유마>나 <허트 로커>나 <더 홈즈맨> 등 다양한 작품들에서 시도해오던 실험성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특히나 보청기의 소음이 중요한 실마리로 작용한다는 점에 착안해 전자기파의 소음과 왜곡되고 합성된 소스들과 엠비언트는 스코어 내에서 주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2>

‘소리 내면 죽는다’라는 컨셉으로 극도로 조용함을 요하는 영화이다 보니 삽입곡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 1편에선 부부가 이어폰을 서로 나눠 끼며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순간 닐 영의 '하베스트 문'(Harvest Moon)이 등장한다. 1992년 발표돼 닐 영의 건재함을 알렸던 곡으로 헤어짐을 앞둔 남자가 추수맞이 달을 보며 사랑을 덤덤하게 고백하는 가사가 이 부부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 쓰인다. 2편에선 다른 생존자도 존재한다는 걸 암시하는 신호로서 감미로운 바비 다린이 부른 친숙한 스탠다드 넘버 '비욘드 더 씨'(Beyond the Sea)가 흘러나온다. 픽사의 히트작 <니모를 찾아서>에 삽입됐고, 동명의 영화로도 바비 다린 일대기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잘 알려진 노래인데, <콰이어트 플레이스 2>에서는 희망을 상징하는 곡으로 쓰였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