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프라이드의 달, 성 소수자 인권의 달이다. 한국어로 성 소수자라고 표기되는 이들은 세계에서 통상 LGBTQ로 불린다. 각각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양성애자), 트렌스젠더(Transgender, 성전환자), 퀴어(Queer, 성 소수자 전체)를 지칭한다. 프라이드의 달은 성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1969년 6월 뉴욕에서 일어난 성 소수자 해방운동을 기념하며 1970년 6월에 시작됐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캐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브로크백 마운틴>. 우리가 사랑하는 작품들 사이에 퀴어 영화가 자연스레 자리하게 된 것은, 소수자를 향한 인식이 서서히 제고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기에 반갑다. 6월이 다 가기 전에 위의 영화들과 비교해 덜 알려진 LGBTQ 소재, 곧 보편적 사랑의 일종을 소재로 하는 왓챠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도 모두 왓챠에서 감상할 수 있다.


톰보이

감독 셀린 시아마 │ 출연 조 허란, 말론 레바나, 진 디슨, 소피 카타니, 마티유 데미 │ 2011 │ 82분

로레(조 허란)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다. 파란색을 좋아하고 짧은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리는 로레는,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만난 리사(진 디슨)와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미카엘이라 한다. 충동적으로, 얼떨결에, 혹은 처음부터 그러고 싶었기 때문에 미카엘이라고 해버리고 만다. 아이들은 의심 없이 그를 소년으로 받아들인다. 이름쯤은 쉽게 바꿀 수 있었지만, 이미 달리 생긴 신체는 내 멋대로 할 수가 없다. 웃옷을 벗어 팀을 구별 짓는 남자아이들의 축구 게임에 쉬이 뛰어들 수 없고, 수영 한 번 하러 가는 데에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톰보이>(2011)는 미카엘이 되고 싶었던 로레의 여름을 담았다. 위기를 그런대로 잘 넘겨 오던 미카엘이었지만 어머니의 개입과 함께 그의 비밀이야기는 종결된다. 어머니에 의해 로레는 예쁜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비밀을 발각당하는, 잔인한 처벌을 받는다. 다행히 영화가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네 이름이 뭐야?” 80분 만에 이름을 다시 묻는 리사에게 로레는 웃으며 답한다. “로레.” 버려둔 원피스와 이름을 뒤로하고, 미카엘이 아닌 로레로 살아갈 한 아이의 얼굴과(희망과) 함께 <톰보이>의 막이 내린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으로 국내에도 공고한 팬층을 갖게 된 셀린 시아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톰보이>는 이른바 시아마의 성장기 3부작(<워터 릴리스>(2007), <톰보이>, <걸후드>(2014)) 중 한 편이다. 국내에서는 가장 최근 개봉한 이 영화에서 시아마는, 누군가 고정해 놓은 어떤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톰보이의 세상을 그린다.


모리스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 출연 휴 그랜트, 제임스 윌비, 루퍼트 그레이브즈 │ 1987 │ 140분

국내 포스터에서 휴 그랜트의 얼굴이 더 돋보이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모리스(제임스 윌비)다. 1909년 케임브리지의 가을학기, 학내 사교 클럽에 들어간 모리스는 클라이브(휴 그랜트)를 만난다. 기독교 교리가 기저에 깔린 ‘정석적인’ 교육을 받아온 모리스에게 동성애는 가장 나쁜 죄악이었다. 그의 불완전한 신념은 서서히 깨어지다가 클라이브의 고백에 무너져내린다. 두 사람은 사랑을 우정으로 위장해 서로의 집을 오가며 연애를 이어가는데. 정치계 유망주였던 동급생 리슬리(마크 탠디)가 남성과 밀회를 즐겼다는 이유로 미래를 빼앗기고 몰락하는 것을 보고 클라이브는 겁을 먹는다. 클라이브를 연인으로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두려움 앞에 사랑을 뒀던 모리스였기에. 이들 사랑의 불균형은 이별로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다. 실연의 아픔을 겪는 모리스에게, 클라이브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 알렉(루퍼트 그레이브즈)이 다가온다. 모리스의 사랑을 해피 엔드를 맞지만, <모리스>(1987)의 마지막 장면은 창문에 덧창까지 굳게 닫는 클라이브와 그의 아내가 채운다. 모두에게 해피 엔드일 수 없는 끝은 비감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은 제임스 아이보리에게 제90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안겼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지 32년 만인 지난 2019년 국내 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모리스>는 아이보리 감독의 작품이다. 품위를 지키고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 수 없는 영국 신사의 세계와, 억압받는 이들의 들끓는 감정을 세밀히 표현한 아이보리는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았고. 데뷔작이 같은(<프리버리지드>(1982)) 두 배우, 제임스 윌비와 휴 그랜트는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싱글 맨

감독 톰 포드 │ 출연 콜린 퍼스, 매튜 구드, 니콜라스 홀트, 줄리안 무어 │ 2009 │ 101분

1962년 11월. 짐(매튜 구드)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지 벌써 8개월이 지났다. 화면의 채도가 그렇듯 대학교수 조지(콜린 퍼스)의 삶은 회색빛이다. 그가 짐과의 기억을 떠올려 화면 역시 선명도를 회복할 때를 빼면. <싱글 맨>(2009)은 오랜 시간 함께한 애인을 잃고 상실감에 빠져 자살을 결심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다. 강단에 선 조지는 소수자가 박해받는 이유를 두려움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릴 위협한다는 두려움, 늙어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도 관심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박해의 이유다.” <싱글 맨>은 어쩌면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두려움에 관한 우연한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나서는 조지를, 수강생 케니(니콜라스 홀트)가 따라온다. 본인의 두려움 경험을 고백적으로 쏟아내는 케니와, 조지의 짧은 리액션으로 이루어진 둘의 대화는, 파란색은 영적인 것을 붉은색은 격정을 상징한다는 색(色)에 관한 대화로 이어진다. <싱글 맨>은 디자이너에서 감독으로 거듭난 톰 포드의 데뷔작이다. 패션이라는 비주얼 세계에서 또 다른 비주얼 세계인 영화 신으로 막 넘어온 그가, 작품의 핵심 장치로 택한 것은 색감이었다. 포드는 색의 대비로 조지가 겪는 감정의 굴곡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색, 간혹 지나칠 만큼 잘 정돈된 구도, 그리고 영상 안과 밖으로 넘나드는 음악의 활용.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느냐, 오히려 영화를 패션 화보에 머물게 하느냐에 대해서는 평이 갈렸지만. 전화로 짐의 부고를 듣고 조지가 실의하는 장면만 고려하더라도, <싱글 맨>이 콜린 퍼스의 최고의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 중 하나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퍼스는 <싱글 맨>으로 제63회 영국 아카데미, 제6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등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암모나이트

감독 프란시스 리 │ 출연 케이트 윈슬렛, 시얼샤 로넌, 피오나 쇼우, 젬마 존스 │ 2020 │ 118분

19세기 영국 지질학계는 남자의 세상이다. 학계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석 수집가이자 고생물학자인 메리(케이트 윈슬렛)는 연구의 주무대인 런던과 떨어져 교외의 바닷가에 지내며 연로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간다. 화석을 줍고 다듬어 파는 것 말고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끼니를 챙기는 것 정도다. 단조롭기 그지없는 그의 삶에는 고독이 서려 있다. 어느 날 런던에서 상류층 부부가 메리를 찾아온다. 남편 로더릭(제임스 맥아들)은 아내 샬롯(시얼샤 로넌)이 건강을 찾길 바라며 그를 메리의 집에 떠맡기고 떠난다.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메리만의 방식이었을까. 누구에게도 살갑지 않기로 작정하기라도 한 듯한 그의 태도와, 샬롯의 정서적 유약함이 두 사람 사이의 냉랭한 공기를 쉽게 지우지는 못했지만. 새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샬롯이 피운 작은 소란들은 온정이 필요한 둘의 속내를 드러나게 했고, 이내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화석을 중심으로 두 여인이 마음을 나누는 <암모나이트>(2020)는, 프란시스 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다. 목장에서 특별한 시간을 함께한 두 남자의 이야기, <신의 나라>(2017)로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한 리는 3년 만에 내놓은 영화에서 그의 영역을 넓혀갔다. 공개 전 영화는 레즈비언, 시대극, 외딴 바닷가, 산책 친구 등의 소재를 공유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비교되기도 했는데. <암모나이트>는 감정의 격발에(만) 무게를 싣기로 한 작품 같다. 그 뒤에 남겨진 서사의 틈은 케이트 윈슬렛, 시얼샤 로넌 두 배우의 얼굴이 메웠다.


파 프롬 헤븐

감독 토드 헤인즈 │ 출연 줄리안 무어, 데니스 퀘이드, 데니스 헤이스버트, 패트리시아 클락슨 │ 2002 │ 108분

1950년대. 성공한 기업인 남편을 둔 케이시(줄리안 무어)는 코네티컷의 백인 마을에 사는 중산층 주부다. 지역 주간지에서도 모범적인 주부인 그의 인터뷰가 실어 간다. 야근이 잦아진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트)가 걱정된 케이시는, 헌신적인 아내에 기대되는 역할에 부응해 저녁을 챙겨 프랭크의 사무실을 방문하고. 남편이 다른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케이시는 남편의 ‘질환’을 치료하고 가정을 되찾으려 병원 상담을 권한다. 프랭크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노력하지만 의지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한편 케이시는 그대로 답답한 마음을 흑인인 정원사 레이몬드(데니스 헤이스버트)에게 털어놓게 되고 그와 가까워지지만. 흑인인권운동이 일기도 전인 이 시대에는, 백인과 흑인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온 동네의 가십 거리가 될 뿐이다.

토드 헤인즈는, <캐롤>(2015)을 만들기 13년 전부터 소수자와 세상의 관계에 주목해왔다. ‘씨네21’ 이다혜 기자의 말을 빌려보자면, <파 프롬 헤븐>(2002)의 “여자는 착한 가정주부고, 남편은 본인의 의지로 어쩔 수 없는 동성애자이고, 여자의 애인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흑인이다.” 이 구도에서는 관객이 극 중에 개입해서 분노의 감정을 터뜨려야 할 대상이 없다는 거다. 감독은 제도 아래 힘을 잃은 세 사람의 관계성과 성 역할, 성적 지향, 인종 차별 이슈를 엮어냈다. 영화는 마을을 아름답게 뒤덮은 붉은 단풍이 이들의 본성은 안아주지 않았음을 쓸쓸하게 말한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