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저렇게 등이 꼿꼿할까. 사진을 보고 느낀 첫인상은 그런 거였다. 올해 한국 나이로 구십이 된 그 남자는 하늘색 재킷과 아이보리색 바지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는 집 앞을 여유 있게 산책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날이었음에도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이유로 재판에 불출석한 그의 등은, 그 어떤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듯 꼿꼿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헌정을 파괴하고도 여전히 수치를 모르는 꼿꼿한 등의 소유자의 이름은 전두환. 12·12 군사 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5월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 뒤 대통령이 되었으며, 반대자들을 탄압하고 ‘녹화사업’으로 수많은 청춘들의 정신을 파괴하고도 여전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이 뻔뻔한 자는, 자신의 사진을 찍은 <한국일보> 기자에게 오히려 “당신 누구요!”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사람이라면 그 등, 그 어깨, 움츠러들 법도 한데.
전두환이 연희동 자택 앞을 여유롭게 거니는 사진을 보고 분노했던 날, 나는 2016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스페셜> ‘빨간 선생님’편을 떠올렸다. 극의 주인공인 김태남(이동휘)은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얄팍한 수학교사다. 여학생들 귀밑머리가 3cm를 넘기는지 재가면서 바리깡을 들이대고, 찔러주는 촌지는 마다하지 않고 품으로 챙기는 뻔한 사람. 학교의 실권자이자 폭군인 교감(조영진)의 비위나 맞춰주며 앞잡이 노릇에 여념이 없고, ‘빨갱이’ 아버지를 둔 학생 순덕(정소민)에게 모진 소리나 툭툭 뱉어대는 이 한심한 사내의 인생은, 우연히 접한 ‘빨간 책’ 한 권 때문에 극적으로 바뀐다. 헌책방에서 발견한 <장군부인의 위험한 사랑>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든 태남은, 그 책이 다루는 금기의 사랑에 놀라고 압도적인 필력에 매료된다. 부하 장교가 상관인 장군의 부인과 사랑을 나누다니! 이토록 야한데 이렇게 짜릿한 이야기가 있다니! 그런데 <장군 부인의 위험한 사랑>은 하필 가장 결정적인 대목에서 ‘다음에 계속’ 이란 말만 남겨놓고 끝이 난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태남은 다 읽은 책을 아무 곳에나 버린다.
태남이 버린 책을 무심코 주워든 건, 하필이면 순덕이었다. ‘하필이면’이라는 표현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태남과 마찬가지로 1권의 압도적인 내용에 매료된 순덕은, 친구들과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간절히 2권을 찾다가 실패하고는 방향을 전환한다. 없으면 까짓거 내가 쓰지. ‘젊은 장교와 장군부인이 멍청하고 사악한 장군을 속여가며 몰래몰래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의 2부를, 하필이면 장군 출신의 독재자가 철권통치를 하던 시절에, 하필이면 사상범의 딸인 순덕이, 하필이면 그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타자기로 집필한 것이다. 그리고 순덕이 집필한 2권은 학생 독자들 사이에서 1권의 인기를 능가하는 사랑을 받는다. 1권이 제공하는 금기를 건드리는 짜릿함과 성애의 뜨거움을 넘어, 두 젊은 남녀가 남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레 함께 춤을 추고 웃고 떠들며 몰래몰래 진실한 사랑을 키워간다는 내용으로 한껏 보강된 2권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2권에 매료된 건 학생들만이 아니어서, 우연히 순덕이 쓴 2권을 발견한 태남 또한 정신없이 그 자리에서 2권을 독파해낸다. 2권을 쓴 게 순덕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태남은 이를 문제 삼는 대신 오히려 순덕에게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살라는 덕담으로 은근히 집필을 응원한다. 지독한 속물이자 학생들을 윽박지르는 폭압적인 관리자로만 살아왔던 태남에게도, 몰래몰래 지키고 응원하고 싶은 제자가 생기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금서’가 생긴 것이다. 세상과 사랑에 눈을 뜬 태남은, ‘국가원수를 조롱한 이적 서적’을 쓴 학생이 누군지 색출해 내라는 상부의 지시로부터 순덕을 지켜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민주화에도 학생 인권에도 아무 관심 없이 살아가던 속물 선생은, ‘빨간 책’을 쓴 학생 하나를 지켜내며 그렇게 진정한 선생으로 거듭난다.
작품의 중반부, 순덕과 그의 친구들은 엉성하게 가제본한 2권을 숨길 장소로 ‘대통령 액자’ 뒤를 선택한다. 엄혹한 시기, 감히 누가 ‘각하’의 사진을 함부로 교실에서 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도 의심하거나 흔들지 못할 권위로 가득한 전두환 대통령 사진 액자 뒤에, 순덕은 그 권위를 정면으로 비웃고 조롱하는 ‘이적 서적’을 숨기고는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근엄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독재자의 사진은 그렇게 타자기 하나만을 무기 삼은 여고생 무리에 의해 한껏 조롱당한다. 그리고, 법의 심판을 피해 연희동 자택 앞을 거닐던 전두환의 꼿꼿한 등 또한 그럴 것이다. 역사는 그를 죄를 지어 놓고도 그 값을 치르는 게 두려워 “내 전 재산은 29만 원”이라는 졸렬한 거짓말을 일삼고, 법원에 출석하라는 재판부의 명령을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고는 골목이나 산책하는, 최소한의 수치심도 모르는 존재로 기억할 것이다.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광주지방법원 대신 서울 연희동 골목에 서 있던 그의 사진이 그 사실을 증명할 것이고, 펜과 타자기와 컴퓨터와 키보드를 지닌 수많은 순덕이들이 그 이야기를 기록해서 전달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버전의 ‘빨간 책’인 셈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