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백신 접종이 늘어남에 따라 그간 경색돼있던 국가 간의 여행 금지 조치가 조금은 풀릴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EU)에서 본격적인 백신여권을 7월 1일 자로 도입해 그간 가장 타격을 입었던 여행업계는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인도발 델파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되며 방역에 구멍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이미 진행 중인 유로2020에서 원정응원을 떠났던 스코틀랜드 관광객 1200명이 집단 감염됐고, 이달 말부터 열릴 도쿄 올림픽에 파견된 우간다와 세르비아 선수단에서도 감염자가 발생했단 소식도 전해졌다. 국내 역시 1차 접종자수가 인구의 30%를 넘으며 거리두기를 낮추려다 원어민 강사발 확산을 필두로 확진자가 6개월 만에 천 명을 돌파하며 다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인 더 하이츠>

<루카>

이런 이유로 휴가철을 앞두고 있지만, 백신여권 도입에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해외로의 휴가는 언감생심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달려줄, 아름다운 풍광과 이국적인 거리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 숨 쉬는 지역색을 잘 담아낸, 현재 개봉 중인 영화 두 편을 골라봤다. 라틴 이민자들이 미국 워싱턴 하이츠에서 꿈과 희망을 품으며 스펙터클한 활력을 전달하는 존 추 감독의 <인 더 하이츠>와 1950∼60년대의 북서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우정과 공존을 배워가는 성장담인 엔리코 카사로사 감독의 <루카>가 그들이다. 이 두 편의 영화들은 화려한 볼거리와 가슴을 울리는 음악으로 중무장을 한 채 신나는 여행을 꿈꾸는 관객들의 욕구를 대신 충족시켜주고, 탁월하게 위로해 줄 것이다.


천재의 놀라운 데뷔작, 라틴 힙합 뮤지컬 <인 더 하이츠>

린 마누엘 미란다

푸에토리코 핏줄을 지닌 재주꾼 린 마누엘 미란다가 대학 2학년 때 초안을 쓴 <인 더 하이츠>는 그야말로 돌풍 같은 데뷔작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뮤지컬과 다양한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프리스타일 랩과 힙합, R&B, 살사, 맘보, 레게 등이 결합된 중남미계 이민자 버전의 <렌트> 같은 작품을 선보였고, 초연을 본 토마스 케일의 제안으로 더 발전시켜 오프브로드웨이를 거쳐 2008년 브로드웨이에 도전하게 된다. 린 마누엘 미란다가 직접 주인공 중 하나인 우스나비를 연기해 작곡과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인정받으며 토니상에 13개 부분에 지명되는 기염을 토한다. 작품상과 음악상, 편곡상, 안무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며 신상 핫 뮤지컬이 된 <인 더 하이츠>는 미국과 필리핀, 파나마, 영국, 일본, 호주, 캐나다, 한국 등 전 세계를 돌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왼쪾부터) 존 추 감독, 린 마누엘 미란다

이 초특급 아이템을 할리우드에서 순순히 놓칠 리가 만무했으니, 유니버셜에서 춤이라면 도가 튼 인무가 출신의 연출자 케니 오르테가를 섭외해 2008년 곧바로 영화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샤키라나 제니퍼 로페즈 같은 특급 라틴계 슈퍼스타를 섭외하지 못하며 지지부진하다 결국 영화화는 취소되고, 아이템은 (하필!) 와인스타인 컴퍼니로 넘어가게 된다. 그 이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 2016년 미투 선언으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할리우드에서 퇴출되며 <인 더 하이츠>도 좌초될 뻔하지만, 다행히도 이때 잭팟을 터트린 린 마누엘 미란다의 새 뮤지컬 <해밀턴>의 대성공으로 다시 탄력 받으며 <스텝 업> 시리즈로 댄스 영화에 불을 지피고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으로 이민자 계층에 대한 시선을 상업적으로 잘 풀어낸 존 추가 메가폰을 잡아 워너의 야심찬 뮤지컬로 공개됐다.


작열하는 뉴욕 무더위 속 신나는 노래와 화려한 군무

<인 더 하이츠>

<인 더 하이츠>

2시간 반에 이르는 뮤지컬 <인 더 하이츠>의 모든 부분을 영화화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니나의 엄마는 빠지고, 가사들이 수정됐으며, 2막의 몇몇 곡들('선라이즈'(Sunrise)나 '헌드레즈 오브 스토리즈'(Hundreds of Stories), '이너프'(Enough), '에브리싱 아이 노'(Everything I know) 등)이 삭제돼 영화에 맞춰 곡 등장 순서도 조금 바뀌었다. 그럼에도 이민자들의 꿈과 희망, 열정, 긍정적인 삶에 대한 태도를 담아내려는 뮤지컬의 주제만큼은 충실하게 이식됐다. 미란다와 함께 원작의 프리스타일 랩을 만들고 편곡했던 빌 셔먼과 탁월한 오케스트레이터이자 마누엘의 여러 뮤지컬에서 힘을 보태는 파트너 알렉스 라카모어도 그대로 참여해 원작의 색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 실제 뉴욕 워싱턴 하이츠를 로케한 풍광과 칼 같은 대규모 군무, 역동적인 카메라워크가 라틴 에너지를 품은 노래들과 결합해 절로 어깨춤을 추게 만든다.

<인 더 하이츠>

원작 투어에서 이미 우스나비와 그 사촌 소니 역을 소화한 경험이 있는 안소니 라모스를 비롯해, 멕시코에서 노래와 연기를 전공한 멜리사 베레사의 상큼함과 낭만적이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사로잡는 코리 호킨스, 가수 출신의 레슬리 그레이스가 소화해낸 주연 4인방의 열연은 오리지널 캐스팅 못지않게 인상적이다. 여기에 뮤지컬과 같은 아부엘라 클라우디아역으로 극중 가장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올가 메레디즈의 내공과 브로드웨이에서 잔뼈 굵은 데프니 루빈 베가나 원작자 린 마누엘 미란다 등이 뒷받침해주는 노련한 솜씨들은 짜릿한 전율을 안긴다. 아울러 뮤지컬의 작은 앙상블은 대자본의 영화 예산과 만나 새로운 편곡을 통해 화려하고 파워풀해졌다. 엔드 크레딧에 흐르는 '홈 올 썸머'(Home All Summer)는 영화판을 위해 미란다가 새로 작곡한 곡으로, 내심 오스카 주제가상을 정조준한다. (그는 오스카만 받으면 17번째 EGOT 달성자가 된다!)


엔니오 모리꼬네에게 음악을 맡기려 했던 <루카>

<루카>

픽사에서 오랜 기간 스토리 아티스트로 일한 엔리코 카사로사의 장편 데뷔작 <루카>는 자신의 고향과 어린 시절 친구와의 우정을 담은 반자전적인 작품이다. 2011년 <라 루나>로 오스카 단편 애니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그는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치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등 이탈리아 고전들과 <스탠 바이 미>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성장담, 아드만 스튜디오의 모험담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지브리에서 영향받은 감성으로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완성했다. 새로운 세상에 가서 적응하려고 애를 쓴다는 점에선 <마녀 배달부 키키>가, 이탈리아 제노바 부근을 배경으로(인간들이 사는 마을 이름을 보라!) 인간 속에 뛰어든 괴물의 이야기에 ‘탈 것(비행기 대신 베스파)’이 주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단 점에선 <붉은 돼지>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코로나19로 인해 <소울>에 이어 두 번째로 북미에서 극장 개봉을 못 한 작품이 되었지만, 픽사 특유의 완성도와 감성만큼은 호평받았다.

<루카>

애초에 카사로사가 내심 음악으로 염두했던 건 영화음악의 대가 엔리오 모리꼬네였다. 하지만 의사를 타진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엔니오 모리꼬네가 작업했다면 생전의 <페이네 사랑의 세계여행>(Il Giro Del Mondo Degli Innamorati Di Peynet)에서 들려줬던 사랑스럽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나왔을 법한데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 그 자리를 메꾼 건 독특하게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가 아닌 벤 제틀린이나 캐리 후쿠나가 등과 같은 미국의 인디 영화에서 활약하던 댄 로머였다. 카사로사가 그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비스트>와 <웬디>에서 로머의 스코어를 감명 깊게 들었다며 일반적인 장르와는 조금 다른, 독립적인 요소를 기대했다고 밝혔다. 로머는 그런 감독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한편, 적극적으로 위대한 이탈리아 마에스트로들의 색채를 쫓아간다.


이태리 고전 영화음악에 빗진 스코어와 추억을 자극하는 삽입곡

<루카>

그런 점에서 <루카> 음악에서 니노 로타나 니콜라 피오바니, 루이스 바칼로프 등의 선율이 언뜻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카사로사는 로머가 이탈리아 스타일을 흉내 내기보단 자연스럽게 만든 그의 스타일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는 느낌이길 바랐다. 결국 로머는 적절한 절충안을 찾아 <루카>만의 장소와 시대를 암시하는 소리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약간의 아코디언과 만돌린, 어쿠스틱 기타에 피치카토로 악센트를 더하는 스트링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 이탈리아 스타일에 접근해간다. 루카와 알베르토, 줄리아에게 각각 그리움과 경이로움, 모험과 활력 그리고 지역적인 특색과 소박한 가정적인 풍취를 상징하는 테마를 부여했다면, 베이스 클라리넷과 튜바로 뒤뚱거리는 소리로 부모의 우려와 걱정, 간섭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총 82명의 관현악단은 코로나 방역지침에 따라 따로 녹음해 최종적으로 믹싱했으며, 평균적인 할리우드 상업영화 스코어보단 의도적으로 작은 앙상블의 느낌이 나게 조율했다.

(왼쪽부터) 지아니 모란디, 에도아르도 베나토, 리타 파보네

프랑스를 무대로 한 <라따뚜이>나 멕시코 배경의 <코코>에서 삽입곡 대신 오리지널 곡으로 승부했던 것과 달리, 이번 <루카>에서는 카사로사에 의해 선곡된 노래들이 이탈리아 시골 정서와 배경을 담아내고, 추억의 세계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감독이 어린 시절이었던 80년대보다 더 과거인 5∼60년대 칸초네들을 택했던 건, 보다 작고 조용했던 시절을 회고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베스파가 있고, 바다 괴물을 발견할 요소가 큰 스킨 스쿠버도 활발하지 않은 시절이란 판단에서였다. <기생충>에서 삽입된 곡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이태리의 나훈아’ 지아니 모란디를 비롯해, ‘이태리의 이미자’격인 미나와 이탈리아 최고 락커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에도아르도 베나토, 배우이자 칸초네의 아이돌 리타 파보네, 4인조 재즈그룹 콰르테토 체트라까지 명랑 쾌활하고 매력적인 곡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와 추억을 자극한다.


적재적소에 활력 넘치는 칸초네

<루카>

오프닝을 여는 '운 바치오 어 메자노떼'(Un Bacio a Mezzanotte)는 40년대 중반의 재즈 사운드로 관객들로 하여금 추억의 저편으로 밀어 넣는데 좋은 출발점이 되고, 육지에 올라 루카가 처음 베스파를 보며 느낀 충격을 위해 마리아 칼라스의 아름다운 아리아 '우 미오 바비노 카로'(O mio Babbino Caro)가 황홀하게 흘러나온다. 손수 만든 스쿠터를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갈 때 깔리는 '일 가또 이 라 볼페'(Il Gatto e la Volpe)는 같이 곤경에 가까운 모험에 빠지길 권유하는 악동스런 장난이 묻어난다. 어리숙한 빌런 에콜을 소개할 땐 '안다보 어 첸또 알로라'(Andavo a cento All'ora)가, 주인공들을 구해주는 줄리아의 캐릭터를 단번에 드러낼 땐 자전거 라디오에서 '틴타렐라 디 루나'(Tintarella di luna)가 흘러나온다. 고물 베스파에 첫눈에 반할 땐 과장된 '파티 만다래델라 맘마 어 페렌데레 라테 '(Fatti mandare dalla mamma a prendere il latte)가, 포르토로소컵 훈련 몽타주에선 스파게티를 예찬하는 '비바 라 파파 콜 포모도로'(Viva la pappa col pomodoro)가 절묘하게 배치돼 웃음을 자아낸다.

<루카>

대망의 엔딩 크레딧을 장식하는 노래는 '치타 부오타'(Citta vuota)인데, 진 맥다니엘스의 '잇츠 어 론리 타운(론리 위드아웃 유)'(It's a Lonely Town (Lonely Without You))를 이탈리아에서 번안한 곡이다. 카사로사는 주제적인 연관성을 위해 우정에 대한 노래로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스크리닝을 진행하며 루카가 떠나고 난 뒤 조금은 우울하면서도 달콤한 감정이 엔딩의 느낌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해 처음 골랐던 이 곡을 그대로 후일담을 전하는 엔드 크레딧 영상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루카>가 공개되고 난 뒤 카사로사는 따로 사는 줄리아의 부모들을 루카와 줄리아가 <페어런트 트랩>처럼 다시 합치게 만드는 속편을 만들면 어떨까에 흥미를 보였다는 점에서, 또 심해에 사는 외로이 홀로 사는 삼촌 ‘우고’에 대한 스핀오프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스탭진들의 농담에서 어찌 보면 미래(?)를 예견하는 엔딩송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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