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울적한 요즘, 날씨마저 사람들 속도 모르고 점점 무더워지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수인 지금은 예전처럼 더위를 날릴 휴가 또한 쉽지 않다. 이럴 땐 더위와 휴식을 모두 잡을 수 있게 습하고 뜨거운 영화를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즐기는 게 안전하게 여가를 보내는 제1의 방법. 한국 영화 중 습한 열대 지방의 풍경을 담은 ‘이열치열’(以熱治熱)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습도 하, 열기 중

때는 1930년대, 무뢰배들과 독립군, 현상금 사냥꾼들이 혼재한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된 만주. 한 장의 보물지도를 두고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창이파의 두목 박창이(이병헌), 혈혈단신 범죄자 윤태구(송강호)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만주 배경 영화니까 중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전반적으로 무더위 느낌보다는 건조해서 어딘가 텁텁한 공기의 분위기가 강하다. 한때 유행했지만 지금은 명맥이 끊긴 ‘만주 웨스턴’ 최후의 작품. 영화를 보면 시원한 탄산음료 한 잔이 당길 것이다.

알포인트

습도 중, 열기 중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 로미오 포인트에서 구조요청 무전이 들어온다. 최태인 중위(감우성)가 지휘관인 두더지 셋 부대가 수색에 나선다. 한국 호러 영화의 수작으로 뽑히는 <알포인트>는 영화 대부분을 캄보디아 현지 로케이션에서 촬영했다. 그래서 열대 지방 특유의 습도가 스크린에 둥둥 떠다닐 정도. 공포 영화인데다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밀림이 아닌 폐건물 내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의외로 더운 감각은 적은데, 그래도 병사들이 헬멧을 벗어 땀에 젖는 머리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부채질을 하고 싶어진다. 최근엔 이 <알포인트> 촬영장 근황이 전해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폐건물이었던 곳에 호텔이 들어섰기 때문.

도둑들

습도 상, 열기 중

전설적인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치기 위해 한국, 중국 도둑 10명이 홍콩에 모인다. 이들은 태양의 눈물을 훔친다는 공동 목표 아래 각자의 계획을 진행한다. 한국과 홍콩,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는 전개라서 알기 어렵지만 확실히 마카오와 홍콩 로케이션 촬영장면들은 형언할 수 없는 진득한 끈적함이 흐른다. 습도가 높은 홍콩에서 촬영하면서 “모든 배우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는 김수현의 말대로 그 꿉꿉한 공기가 인물들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채운다. 보석을 훔치는 순간까지의 고조되는 긴장감을 한층 더 부각시켜주는 날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스터

습도 상, 열기 상

스스로 말하기는 ‘네트워크’지만 사실상 다단계 사기를 자행 중인 진 회장(이병헌)을 잡기 위해 지능범죄수사팀장 김재명(강동원)은 진 회장의 최측근이자 핵심 인력 박장군(김우빈)을 회유한다. 영화 중후반, 필리핀으로 도망친 진회장을 잡기 위한 여러 세력 간의 충돌이 그려진다. 실제로 필리핀에서 촬영한 영화라서 배우들 또한 땀에 절었던 것 같다. 강동원의 촉촉한 머리만 봐도 추격전의 긴박함이 물씬 느껴진다. 전반부 한국 배경과 대비돼 필리핀의 열기가 한층 더 부각된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습도 최상, 열기 최상

인남(황정민)은 마지막 청부살인을 끝내고 은퇴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하필 그가 죽인 타깃이 야쿠자 레이(이정재)의 형이었던 것. 레이는 어떻게든 인남을 죽이기 위해 쫓고, 인남은 전 연인의 딸 유민(박소이)과 함께 도망쳐야 한다. 태국에서 촬영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주인공의 육탄전처럼 뜨거운 공기가 영화 내내 흐른다. 뜨거운 뙤약볕에 인남의 눈빛이 번뜩일 때, 한바탕 싸움을 끝낸 레이가 잔뜩 쌓인 얼음으로 얼굴을 닦아낼 때, 홍원찬 감독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왜 해외 로케이션 촬영으로 그려냈는지 명백해진다. 촬영 당시 태국은 34도였다는데, 그것도 겨울이어서 낮은 편이었다고. 배우들 얼굴에 흐르는 땀과 실제 태국의 공간에서 풍기는 습한 열기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과격한 액션들을 빛나게 만들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