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동안, 그 뒤에서 진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고는 미소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겪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 일화들이 있다. 내겐 예전에 코미디언 김제동이 <토크콘서트>에서 들려주었던 말이 그렇다. 어린 김제동이 살던 집 앞으로 도로가 나던 때, 마을 어른들은 김제동이 살던 집 토지 수용을 엉망으로 했다고 한다. 도로를 내려면 집을 허물어야 하는데, 집 전체에 걸쳐서 도로가 나는 건 또 아니어서 토지 수용이 다 되는 건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일이 그 모양이 된 건 김제동의 집에 ‘어른 남성’이 없어서였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김제동의 위로는 줄줄이 누나들이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나이 먹고 학력이 높지 않은 과부인 김제동 어머니의 말을 좀처럼 들어주지 않고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로 묵살했다. “우리 집도 제대로 보상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헛기침도 좀 할 ‘어른 남성’이 없었던 탓에, 마을 어른들은 그 집 보상 문제는 대충 하고는 상황을 접었다고 한다.

기억에 유독 오래 남았던 이야기는 이다음에 딸려온다. 도로 수용으로 집을 잃게 된 당사자인 김제동이 집을 허무는 철거반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이야기. “어차피 집 허무는 건 안 바뀌는데, 그럴 거라면 돈이라도 좀 벌자 싶었다”는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며, 김제동은 멋쩍게 웃었다. 여전히 수용은 안 됐지만 큰 도로 바로 옆이라 뭘 지을 수도 없는 손바닥만한 땅이 아직도 자기 가족 소유로 남아있다는 김제동은 “누가 물어보면 ‘촌에 땅 좀 있다’고 답한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가 유독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자기 이야기를 담백하게 이야기하는 김제동의 재주가 뛰어난 탓도 있을 것이고, ‘어른 남성’이 아니면 의견을 멋대로 묵살하곤 했던 과거 남자들에 대한 환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자기 자신도 집을 잃게 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집을 허무는 철거반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아이러니만큼 강렬하진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철거반 청년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늘 접했던 인상이라고 해봐야 목에 명찰을 두르고는 재개발 구역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분위기를 조성하는 모습, 거주자가 퇴거한 빈집 벽면에 빨간색 스프레이로 ‘철거’라고 크게 적어 넣는 모습, 누군가 생존권 보장 투쟁이라도 하면 험악한 분위기를 만드는 모습 정도가 전부였던 탓에, 그들 또한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까지는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새삼스레 김제동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건 MBC 드라마 <미치지 않고서야> 때문이다. 극의 주인공인 한명전자 인사팀 당자영 팀장(문소리)은, 매각을 앞둔 창인사업부의 정규직 고용 규모를 절반으로 감축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가상의 도시인 경남 창인시로 내려온다. 회사가 팔린다는 소문이 나면 핵심 인력들이 다른 회사로 유출될 수 있으니 이 모든 일은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회사 사정을 설명하지 않으면서 정규직의 절반을 해고하거나 계약직으로 전환하려고 하니 그럴 만한 명분이 없다.

직원들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미 다른 사업부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수많은 직원들의 희망퇴직을 유도한 것으로 소문 난 ‘칼잡이’ 당자영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며 동료 사우들을 쳐내는 자리, 어떻게든 회사의 지출을 줄이고 직원들에게 돌아갈 보상을 줄이는 방법을 고안해야 하는 회사의 앞잡이. 대기업 인사팀이라는 게 다 그렇지만, 당자영이라고 갑의 위치에 있는 건 아니다. 안 그래도 남초 직장이고 간부급으로 올라가면 여자가 씨가 마른 가전 기업에서 여자로 살아남기 위해 당자영은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이다.

벌써 이혼한 지 제법 되었는데도 회사 중역들은 자신을 전남편 한세권(이상엽) 개발1팀 팀장과 묶어서 “부부가 참 보기 좋다” 운운하며 ‘누군가의 아내’로 평가하고, 평직원들도 이혼한 부부가 같은 직장에 있는 걸 이상하게 보며 수군거린다. 일이 아니라 사생활로 평가되고 말이 도는 환경에서, 당자영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 단계만 넘으면 유리천장 뚫고 본사 간부가 될 수 있으니까, 매달 200만 원 넘게 입원비와 간병비가 들어가는 아버지 뒷바라지도 혼자 힘으로 해내야 하니까. 그런 자영의 절박함을, 회사는 기꺼이 이용한다. 잘 정리하고 본사 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일 잘 해내라고. 결국 회사에서 살아남는 게 절박한 노동자들을 시켜서, 사정이 비슷한 다른 노동자들을 잘라내게 시키는 것이다. 마치, 철거반원들 스스로도 당장의 생계가 급한 사회적 약자인 것처럼.

우리는 살면서 자주 서로를 미워한다. 일자리를 구하는 주니어가 지금 일자리를 지닌 시니어를 미워하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비정규직과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파이가 돌아가는 게 맞다고 말하는 정규직이 서로 적대하고, 군필자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증오하고….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동안, 그 뒤에서 진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고는 미소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겐 쉽고 빠른 적대의 대상을 찾는 일보다, 그 적대의 구도 너머에서 진짜 웃고 있을 대상을 찾는 신중함이 더 급한 게 아닐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