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작이 고작 9편인데 팬들은 은퇴할까봐 전전긍긍인 감독이 한 명 있다.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 타란티노는 데뷔 초부터 “나는 10편만 연출하고 은퇴할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밝혔으니, 아홉 번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이후 그의 은퇴가 눈앞에 다가왔던 것. 팬들의 성화에도 타란티노는 최근 마지막 연출작을 언급하며 (감독으로선) 은퇴할 것임을 암시했다. 1992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전무후무한 영화계 아이콘으로 등극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마지막 은퇴작을 만들기 전, 9편의 영화를 다시 정리해본다.


1. ​저수지의 개들

1992년

​타란티노의 데뷔작은 그 유명한 <저수지의 개들>. 비디오 가게 아르바이트하면서 수많은 영화를 섭렵한 그가 선택한 소재는 홍콩 누아르 <용호풍운>이었다. 한 범죄 조직이 잠입 경찰이 있단 사실이 밝혀지면서 와해되는 스토리를 그리는데, 초기작임에도 타란티노 영화의 특징들이 가장 도드라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가장 큰 특징은 범죄 영화이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전혀 삽입하지 않고 범죄 전후를 그려 인물 간의 갈등을 집중적으로 그렸다는 것. 또한 경찰이 잠입했다는 내용을 서두에 두지 않고 영화 중간에 플래시백으로 밝혀 비선형적 구조를 취했다.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대사로 꽉 채운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 오프닝도 유명한 장면.


2. 펄프픽션

1994년

타란티노가 전 세계 영화광들의 지지를 받기 시작한 건 두 번째 영화 <펄프 픽션>부터였다. <펄프 픽션>은 1994년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싸구려 소설이란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듯 <펄프 픽션>은 미국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여러 사건들을 그린다. 각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타란티노 특유의 재치 있는 대사들로 블랙코미디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이야기를 시간 순서가 아닌 인물 순서로 전개하는 <펄프 픽션>의 구조가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화적 결정체로 해석됐다는 비평이 많다. 줄스(사무엘 L. 잭슨)의 독백과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미아(우마 서먼)의 춤 장면은 영화를 좋아한다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접했을 명장면이다.


​3. 재키 브라운​

1997년

<펄프 픽션>으로 기대가 높아진 직후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는 <재키 브라운>이란 작품이었다.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 <럼 펀치>를 영화로 옮긴 이 작품은 무기상 오델 로비의 자금 수송을 하던 스튜어디스 재키 브라운(팜 그리어)이 연방 경찰에 구속돼 ‘협상’을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타란티노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인 영화로 뽑히는데 타란티노의 전매특허 유혈 낭자 액션도 없고, 이야기의 전개 또한 선형적이고 느긋하기 때문. 대화 장면이 많은 반면 장면의 긴장감 밀도도 다소 낮은 편이다. 그러나 명배우라는 칭호와는 거리가 멀었던 1970년대 B급 영화 배우 팜 그리어를 통해 여성 주인공의 서사를 전면으로 내세워 지금까지도 컬트적인 팬이 있는 작품이다. 흑인들이 주역인 하위 장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을 원형으로 삼은 만큼 당시 흑인 음악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영화의 풍미를 더한다(<재키 브라운>의 음악에 대해 궁금하다면 아래 삽입된 글을 참조하길 바란다). 또 사무엘 L. 잭슨이 F-워드(f**k)를 가장 많이 한 영화로도 유명하다.


4. <킬 빌> 2부작

2003~2004년

어떻게 보면 타란티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긴 영화 <킬 빌>. 1부는 1시간 51분, 2부는 2시간 17분으로 총 4시간이 넘는다. 단순히 긴 것 외에 눈에 띄는 점은 1부와 2부의 특징이 확연히 다르다는 데 있다. 1부는 액션 활극에, 2부는 진득한 서부극에 가깝다.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우마 서먼의 이미지로 유명하다. 결혼식을 올리던 중 두목 빌(데이빗 캐러딘)과 동료들에게 살해당할 뻔한 살인청부업자 브라이드(우마 서먼)가 복수에 나선다는 스토리다. 1부는 대규모 액션 장면이 유혈 낭자여서 흑백 처리로 개봉하기도 했다. 치바 신이치와 데이빗 캐런딘, 액션이 벌어지는 동양풍 술집, <애꾸라 불린 여자>의 캐릭터를 따온 엘 드라이버 등 영화 곳곳에서 1980년대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사의 작품을 비롯해 고전 영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자타 공인 영화광 타란티노다운 부분.


5. 데스 프루프(그라인드 하우스)

2007년

<킬 빌>로 고전영화의 분위기를 가져왔다면, 다음 작품 <데스 프루프>는 현대 영화에 고전 영화의 질감을 덧입혔다. <데쓰 프루프>는 스턴트용 차량을 이용해 여성을 살해하고 다니는 마이크(커트 러셀)와 그를 만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뉴욕 탈출> 스네이크 플리스킨으로 유명한 B급 영화의 대배우 커트 러셀을 캐스팅해 고전 영화에 애정을 표했다. 사실 이 <데스 프루프>가 수록된 <그라인드 하우스>부터가 과거 싸구려 상업영화를 동시 상영하던 극장을 의미하는 거니까, 그 당시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을 재현하는 데 충실했다. 타란티노는 마지막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하면서 “다른 감독들의 은퇴작은 언제나 최악이다. 내 최악은 <데스 프루프>여야 한다”며 이 영화를 자신의 최악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6.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년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타란티노 최초의 사극이지만, 허구의 상상을 바탕으로 한 대체 역사물이다. 세계 2차대전의 나치와 나치를 잡는 특수부대 바스터즈의 대립이 주요 스토리. 서로 느슨하게 연결한 5개의 챕터는 <펄프 픽션>을 떠올리지만, <바스터즈>는 적어도 시간순으로 진행한다. 과거가 배경이기에 그의 전작들과 꽤 다를 것 같지만, 반대로 대사만으로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타란티노의 각본과 연출은 이 영화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바스터즈가 나치를 소탕하는 내용이지만, 영화 전반에 악역 한스(크리스토프 왈츠) 대령의 존재감이 어마 무시해 사실상 악역이 주인공인 독특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한스는 타란티노 스스로도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이며, 한스를 연기한 크리스토프 왈츠는 이 영화 한 편으로 세계적인 배우로 도약했다. 많은 영화 팬들이 타란티노의 업적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의 배우 크리스토프 왈츠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이라고 말할 정도.


7.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년

다른 영화의 영향은 받아도, 늘 오리지널 스토리를 쓰던 타란티노가 처음으로 리메이크로 선택한 <장고: 분노의 추적자>. 타란티노답게 리메이크 같은 오리지널 영화를 만들었다. 아내를 건드린 상대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을 빼면 주인공의 인종이나 배경 등 모두 원작과는 판이하다. 그러면서도 원작 <장고>를 비롯한 스파게티 웨스턴을 향한 오마주로 장르의 성취를 헌정했다. 돈만 많고 인간성이 없는 농장주 캔디를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흑인이면서 백인 농장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스티븐을 맡은 사뮤엘 L. 잭슨의 변신이 특히 화제였다. 이 영화에서 사용한 주제,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은 타란티노의 차기작으로까지 이어진다.


8. 헤이트풀 8

2015년

가장 다사다난한 과정에서 완성된 영화. <헤이트풀 8>은 원래 크리스토프 왈츠가 출연하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속편으로 기획됐다. 그러나 완성된 각본이 유출돼 전면 재수정에 들어갔고. 당시 타란티노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할 만큼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웨스턴의 형식을 취했지만, 실은 폭설 속에 고립된 (8번째 영화답게) 8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실내극이다. 전작처럼 인종 차별이 스토리에 녹아있으며, 다만 노예 제도 폐지 이후에도 존재하는 심리적인 적대감을 차용했다. 때문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블랙(Black)과 니거(Nigger). 70mm 필름으로 촬영했고, 타란티노는 70mm로 상영하는 로드쇼 버전과 기타 상영관에서 상영할 개봉판을 따로 만들었다. 이후 넷플릭스와 협업해 213분에 달하는 4부작 드라마로 재편했다. 음악 영화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는 이 영화로 생애 첫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9.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년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을 다룬다고 밝혀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거기에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마고 로비 같은 화려한 라인업이 더해져 기대감을 높였다. 완성된 영화는 잔혹한 실제 사건을 반영한 것과 별개로 타란티노 영화 중 가장 얌전한 축에 속했다. 폴란스키가 살인사건은 부수적인 소재일 뿐, 1960년 할리우드의 풍경과 당시 영화인들을 향한 애정을 한껏 담은 헌정에 가깝다. 그래서 해당 시대 문화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호불호가 상당한 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두 배우 모두 연기력을 입증했고 브래드 피트는 그해 남우조연상을 쓸어담듯 가져갔다. 영화는 호평을 받았지만, 타란티노 본인에겐 이 영화가 실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극 중 이소룡을 지나치게 오만한 성격으로 묘사했기 때문. 이소룡 가족들의 반발에도 타란티노는 여전히 자신의 시선이 맞다고 발언하면서 이소룡을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 상당한 실망을 안겨줬다.


+ 마지막 작품은 과연…?

최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소설판을 출간한 타란티노는 여러 매체에서 마지막 은퇴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밝혔다. 그는 한때 <저수지의 개들> 리메이크도 고려해봤지만, 영화 대신 소설이나 연극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작품은 <킬 빌>의 속편, 즉 <킬 빌 3>. <킬 빌 3>은 그동안 제작 고려 중이란 소식만 여러 번 전했지만 매번 중단됐다. 타란티노는 한 방송에 우마 서먼과 그의 딸 마야 호크를 각각 브라이드와 B.B.로 캐스팅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물론 이조차도 확정된 바는 아니다. 일단 타란티노는 소설이나 연극 등 영화 외 영역에서 작가로 일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며 마지막으로 어떤 영화를 꺼내들지 말을 아끼고 있다. 팬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라면 <킬 빌 3>를 만들어 3부작을 한 편으로 퉁치고 한 편을 더 만드는 것이겠지만. ​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