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가족의 하루
아침에 일어나 사슴 사냥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것 같은 앳된 꼬마 소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서는 잭나이프를 쥔 채로 사람의 폐를 찌르면 숨이 끊어지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따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살풍경이 펼쳐지네요. 지금 원시시대 이야기냐고요? 아닙니다. 영화 <캡틴 판타스틱>의 야생 가족의 하루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가르치는 아빠?
제목과 스틸컷만 보고는 처음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문라이즈 킹덤>처럼 귀여운 분위기의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시작부터 무시무시합니다. 영원한 아라곤, 비고 모텐슨이 연기하는 아빠 '벤'은 6남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숲으로 데려가 자연의 생존 법칙을 가르치면서 삽니다.
아이들은 게임기, 빌보드 차트, 패션 스트리트 따위의 도시의 삶과 단절한 채 자급자족하는 원초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새로 출시된 닌텐도 게임기 따위는 쓸모없는 것에 불과해요. 아이들은 날카로운 잭나이프나 화살촉 따위의 '생존 도구'를 더욱 원합니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서는 사냥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심지어 아이들의 체력과 담력은 거의 운동선수 못지않은 수준입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도시인들과는 아예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히피의 허세인가?
진짜 참교육일까?
이 유별나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한 아빠 벤이 이끄는 '야생 가족' 일상을 보고 있으면 당연하게도 '너무 이상한데 왠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진짜로 필요한 건 수학 공식이나 X-박스 게임기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가 어떤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는지를 알고 올바르게 사고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아이들은 사회주의의 역사나 정부 정책은 잘 알아도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가 뭔지는 모릅니다. 너무 이상하지요? 보통의 아이들과는 완전히 반대의 사고를 하게 됩니다. 이건 모두 아빠 '벤'의 교육 방침 덕분에 생긴 일입니다. 벤은 만화책이 더 잘 어울릴 아이들에게 밤마다 <총, 균, 쇠>나 <우주의 구조>와 같은 책을 읽게 시키고 그 책에 대해서 바로 형제들과 토론을 하게 합니다. 아들 '보'는 아직 대학교 들어갈 나이도 안됐는데 '트로츠키'나 '스탈린', '마오쩌둥' 등이 주장했던 사상 이념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하고 스스로를 '마오이스트'라고 말하기도 해요. 믿기지 않죠.
그런데 과연 이 아빠 벤의 교육은 제대로 된 참교육인 걸까요? 아니면 정식으로 홈스쿨 인가를 받은 것도 아니므로 사실상 법적으로는 아동 학대에 해당하는 걸까요? 아빠 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히피'로서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과연 그가 자식들도 자신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길 바라는 게 옳은 걸까요? 아니면 잘못된 걸까요? 영화는 '교육'이란 게 뭔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어른'이라는 게 뭔지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한계에 부딪치다?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자연 속에서의 삶이 오래될수록 이 아빠가 추구하는 '자연의 삶'은 점점 한계를 드러냅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는 세상과 어우러져 살아야 할 순간이 찾아오죠. 자연스럽게 이성에 눈을 뜨게 되는 아들이 어떻게 평범한 연애를 하며 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고, 문명의 편리에 눈을 뜨게 되는 아이들은 자신이 왜 불편한 자연의 삶을 수용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는 아빠 벤의 교육 방식이 옳고 그른지 이 모든 장면을 어느 한 쪽에 치우쳐 비판하거나 희화화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여줍니다.
이때부터 영화의 전개는 아이들의 자연 속 일상을 보여주던 초반부만큼이나 흥미진진해집니다. 아이들끼리도 서로 생각이 점점 달라지고 아빠 벤 스스로도 자신이 평생 지켜왔던 신념이 흔들리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거든요. 영화는 다시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라고 말이죠.
비고 모텐슨과 아이들
<캡틴 판타스틱>은 영원한 아라곤, 비고 모텐슨의 모습을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영화입니다. 권총이나 칼 등을 잡고 거친 광야를 누비며 다니는 모습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배우로서의 야성적인 모습을 묘한 방식으로 승화시킵니다. 아이들의 멘토로 출연하지만 일반적인 어른과는 다른 모습이니까요. 비고 모텐슨은 실제로도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촬영할 때도 근사한 호텔에서 묵지 않고 영화 속 자연 현장에서 지내면서 촬영했다고 하네요. 영화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촬영했을지 저절로 느껴질 겁니다.
'당신의 굿 라이프 안내서'라는 광고 카피처럼 <캡틴 판타스틱>은 교육이 무엇인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등등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질문합니다. 도시가 옳고 자연이 틀렸다는 식의 명쾌한 답을 내려주지도 않습니다. 결말에 다다르면 관객 각자의 선택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지루하고 뻔한 질문 같지만 그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올해 본 어떤 영화보다도 유익하고 재미있었네요.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