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많은 감독들은 복수를 사랑한다. 인간이 품어낼 수 있는 감정 중에서도 극단의 분노와 고통이 뒤엉킬 수밖에 없는 복수는 영화의 감정적 증폭을 최대화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녹일 수 있는 좋은 장치다. 개인적 문제에 고정된 이야기부터, 사회적 문제와 폭력이 녹아있는 이야기,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까지. 복수를 품은 주인공이 펼쳐낼 상황들은 다양하게 놓여있기에, 영화 속에서 복수란 키워드는 오랜 시간 각기 다른 형태로 빚어져 왔다. 일명 '복수 영화'라 칭해지는 작품들 속에서도 뻔하지 않게, 독보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그려낸 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복수는 나의 것 Sympathy For Mr. Vengeance

감독 박찬욱 │ 출연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 │ 2002 │ 120분

박찬욱 감독은 복수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복수라는 키워드를 심도 있게 풀어낸 박찬욱은 일명 '복수 3부작'을 통해 독보적인 핏빛 세계관을 완성했다. 물론 이후 선보인 <아가씨>(2016)에서도 그 맥락을 놓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박찬욱 월드의 시작, <복수는 나의 것>은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만큼이나 가장 적나라하게 복수를 그린다. 영화 속에서 복수를 행하는 주체는 류(신하균)와 동진(송강호)이다. 누나의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이를 유괴한 류는 자신을 속인 장기밀매업자들에게, 아이를 유괴당한 동진은 제 아이를 주검으로 돌아오게 한 류에게 칼을 든다. 복수를 묘사하는 방식은 박찬욱답게 기이하다. 흔히 복수극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카타르시스라던가, 통쾌함은 없고 복수의 끝을 향해갈수록 찝찝하고 건조함만 남을 뿐이다. 게다가 유괴를 저지른 류에겐 불행 서사를, 피해자인 동진에겐 마치 업보와도 같은 과거 행적들을 덮어씌우며 끊임없이 관객들을 어지럽힌다. 박찬욱은 복수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공허한 것, 낫띵(nothing)을 위해서 에브리띵(everything)을 바치는" 것이라고 말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박찬욱의 세계관 속에서도 그가 말한 그 공허함을 가장 원초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Alice In Earnestland

감독 안국진 │ 출연 이정현 │ 2015 │ 90분

복수 전문가(!)라고 칭해도 과하지 않은 박찬욱 감독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두고 "근래 읽어 본 각본 중 최고"라는 말을 전한 적이 있다. 복수 전문가가 인정한 복수극은 어떤 모양일까 기대를 하는 이들이 많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엔 복수라 칭할 게 없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얼핏 본 이들이라면, 마치 이 영화가 한 여성의 통쾌한 복수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영화 속 주인공인 수남(이정현)은 딱히 복수를 행할 의지가 없었다. 그저 수남은 자신의 행복을 아주 적극적으로 찾아낸 것뿐인데, 그것이 복수라는 결과로 포장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세상을 향한 복수'로 말이다. 수남은 성실한 여성이다. 성실하게 돈을 벌었고, 성실하게 남편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군분투는 늘 행복이 아닌 비극으로 귀결된다. 사랑하던 남편은 자살행위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그녀가 마련한 집은 재개발이라는 갈등에 휩싸였다. 수남은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자신이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행복을 발굴한다. 그것이 '성실한' 살인 행위일지라도 말이다. 이렇듯 수남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이다. 다만 수남의 비극을 한 편의 동화처럼 재기발랄하게 그려내며 영화는 수남을 '앨리스'로 만들어냈다. 의도치 않은 복수 행위가 뿜어내는 잔혹함을 우스꽝스러운 장면과 과장된 연기, 뜬금없는 편집방식 등을 통해 (블랙)코미디로 포장한다. 무엇보다 울분과 광기 그 사이를 오가는 이정현의 연기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를 경쾌하지만 잔혹하게 만든 최고의 미장센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Riders of Justice

감독 앤더스 토마스 옌센 │ 출연 매즈 미켈슨, 니콜라이 리 코스, 라르스 브리그만 │ 2021│ 116분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오늘 소개할 작품들 중 가장 최근 개봉작이다. 그것도 딱 한 달 전. 당시엔 안타까운 흥행 성적을 기록했지만, 평론가들 사이 꽤나 좋은 평가를 끌어내며 뒤늦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포스터만 두고 보자면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아내를 살해한 이들의 뒤를 쫓는 한 남자의 전형적인 복수를 그릴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오프닝만 보더라도 그렇다. 직업 군인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가 아내의 죽음을 마주하고, 분노와 절망의 눈물을 흘린다. 이후 영화는 마치 '리암 니슨 표' 액션을 펼쳐낼 듯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마르쿠스의 딸을 포함해 아내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하나 둘 씩 마르쿠스 곁으로 모여들며, 뜻밖의 관계를 형성한다. 각각의 말 못 할 상처를 지닌 이들이 한데 뭉쳐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 그 여정을 그리는 방식은 더욱 의외다. 세 명의 괴짜들과 함께 하는 마르쿠스의 복수 여정은 진지하다기보단 코믹하다. '오직 복수로 심판한다'며 시작한 영화는 극이 진행될수록 본분을 잊고 블랙코미디로 나아간다. 이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앤더스 토마스 옌센의 흔적이다. <브라더스>(2009) <맨 앤 치킨>(2015) 등에서 보여줬듯 그는 범죄, 스릴러, 드라마, 코미디 등 장르를 혼합하는 데 빼어난 능력을 보이는 이야기꾼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를 통해 말 그대로 제 이름이 새겨진 종합선물세트를 만들어낸 그는 놓치기 아까운 올해의 영화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멘토 Memento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 출연 가이 피어스, 캐리 앤 모스, 조 판토리아노 │ 2000 │ 113분

복수를 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 중에서도 <메멘토>는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 작품 중 하나다. <메멘토>를 보지 않은 이들이라도 이 영화의 설정을 익히 알고 있을 만큼, <메멘토>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복수를 소재로 한 영화를 꼽을 때면 늘상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레나드(가이 피어스)는 아내를 살해한 파렴치한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아간다.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레나드는 모든 상황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고 그 위에 메모하며, 핵심적인 단서가 될만한 것들은 제 몸에 문신으로 남겨놓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만 보면 끝끝내 범인을 찾아 나서는 한 남자의 처절한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메멘토>는 이야기를 쉽사리 전하지 않는다. <인셉션>과 <테넷>이 그랬던 것처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속의 시간을 자잘하게 쪼갰다. 영화의 시퀀스를 큼지막하게 나눠 역순으로 붙여낸 것은 물론이오, 중간중간 흑백으로 펼쳐지는 장면은 순차적으로 흐르도록 하며 두 개의 시간이 교체하도록 만들었다. 이야기만 들어선 대체 이 영화를 이해하기란 힘들다. 영화를 본 이들도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이야기의 퍼즐이 거대하고 촘촘하다. <메멘토>가 많은 이들에게 명작으로 꼽히는 이유 역시 이 구성에 있다. 처음에 관객들은 레나드의 시선에서 범인을 찾기 시작하지만, 그 퍼즐이 완성된 순간 우리는 진짜 복수의 대상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은 그 누구라도 놀란 감독의 천재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랜토리노 Gran Torino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 출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크리스토퍼 칼리, 비 방, 어니 허 │ 2009 │ 116분

<그랜토리노>의 감독이자 제작자, 주연배우이기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식 '꼰대' 할아버지인 월트 코왈스키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각혈하는 모습까지 마주한 그는 이제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느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고집불통 노인이다. 이웃 주민들과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는데, 그런 그의 앞에 갱단의 협박으로 고통받는 옆집 소년 타오가 나타난다. 처음엔 그저 자신의 귀하디 귀한, 72년산 세단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는 놈인 줄만 알았는데, 갱단의 위협으로 인한 일이었다는 일을 알게 되며 제 뜻대로 소년을 돕는다. 가면 갈수록 갱단에게 들끓는 분노를 느낀 타오는 복수를 다짐하지만, 그 순간 월트는 타오를 제 등 뒤에 숨기며 복수의 전선으로 나선다. 그런데 그 복수의 모양이 우리가 알던 맞서 싸우기가 아니다. 월터는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정의로운 방식으로 갱단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시종일관 '꼰대' 할아버지로 포장되던 월터는 사실 어른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책임과 희생을 보여주며, 진짜 복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곱씹게 한다. 왓챠피디아에 남겨놓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한 줄 평이 인상적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미리 써둔 유서를 보았다." <그랜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평생 자신이 느껴온 되갚음의 공허함,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감을 2시간으로 담백하게 압축한 영화다. 많은 관객과 평단이 <그랜토리노>를 향해 극찬을 보낸 이유이다.


씨네플레이 유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