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위도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를 대표하는 여성 히어로 블랙 위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솔로 영화 <블랙 위도우>가 2021년 국내 최고 흥행작으로 이름을 올리며 개봉 4주차에도 여전히 많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 스칼렛 요한슨, 플로렌스 퓨, 레이첼 바이스를 제외한 <블랙 위도우> 조연들의 지난 출연작을 살펴보자.


어린 나타샤

에버 앤더슨

나타샤는 어릴 때도 멋지고 강인하다. 동생마저 이별하게 되자 재빨리 총을 손에 넣어 모두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린 나타샤를 보면서 스칼렛 요한슨이 아닌 밀라 요보비치의 얼굴이 아른댔다면,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상이다. 나타샤 역의 에버 앤더슨은 밀라 요보비치와 그의 남편 폴 W.S. 앤더슨 감독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델 출신의 엄마처럼 어릴 적부터 저명한 포토그래퍼들과 화보를 찍어온 앤더슨의 첫 연기는, 지금의 요보비치-앤더슨 가족을 있게 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마지막 편 <레지던트 이블: 파멸의 날>(2016)에서 어머니의 아역을 맡은 것. 앤더슨은 21세기를 대표하는 두 여전사 캐릭터의 유년시절을 소화한 뒤엔 디즈니 실사화 프로젝트 <피터 팬과 웬디>에서 웬디 역을 맡아 이미 촬영까지 마쳐놓은 상태다. 그야말로 '괴물 신인'의 행보.

<레지던트 이블: 파멸의 날>


알렉세이 쇼스타코프

데이비드 하버

<블랙 위도우>는 꽤 웃기다. 주로 나타샤와 그의 가족들이 모여서 투닥거릴 때 웃음이 터지는데, 옛날엔 나름 날렵하고 똑똑했지만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는 동안 완전히 망가진 몰골이 돼버린 알렉세이의 지분이 특히 높은 편이다. 몸은 안 따라줘도 입만큼은 살아 있어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통에 여성 착취를 다루는 <블랙 위도우>의 무게감을 덜어낸다. 레드 가디언 수트를 입어도 전혀 히어로처럼 보이지 않는 알렉세이를 연기한 데이비드 하버는 뭐니뭐니 해도 <기묘한 이야기>의 짐 호퍼 경찰서장으로 가장 친숙할 것이다. 늘 심드렁 만사 귀찮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위기가 닥쳤을 땐 호킨스 마을의 평화를 지키려고 애쓰는 호퍼 서장의 듬직함과 알렉세이의 허당끼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하버는 <블랙 위도우> 외에도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 <헬보이>(2019)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에 참여했다.

<기묘한 이야기>


릭 메이슨

O-T 패그벤리

어벤져스 멤버나 러시아 가족이 없는 나타샤도 혼자는 아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안전한 신분증들을 마련해주고, 자동차는 물론 전투기까지 구해다 주는 릭 메이슨이 있다. 릭은 나타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한데, 나타샤는 그에게 매번 고마워할 뿐 이성적인 여지를 주진 않는다. 원작 속 릭 메이슨은 백인 남성이지만, <블랙 위도우>에서 릭을 연기한 건 영국 출신의 흑인 배우 O-T 패그벤리다. 스크린보다는 TV에서 더 뚜렷한 행보를 보여준 패그벤리는 <BBC>와 <HBO>가 제작한 여러 드라마를 거쳐 엘리자베스 모스 주연의 <시녀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남편 루크 역을 맡아 여러 시상식에서 조연상 후보로 올랐다. 작년엔 제작, 연출, 각본, 음악, 주연을 도맡은 시트콤 <맥스>를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태스크마스터

올가 쿠릴렌코

태스크마스터는 목격한 히어로의 전투 기술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빌런이다. 얼핏 '만능캐' 같은 설정과 해골 형태의 헬멧 안에 감춰진 정체 때문에 영화 공개 전부터 어떤 배우가 태스크마스터를 연기할 것이냐 의견이 분분했는데, 결국 우르라이나 여성 배우 올가 쿠릴렌코가 캐스팅됐다. 동유럽 출신의 여성 배우가 태스크마스터를 연기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이 여성 히어로 영화로서 <블랙 위도우>의 가치는 더욱 두터워진다. 10대 중반부터 모델로 활동하던 쿠릴렌코는 2005년 프랑스에서 연기를 시작해, 3년 뒤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의 본드걸로 활약하면서 세계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블랙 위도우>는 할리우드 SF, 테렌스 맬릭 등 거장들의 아트하우스 영화, 대중적인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온 쿠릴렌코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블록버스터다.


썬더볼트 로스

윌리엄 허트

카메오 격의 썬더볼트 로스는 <블랙 위도우>에서 나타샤 다음으로 MCU에 자주 출연한 캐릭터다. 전형적인 무능한 인간의 표상이라 할 만한 그는 <인크레더블 헐크>(2008)에서 처음 얼굴을 비추고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까지 참여해 철저히 '고구마' 캐릭터로 기능해왔다. <블랙 위도우>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수많은 병력을 몰고 나타샤를 잡으려고 하지만 심지어 허탕치는 신도 없이, 썬더볼트 로스는 나타샤와 '대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성기인 80년대 중반 윌리엄 허트의 아우라는 상당했다. 에로틱 스릴러 <보디 히트>(1981)로 얼굴을 알린 그는 <거미 여인의 키스>(1985)로 오스카와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석권했고, 이후 연속 3년간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55세 되던 해에 발표한 <폭력의 역사>(2005)와 <시리아나>(2005) 속 위협적인 권력자 캐릭터도 인상적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


드레이코프

레이 윈스턴

나타샤의 블랙 위도우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퇴장하기 전 마지막 임무. 과거 자신을 살인병기로 만들고,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걸 진행 중인 '레드룸'을 박살내는 것이다. 어벤져스에서 벗어난 나타샤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함께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에게 향한다. 드레이코프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비겁함'의 표상에 가깝다. MCU의 가장 대표적인 여성 히어로의 마지막 상대가 절대 힘을 지닌 이가 아니라 세계 각지의 어린 여성들의 정신을 지배해 세계 정복을 꿈꾸는 겁쟁이라는 점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레이 윈스턴은 주먹이 먼저 나가는 노동자계급의 갱스터 역할들로 커리어를 다져, 할리우드에 입성한 후엔 그 작고 뚱뚱한 몸을 어필하는 다양한 남성상을 보여줬다. 그가 구현한 드레이코프는 보잘것없어서 실망스러운 한편, 그래서 더 적역 같아 보였다.

<디파티드>


발렌티나 알레그라 드 폰테인

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

<블랙 위도우>의 쿠키 영상을 끝까지 본 이들이라면 <팔콘 앤 윈터 솔져>를 통해 마블 세계관에 합류한 발렌티나를 만났을 것이다. 혼자 나타샤를 추모하는 옐레나 곁에 스윽 다가와 요란하게 코를 풀고는 당신의 타깃이라며 어떤 이의 사진을 보여주는 바로 그 여자. 얼굴엔 계속 미소를 띠고 있는데 그게 영 달갑게만 느껴지지 않는 발렌티나의 오묘한 인상을 코미디언/배우 줄리아 루이드라이퍼스가 구현했다. <SNL>에서 경력을 시작해 <사인펠드>, <올드 크리스틴>, <부통령이 필요해>를 연달아 성공시키며 90년대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연기상을 휩쓴 베테랑의 실력이 앞으로 마블 세계관 안에서 어떻게 펼쳐지게 될까.

<부통령이 필요해>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