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당일부터 심상치 않은 입소문이 각종 SNS를 채우더니, 어느새 150만 관객을 등에 업은 <모가디슈>. 기존의 한국형 생존 영화를 짓누르던 신파와 과한 설정을 지워내며 '류승완의 귀환'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처절함이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채우는 가운데, 배우 조인성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안시성>(2018)이후 3년 만에 스크린을 찾은 그는 안기부 출신의 주(駐) 소말리아 한국 대사관 강대진 참사관을 연기한다. 기존의 안기부 인물들과는 다른 얼굴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조인성은, 그가 쌓아온 시간들을 모두 녹여내며 눅진하고 깊은 감정으로 <모가디슈>를 채운다.
데뷔 초, 브라운관을 통해 먼저 주목받은 조인성은 영화 속에선 한 번도 단역이나 조연이었던 적이 없다. 더욱 뜻밖의 사실은 <모가디슈>를 포함해 지금까지 단 9편의 영화에서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 스크린 위 조인성의 얼굴들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영화 속 조인성의 모습들을 한자리에 모아봤다.
조인성의 스크린 데뷔작을 <마들렌>이나 <클래식>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많지만, 그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화장실 어디에요?>를 통해 영화 필모그래피의 발걸음을 뗐다. <메이드 인 홍콩> <리틀 청> 등을 만든 프룻 첸 감독의 야심작으로, 화장실이 어디냐는 질문을 통해 방황하는 청춘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다소 실험적인 작품이다. 홍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지만 100% 한국 자본이 투입된 한국 영화로, 조인성은 영화 속에서 김선박(장혁)과 함께 세계 곳곳의 화장실을 돌아다닌다. <학교 3>(2000) <뉴 논스톱>(2000) <피아노>(2001) 등을 통해 서서히 몸집을 불리고 있던 그가 스크린을 통해선 다소 도전적인 면모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조인성의 첫 번째 영화 속 얼굴이 궁금한 이들이라면, '왓챠'에서 이 영화를 만나보시기를.)
조인성은 <마들렌>과 <클래식>,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했다. 먼저 <마들렌>. 조인성과 신민아의 풋풋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마들렌>은 지석(조인성)과 희진(신민아)가 한 달간의 계약 연애를 통해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을 조명한다. 당시 조인성과 신민아의 만남이라는 높은 기대감에도 불구 아쉬운 흥행 성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배우 조인성은 <마들렌>을 통해 확실한 로맨스의 시작점을 맞이했다. 다소 거칠었던 드라마 속 얼굴을 걷어내고 그가 담아낼 수 있는 사랑의 표정을 확실히 지어내며 또 하나의 눈도장을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곧바로 조인성은 <클래식>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을 푹 적시는 데 성공했다. 한국 로맨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우중 장면을 장식한 조인성은, 다소 적은 분량에도 불구 중요한 장면들을 꽉 채우며 그의 말랑말랑한 면모를 보였다. 물론 당시 조인성의 연기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갔던 것도 사실이나, 이제 와서 <클래식>을 다시 보면 그 어색함마저 풋풋함으로 승화되는(!) 느낌을 마주할 수 있다. <클래식>은 어쩌면 조인성에게 성장통을 선사한 작품일 수도 있겠으나, 이후 유하 감독과 만나게 된 계기 역시 <클래식>이 만들어 주었으니. 결과적으로 <클래식>은 조인성의 영화 역사에서 주요한 지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겠다.
같은 해에 내리 세 작품을 선보인 조인성은 <마들렌> <클래식>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영화 <남남북녀>로 2003년의 여름을 장식했다. 같은 시기 <별을 쏘다>에서 전도연이 계속해서 부르던 '구성태'역을 통해 소위 스타덤에 오른 조인성은 <남남북녀>에선 정반대의 코믹한 얼굴을 드러낸다.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딸(김사랑)과 사랑에 빠진 국가정보원장 아들을 연기한 그는 모든 힘을 빼고 확실하게 망가졌다. 당시 조인성은 한 인터뷰에서 "<마들렌>과 <클래식>에선 혹평을 들었지만 <별을 쏘다>에서는 호평을 받은 만큼" 스스로의 벽을 또 하나 깨기 위해 코믹 연기를 택했다고 밝혔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조인성의 영화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하면 이전 작품들이 섭섭할지도 모르겠으나. 조인성의 영화 인생은 <비열한 거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아내가 조인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조인성에게 처음 관심을 뒀다는 유하 감독을 만나면서부터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열한 거리> 촬영 내내 유하 감독은 조인성을 파고들었다. 배우들을 극한까지 몰아 최고의 컨디션을 담아내기로 유명한 유하 감독은 조인성 본인도 몰랐던 그의 가능성을 최대로 뽑기 위해 지독하게 조인성을 괴롭혔다. <비열한 거리> 속 병두(조인성)의 등장 장면만 하더라도 몇십번을 반복해 찍었을 정도로 유하 감독은 조인성의 한계를 실험했다. 결과적으로 <비열한 거리>는 조인성의 '인생작'이 됐다. 조인성은 자신을 싸매고 있던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벗겨내고, 배우라는 수식어를 달기 시작한다. 그렇게 <비열한 거리> 이후 조인성의 연기 궤도는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해간다.
<비열한 거리>의 성공 이후, 조인성은 내로라하는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조인성은 다음 작품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유하 감독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제안들을 거절했고,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후 <쌍화점>의 출연을 결정했다. 모두들 조인성의 선택에 의외라는 반응들을 보냈다. 유하 감독을 기다린 것도 기다린 거지만, 진하디진한 정사신이 펼쳐지는 <쌍화점>에 망설임 없이 출연 결정을 했으니. 당시로선 꽤나 파격적인 행보라는 평이 이어졌다. 물론, 유하 감독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비열한 거리>의 병두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붙들었듯이, <쌍화점>에서도 조인성은 홍림의 혼란스러움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고른 호평을 이끌었다.
<쌍화점> 이후 무려 9년간 조인성은 영화 출연을 쉬어갔다. 군에 입대하며 공백기가 있기도 했지만, 제대 이후 노희경 작가와 손을 잡으며 주로 브라운관에서 얼굴을 비췄다. 조인성의 배우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으라면, 유하 감독과 노희경 작가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지 않을까.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 <괜찮아, 사랑이야>(2014) <디어 마이 프렌즈>(2016)를 통해 노희경 작가와 함께한 조인성은 배우로서 한층 깊어진 내면을 지니고 영화 <더 킹>으로 스크린에 컴백했다. '진짜 권력'을 쥐고 싶어 서서히 변해가는 검사, 태수의 타락을 오롯이 표현해낸 조인성은 다시금 제 인생작을 갈아치우는 데 성공했다.
<비열한 거리> 이후 조인성은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배우로 우뚝 섰다. <쌍화점>과 <더 킹>의 성공에 이어 <안시성> 역시 540만 관객을 끌어들이며 2018년 추석 극장가의 완벽한 승자가 됐다. 안시성을 지켜낸 5000 군사의 이야기를 그리는 <안시성>에서 양만춘을 연기한 조인성은 수많은 군사를 짊어지고 맨 앞에서 극을 이끈다. 처음 조인성이 <안시성>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땐 조인성이 장군 역할이 어울리겠냐는 말들도 오갔지만, 조인성은 의심의 눈초리들을 보기 좋게 짓누르며 <안시성>의 승리를 이끌었다. 처음엔 본인 스스로도 장군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 어울리는 역할은 또 무엇인가를 역으로 되물었다는 조인성은, <남남북녀>가 그랬듯, <안시성>을 통해 자신의 벽을 또 하나 부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