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영국 북동부 지역에서 댄서의 꿈을 키워나가는 소년의 성장을 그린 <빌리 엘리어트>(2000)는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엘튼 존(Elton John)이 음악을 만든 뮤지컬로도 제작돼 어마어마한 흥행을 기록했다. 오는 8월 31일부터 개막하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기념하며,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 음악을 되새겨본다.


Cosmic Dancer

T. REX

빌리(제이미 벨)는 영국 글램록 밴드 티렉스의 두 번째 앨범 <Electric Warrior> 바이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숨을 가다듬으며 플레이 한다. 음반을 트는 손이 서투르다 못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앞으로 <빌리 엘리어트>에서 티렉스의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고 못 박아두는 듯한 신이다. 후반부 기타 연주가 나오자 다시 바늘을 처음으로 옮겨 트는 노래는 'Cosmic Dancer'다. 'Mambo Sun'을 잇는 <Electric Warrior>의 2번 트랙이다. 70년대 글램록 신을 다룬 영화 <벨벳 골드마인>(1998)에도 사용된 바 있다. 개나리색 탱크탑을 입고 음악과 함께 튀어오르는 빌리의 얼굴과 몸이 "12살 때 난 춤을 추고 있었어.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춤을 췄어. 일찍부터 춤을 추는 게 이상한 거야?"라는 노랫말과 꼭 들어맞는다. 강한 록 사운드보다는 몸과 마음이 천천히 떠오르는 듯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더 돋보여 춤을 추는 빌리의 벅찬 기분(발레학교 면접 때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을 받은 빌리는 "제가 사라지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이 대번에 전달된다.


Top Hat, White Tie, and Tails

FRED ASTAIRE

빌리는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할아버지가 물려준 글러브를 끼고 권투장에서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실력도 의지도 없다. 파업 중인 광부들을 위해 권투장 한켠에서 발레 수업이 진행되고, 빌리의 몸은 저 옆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더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리고 쭈뼛쭈뼛 발레복을 입은 여자애들 사이로 가서 산드라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동작을 따라한다. 집에 가는 길에 만난 산드라 선생님에게서 수업료 50펜스를 빚졌다는 말을 들은 빌리는 홀로 서서 괜히 나무막대기나 휘둘러본다. 그때 옛날 사람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곧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 프레드 아스테어. 20세기 초중반 최고의 배우이자 댄서였던 프레드 아스테어, 1935년 영화 <톱 햇>에서 똑같이 입은 댄서들과 함께 'Tom Hat, White Tie and Tails'를 선보이는 장면. 그리고 할머니를 데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로 가는 길, "네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댄서가 프레드 아스테어였단다. 팔레스 극장에서 그의 공연을 보러가곤 했지. 집에 와서는 우린 미친 듯이 춤을 추곤 했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 엄마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빌리가 춤에 절로 이끌렸던 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Get It On

T. REX

자기 침대 밑에 발레 슈즈를 숨기면서부터 빌리는 본격적으로 발레에 매진해보기로 한다. 티렉스의 'Get It On'은 하고 싶은 걸 해보기로 마음먹은 빌리의 마음이 얼마간 트이는 듯한 순간들을 수식한다. 일상에 대단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절친 마이클과 달리기 대열에서 빠져나와 지름길로 향하는 다리밑을 조심조심 건너다가 마이클이 "발레 스커트 있냐고 물어봐" 라고 하는 걸 듣고 두 친구 사이에 아주 잠시 묘한 분위기가 오간다. 동네에 찾아온 간이 버스 도서관에서 몰래 발레 교습서를 읽다가 사서에게 따가운 소리를 듣고, 사서가 시위대 진압에 정신이 팔린 사이 몰래 책을 바치춤에 훔쳐 나온다. 'Get It On' 역시 티렉스의 최고 명반 <Electric Warrior>에 수록된 곡이다. B면의 첫 곡을 장식하는 이 노래는 안 그래도 흥겨운 연주에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멤버 이언 맥도날드의 색소폰 연주까지 더해져 보다 훵키한 트랙으로 완성됐다. 밝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사는 티렉스의 브레인 마크 볼란(Marc Bolan)과 전설적인 DJ 존 필(John Peel)의 갈등을 담고 있다.


Children of the Revolution

T. REX

몇 개월째 아버지한테 권투를 배운다 거짓말하고 발레를 배우던 빌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발레 교실에 따라온 아버지에게 들키고 만다. 당연히 극구반대. 발레는 여자만 하는 거고 남자는 자고로 축구나 레슬링 같은 걸 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말만 늘어놓는 걸 듣다가, 빌리는 "아버지는 머저리예요!" 외치고 집 밖으로 나온다. 오르막길을 달리는 빌리를 멀찌감치 바라볼 때 티렉스의 'Children of the Revolution'이 나온다. 파업 팻말을 쳐봐도 화가 삭이질 않는다. 제 발로 산드라 선생님 집에 찾아가는 장면이 이어지고, 그녀가 문을 열자 음악이 서서히 멈춘다. 거기서 산드라 선생님의 남편이자 자기를 좋아하는 게 분명한 데비의 아버지를 만나고, 데비 방에서 단둘이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별안간 베개 싸움을 하자 다시 노래가 이어지고, 몸을 포갠 채 데비가 빌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바깥 소리를 듣고 노래는 다시 멎는다. 가난하고 보수적인 아버지를 벗어나고 싶은 열망과 11살 아이들 사이의 묘한 감정을 'Children of the Revolution' 하나로 아우른다.


I Love to Boogie

T. REX

산드라 선생님에게 국립발레학교 입학을 권유받고 도망치듯 반응한 빌리는 (친구 마이클이 가족 몰래 여장과 화장을 한다는 걸 안 후) 선생님을 찾아온다. 그리고 엄마가 남긴 편지를 보여준다. 혼자 얼마나 읽었는지 그걸 보지 않아도 "영원토록 너와 함께 있단다. 너를 알았다는 게 자랑스럽고, 네가 내 아들이라 자랑스러워. 늘 자신에게 충실하거라" 엄마의 편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는다. 그렇게 마음을 나눈 스승과 제자가 할 일은 바로 춤추는 것! 티렉스의 'I Love to Boogie'가 빌리와 산드라의 댄스 BGM처럼 붙는다. 그게 다가 아니다. 같은 동작을 하며 체육관을 뛰어다닐 때, 빌리의 형 토니가 혼자 이 노래를 들으며 몸을 흔들고, 거실에선 할머니가 'I Love to Boogie'에 맞춰 발레 동작을 연습한다. 앞서 사용한 티렉스 음악이 밴드의 초기작들로 이루어졌다면, 'I Love to Boogie'는 1976년에 싱글로 발표돼 이듬해 여덟 번째 앨범 <Dandy in the Underworld>에도 실렸다. 당시 하락세였던 티렉스에게 재기의 분위기를 띄워준 노래인데, 안타깝게도 마크 볼란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면서 티렉스의 명맥은 끊기고 말았다.


A Child is Born

THAD JONES

어느날 밤 잠에서 깬 빌리는 부엌에서 여느 때처럼 미소를 띄운 채 잔소리를 하는 엄마의 환영을 본다. 바로 다음 장면으로 빌리와 산드라 선생님의 연습이 붙는다. 구령 외에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은 채 그저 'A Child is Born'의 아름다운 선율만이 가득하다. 편집 순서 때문일까, 이 장면에서 산드라와 빌리는 스승과 제자보다는 어머니와 아들처럼 보인다. 'A Child is Born'은 재즈 트럼페터 새드 존스가 1969년 발표해 빌 에반스, 토니 베넷, 스탠리 터렌타인 등을 통해 재해석 되면서 대표적인 재즈 스탠다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유의 포근한 멜로디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특히 더 사랑받는 곡이다.


London Calling

THE CLASH

<빌리 엘리어트>를 채운 록 음악은 발표 순서와 러닝 타임이 얼추 일치한다. 티렉스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은 'I Love to Boogie'가 등장한 이후, 70년대 초중반을 수놓은 글램록의 기수였던 마크 볼란이 세상을 떠난 뒤 태동한 펑크(Punk) 음악의 금자탑과도 같은 곡 'London Calling'이 사용됐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노조 시위 진압 시퀀스에서다. 무장한 경찰들이 거리를 메우고, 노조원들이 그들을 피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보다 강력한 태도로 일관했던 노조 지도자인 토니가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몸을 피한다. 클래시의 'London Calling'의 에너제틱한 사운드가 처음엔 노조의 것처럼 보이지만, 노조원들이 흩어지고 홀로 떨어져 도망치는 토니의 처지가 계속됨에 따라, 음악은 폭압적인 시위대의 편에 서는 것처럼 편집됐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갈등도 금세 해결하고 넘어가는 <빌리 엘리어트>의 전개 때문일까, 이불보를 뒤집어쓴 채 거리에서 매를 맞고 피 흘리는 토니의 모습이 한껏 끔찍하게 보인다.


Town Called Malice

THE JAM

빌리를 가르치겠다는 산드라와 이를 가로막으려는 아버지와 형 사이의 갈등을 보다 못해 뛰쳐나온 빌리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격렬히 몸을 움직인다. 괴로워 미칠 지경이지만 탭댄스 리듬을 따라가는 발재간은 멈추지 않는다. 춤을 향한 빌리의 의지라기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몸의 반응이라고 보는 게 더 걸맞아 보이는 몸짓이다. 하지만 잼의 'Town Called Malice'는 내내 흥겹기만 하다. (노동 계급을 상징하는) 파란 문을 박차고 나와 몸을 움직이는 빌리는 마이클 앞에서 고난이도의 동작을 선보인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춤이 계속되다가 어느새 빌리의 얼굴은 고통도 희열도 보이지 않는다. 클래시에 이어 영국 펑크 신을 계승한 잼은 현재에도 꾸준히 새 앨범을 발표하는 폴 웰러(Paul Weller)가 이끌었던 밴드다. <빌리 엘리어트>의 사운드트랙엔 잼을 해체한 다음 폴 웰러가 결성한 스타일 카운슬(The Style Council)의 노래 'Shout to the Top'과 'Walls Come Tumbling Down'이 수록됐는데, 이 두 곡은 실제 영화에는 들리지 않는다. 'Town Called Malice'와 함께 온 동네를 누비며 춤을 추는 시퀀스가 끝난 후, 오리지널 스코어 외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다른 음악은 쓰이지 않는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