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은 여전히 마블이었다. 흥행 불패에 가까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는 MCU 라인업답게 다소 지명도가 떨어지는 캐릭터임에도 25번째 영화인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블랙 위도우>에 이어 2021년 두 번째로 높은 북미 박스오피스 오프닝 수익을 올렸다. 애초 기대치는 5000만 달러 정도였으나 삼 일간 이를 상회하는 7500만 달러에, 노동절 휴가까지 포함해 9500만 달러에 가까운 흥행을 올리며 2007년 롭 좀비가 리메이크한 <할로윈>이 가지고 있던 노동절 오프닝 수익(3000만 달러)마저 갈아치웠다. 연휴기간이지만 전통적으로 흥행이 되지 않던 마의 노동절 박스오피스 기록을 14년 만에 3배 이상 높여 놓은 수치다. 더욱이 코로나 4차 유행이 가라앉지 않는 상황 속에서 거둔 기록이라 더욱 놀랍다.


마블의 첫 아시안 슈퍼 히어로 영화, 샹치!

1973년 스티븐 엥글하트와 짐 스탈린에 의해 창조된 샹치는 동양계 마블 히어로로, 당시 이소룡으로 대표되던 쿵푸영화 열풍의 영향을 받았다. 재밌게도 80년대 후반 스탠 리가 처음 영상화를 기획했을 땐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를 샹치로 고려했다고 한다. 흑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던 <블랙 팬서>와 유사한 전략으로 이젠 북미 시장보다 더 커진 빅 마켓 중국 시장을 염두에 둔 기획으로도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 현재 중국 개봉은 금지됐다. 그러나 아시아권 최고 스타 중 하나인 양조위의 첫 할리우드 나들이로 기대감을 높였고, 친숙한 아콰피나와 양자경을 비롯해 <김씨네 편의점>으로 알려진 시무 리우 등 앙상블 캐스팅에, 성룡을 필두로 동양 마샬아츠 영화에 경배를 바치는 요소들을 잘 조화시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실패를 예측했던 예상들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다른 국가들보다 하루 먼저 개봉한 국내에서도 100만을 쉽게 넘기며 쾌조의 스타트로 출발했다. 고전적이지만 강력한 아버지와 아들의 주된 갈등을 축으로, 엄마와 여동생까지 얽힌 가족사로 풀어낸 이야기는 MCU를 처음 시작했던 <아이언맨> 시리즈와 결부된 떡밥을 회수하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물론 차기작인 <이터널스>와도 연계되며 가히 빌드 업의 대가라 부를 마블의 긴 안목과 깨알 같은 잔재미에 놀라게 만든다. 잔잔한 드라마로 인정받은 데스틴 크리튼 감독이지만, 쿵푸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정으로 액션 연출에 대한 우려와 편견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편집에 해리 윤, 미술에 슈 찬 등 아시안 스탭들의 참여도 눈에 띈다. 조금 생소한 이름이 있다면 바로 음악을 담당한 조엘 P 웨스트의 존재다.


(왼쪽부터) 데스틴 크리튼 감독, 조엘 P 웨스트 음악 감독

데스틴 크리튼 감독의 음악 파트너, 조엘 P 웨스트

조엘 P 웨스트는 국내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내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영화음악가다. 포크와 클래식, 챔버적인 스타일을 결합한 음악을 들려준 '더 트리 링스(The Tree Ring)'와 일렉트릭과 퍼쿠션의 이색적인 듀오 '플루드 코츠(Flood Coats)' 멤버로 활동하며 다양한 곡들을 썼으며, 연출을 맡은 데스틴 크리튼의 모든 작품(<아임 낫 어 힙스터>, <숏텀 12>, <더 글래스 캐슬>, <저스트 머시>)에 참여하며 영화음악가로도 활동해왔다. <그랜마>, <해피 어게인>, <올 서머스 엔드> 등 주로 인디영화들에서 섬세하고 탁월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이번처럼 메이저 블록버스터 음악을 경험한 경우는 전무하다. 하지만 의외로 인상적인 연출을 보여준 영화 파트너 데스틴 크리튼처럼, 조엘 P 웨스트의 스코어 역시 놀라움을 안긴다.

그간 마블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핫한 마이클 지아치노나 브라이언 타일러, 라민 자외디, 헨리 잭맨, 크리스토퍼 벡 등의 중견 영화음악가들을 골고루 중용하는 한편, 알란 실베스트리나 존 데브니, 패트릭 도일과 대니 엘프만, 마크 마더스바우 같은 백전노장의 베테랑들로 중간 중간 방점을 찍어왔다. 물론 잘 알려지지 않았던 라이언 쿠글러의 음악적 파트너 러드윅 고랜슨이나 마블 최초 단독 여성 히어로 영화라는 상징성으로 피나 토프락이 깜짝 기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엘 P 웨스트 역시 감독과의 인연으로 MCU에 깜짝 편입되는 기회를 잡은 경우다. 대작 경험이 일천하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듯 그는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70인조 오케스트라를 대동해 한스 짐머의 조력자로 유명한 개빈 그리너웨이 지휘 아래 중국 전통의 소리에 서양의 슈퍼히어로 스코어를 믹스시킨 음악을 완성해냈다.


중국 전통 악기와 심포닉 히어로 뮤직의 만남

일본 핏줄이 섞이고 하와이에서 자란 감독과 달리 전혀 아시아 문화에 대한 접점이 없는 웨스트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음악을 위해 중국 전통 음악과 악기를 연구하는데 몇 달을 보냈다. 그 결과 얼후(이호)와 퉁소, 디즈(당적(唐笛)의 원형), 고쟁, 비파, 양금, 당고 등 다채로운 중국 전통악기들을 활용했고, 중국 음악의 근간이 되는 5음계의 펜타토닉 스케일을 사용한 테마들을 직조해냈다. 음악의 핵심은 샹치와 아버지 웬우, 어머니 잉 리, 그리고 여동생 샤링 등 한 가족의 사랑과 유대, 마찰과 치유라는 감성적인 영역을 다루기에 크게 동양적인 요소를 부각시키지 않지만, 전통 악기와 음계에서 나오는 특유의 아우라로 그 뿌리와 정서, 정체성을 부여했다. 각 가족들을 상징하는 4개의 테마들은 서로 얽히고 부딪치고 조화하며 하나로 뭉쳐 샹치 음악을 완성한다.

여섯 노트로 이뤄진 샹치의 테마는 영웅적인 팡파르와 운명론적인 색채를 짙게 드리우며, 여기에 축제나 무극(武劇)에서 사용되는 타악기 당고(堂鼓)를 위시해 배고(排鼓), 판고(板鼓), 차이나 심벌과 공 등 역동적인 퍼쿠션이 결부돼 가족에게서 도망친 그의 불안한 심정과 그의 강력함을 동시에 표현해내고 있다. 특히나 액션 시퀀스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파워풀한 사운드는 초반의 성룡식 마샬아츠나 후반의 동양 판타지 장르에 모두 잘 어울리며 영화의 흥분과 재미를 배가시킨다. 반면 오랜 세월을 홀로 버텨온 웬우의 테마는 그리그나 페르트, 바그너 등에게 영감을 받아 드라마틱한 슬픔과 고독, 우울함의 정서가 기저에 깔려있으며, (양조위의 추천으로 선택된) 첼로는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이긴다는 걸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어머니 잉 리의 테마는 중국 전통의 민속음악에서 영향 받았으며, 유려하고 아름다운 음색의 얼후로 평화로움을 추구하는 탈로라는 공간과 우아한 캐릭터의 매력을 함께 묘사한다. 샹치와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상처를 공유한 여동생 샤링의 테마는 향수와 슬픔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유일한 가족의 상징이자 대표성을 띄기에 20세기 중국 모던 클래식의 기저가 되는 두 대의 하프와 씁쓸하면서도 감미로운 첼로로 화합과 용서, 복권을 시도한다. 조엘 P 웨스트는 이번 작품의 스코어가 가장 큰 모험이자 도약이었다며 이전에 작업한 <숏텀 12>에서 전체 음악이 대략 15분에 불과했는데, 이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선 음악이 나오지 않는 부분이 15분이 될는지 모르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아시아 (그리고 한국) 뮤지션들이 꾸린 OST

퓰리처상을 받기도 한 현존 최강의 래퍼 켄드릭 라마가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아티스트들을 불러와 프로듀싱해 히트했던 <블랙 팬서>처럼 이번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선 미국 내 활동하는 (아시안) 뮤지션들 외에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다양한 국적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했다. 88라이징의 션 미야시로가 직접 프로듀싱한 이번 인스파이어드 앨범은 할리우드에서 그간 찾아보기 힘들었던 동양계가 추축이 된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빌보드에서 BTS의 활약과 필리핀 출신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약진 그리고 K팝 위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도 한몫했다. 그런 점에서 총 18개의 노래 중 앤더슨 팩과 오드리 누나 등 한국계 뮤지션들을 포함해 국내 뮤지션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

일본의 가수 겸 배우 호시노 겐과 함께 한 자이언 티를 비롯해, DPR LIVE(디피알 라이브)와 DPR IAN(디피알 이안), 그룹 갓세븐 출신 마크와 비비, 그리고 88라이징에 소속된 서리 등 각기 다른 스타일의 음악들을 선보이며 풍성한 만찬을 선사한다. 심지어 주연인 시무 리우와 프로듀서인 션 미야시로까지 직접 참여했다. 이들 외에 21세비지나 스웨 리, 궵대드 포어 싸우전드, DJ 스네이크, 사위티, 니키, 리치 브라이언 등 힙합과 R&B 뮤지션들이 가족과 사랑, 추억 그리고 고통과 치유에 대해 다채롭게 털어놓는다. 2주째 정상을 차지한 영화 흥행에 힘입어 사운드트랙은 빌보드 차트 160위로 데뷔했다. OST엔 실리지 않았지만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영화 중간 중간 개그 포인트로 흘러나와 웃음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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