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기적>

답답했을 거다. 비밀을 품은 인물을 연기하기란. 이수경은 그동안 차마 못 했던 <기적> 뒷이야기를, 갓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사랑 마냥 해맑고 생생하게 쏟아냈다. 글에는 생략했지만 그의 모든 말마디 끝에는 즐거운 느낌표와 ‘(웃음)’이 달려 있었다. 그 모습에 <차이나타운> 쏭의 어둠과 <침묵> 미라의 반항, <로스쿨> 솔B의 차가움은 더더욱 없었다. 곧 <기적> 보경을 떠올렸다. 사투리만 쓰지 않았다뿐이지 그 사랑스러움은 같거나 더했다. 시골 마을 봉화의 열일곱 소년, 준경(박정민)의 간이역 만들기 감동 프로젝트는 라희(임윤아)와 보경이라는 두 축이 없었다면 잘 굴러가지 않았을 테다. 라희가 추진력을 담당했고 보경은 준경 영혼의 버팀목이었다. 반전에 판타지까지 한 몸에 책임진 이수경이,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며 영화에 설득력을 실어줬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거다.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이수경을 만났다. 이날 현장에는 예상치 못한 배우가 함께했다. <기묘한 가족>에서 이수경과 남매로 활약한 김남길이다. 몇 달 전 이수경은 김남길이 대표로 있는 길스토리이엔티에 새 둥지를 틀었다. ‘대표’ 김남길은 <전지적 참견 시점> 일일 매니저가 되어 소속 배우의 신작 홍보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이날 기자의 마중과 배웅 역시 대표의 몫이었고, 짧은 게릴라 답변으로 인터뷰에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작은 질문에도 사연 보따리를 풀어 널던 이수경과의 대화를 독자에게 전한다.


보경은 반전 서사를 가진 인물이에요. 맡은 역에 대해 주변에 자세히 말할 수가 없어서 그동안 답답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지금도 너무 답답해요. 너무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요. 주변 분들을 시사회에 초대해서 영화가 어땠는지 재밌었는지 물어보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객관적인 질문도 던지면서 반응을 봐야 하니까 쭉 비밀로 간직했어요.

이제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네요. 개봉이 더 반갑겠어요.

너무요! 소화제 먹기를 30분 앞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사이다 마시기 직전? 지금 딱 그 느낌이에요.

시나리오 첫인상이 궁금해요. 당연히 후반부의 반전을 다 알고 읽었죠?

네. 그래서 재미가 덜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알고 읽었는데도 ‘헉’ 했던 지점이 있었어요. 아시죠! 거기서 저도 모르게 또 ‘헉’ 했어요. 제 캐릭터뿐만 아니라 저와 소통하는 다른 캐릭터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에요. 준경, 아빠 태윤(이성민), 마을 사람들 모두 개성이 살아있고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있어서 좋았어요.

보경은 곧, 준경이 간이역에 집착하게 된 이유와도 같아요. 역할의 무게에서 오는 부담은 없었나요.

처음엔 뭘 따로 준비해야 하나 싶었는데, 진짜처럼 하자고만 생각하게 됐어요. 매 순간 매 장면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뿐이었어요.

오디션을 보고 <기적>에 함께하게 됐다고 들었어요.

지난 작품을 함께 했던 언니가 <기적> 연출부에 계셨어요. 언니가 시나리오를 보내주셔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는 거죠. <기적> 오디션을 보고 있다는 소식은 꽤 오래전부터 들어서 알고는 있었어요. 아는 분들이 오디션을 보기도 하셨고요. ‘이게 왜 아직도 캐스팅이 안 됐지?’ 싶었죠. “이미 늦은 거 아니에요, 언니?” 했는데 오디션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봤어요. <기적> 오디션은 다른 오디션이랑은 좀 달랐어요. 양원역에서 보경이와 준경이가 울며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감독님이 그 장면을 꽤 많이 시켜보셨어요. 못해도 10번은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눈물을 잘 쏟아내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눈물을 짜냈어요. 하도 울어서 나중엔 눈이 아프더라고요. 속으로 ‘이쯤 하면 되겠지’, ‘이쯤 하면 되겠지’ 했는데, 감독님은 계속 계속 시키셨어요. ‘내가 너무 못하나?’ 생각했죠. 다행히 캐스팅이 됐어요.

어떤 점을 좋게 봤던 걸까요. 이장훈 감독에게 캐스팅 이유에 대해 들은 것이 있나요.

현장에 가서도 그 장면이 가장 어려울 텐데, 그때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파악하려고 계속 시켰다고 하셨어요. 캐스팅 이유는 저도 인터뷰로 본 건데 제가 웃는 게 보경이 같았다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기적>에서 보경은 희생을 감수하는 인물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기꺼이’라는 말이 들어갈 것 같아요. 아빠와 동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캐릭터. 그때 그 시절을 제가 잘은 모르지만, 저희 고모들만 해도 막내인 아빠를 대학에 보내려고 일찍부터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저희 영화 초반에도 보경이가 “저는 대학 안 가요”라고 하는 게 나와요. 보경이도 어려서부터 엄마 대신 준경, 태윤을 보필해왔을 거예요.

<기적>

<기적>의 배경은 경상북도 봉화예요. 경상북도에 강원도가 섞인 듯한 사투리라 독특하다고 들었어요. 경기 출신인데, 어떻게 준비했나요.

박찬별이라는 영주 출신 언니가 있어요. 배우 준비하는 언닌데, 저희 영화에 나오는 모든 분의 사투리를 담당해주셨어요. 숨은 공신이에요. 경북은 진짜 특이한 것 같아요. 매체에서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투리라 어려웠어요. 정민 오빠가 저를 처음 만나기도 전에 사투리 챔피언분한테 녹음본을 받아서 주기도 하셨어요. 사투리 챔피언이요? 네. 1년에 한 번씩 사투리 경연대회 같은 걸 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사투리도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고 다 캐치할 수가 없어서 사투리 선생님을 기준으로 연기했어요.

실제로 봉화 출신인 이성민 배우가 돕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도와주셨어요. 근데 그런 게 있었어요. 네이티브가 쓰는 말로만 하면 관객분들이 못 알아들으시겠더라고요. 선배님이 ‘아, 이건 이렇게 얘기 안 하지~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얘기하지!’ 하시는데 현장에서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영화적으로 말을 골랐습니다.

혹시 시범 보인 말 중 기억 나는 게 있나요.

너무 외국어 같아서. (웃음)

<기묘한 가족>, <용순>에서는 충청도 사투리를 해봤어요.

<용순> 때는 처음에 사투리 녹음본을 받긴 했는데, 감독님과 스태프분들이 충청도 출신이셔서 자연스럽게 터득했어요. <기묘한 가족>은 충청도에서도 좀 더 진한 사투리였어요. 여기 계시는 대표님(김남길)이랑 같이 찍은 영환데, 따로 배웠다기보다는 배우들끼리 쉬는 시간에도 계속 사투리로 얘기하니 입에 꽤 익었던 것 같아요.

<기적>을 위해 또 준비한 게, 데뷔 이후 처음 단발을 했어요. 시청자는 <로스쿨> 솔B로 단발 이수경을 먼저 만났지만 <기적> 촬영이 먼저였다죠. 자르는 게 아깝진 않았나요.

저 너~무 자르고 싶었어요. 한번 그 마음이 커졌을 때가 있는데, 주변에서 긴 머리가 나을 것 같다고 다 말리더라고요. 근데 보경이가 딱 온 거죠. 감사히 여기며 캐스팅되자마자 거의 바로 잘랐어요.

<기적>

보경은 준경 눈에만 보이잖아요. 보경이 라희나 태윤과 같은 공간에 있는 장면을 찍을 때 임윤아, 이성민 배우는 당신을 의식해서는 안 됐을 텐데. 이런 디테일을 챙기는 게 모두에게 색달랐을 것 같아요.

영화 후반에서 라희가 준경이 생일 파티를 해주는 장면은 사실 초반 촬영분이었어요. 제 첫 대사도 하필 그 장면이었죠. 몸에 익고 찍었으면 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처음이라 저도 ‘누굴 쳐다봐야 하나, 준경이를 봐야 하나, 라희를 봐야 하나…’ 애를 먹었어요. 감독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주셔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를 때 일부러 최대한 윤아 언니 박자에 맞춰서 하려고 노력했어요. (웃음)

NG도 꽤 났겠어요.

NG가 많이 났던 장면은 따로 있어요. 보경이가 준경이를 수건으로 때리면서 “니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아나. 맘 바뀌기 전에 퍼뜩 간다 해라” 하는 장면인데. 그게 아무 이유 없이 대사가 잘 안 돼서, (웃음) 오빠가 빨랫비누 같은 거로 세수를 계속해야 했어요. 얼굴이 엄청 뻑뻑했을 텐데. 오빠가 고생을 많이 해줬어요.

제작기 영상 보니까 키가 커서 준경 방 천장에 머리를 잘 부딪치던데.

거기 맨날 부딪쳤어요.

이외에 또 이런 의외의 고충이 있었나요.

‘6년 후’ 문구가 나오고 나서 보경이가 “정준경, 니 내복 안 입었지!” 하면서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테이크를 되게 많이 갔어요. 준경이 방에서 한 명, 제 방에서 한 명, 감독님까지 셋이 “지금”, “지금”, “지금!”, (웃음) 계속 “지금”, “지금”, “지금!” 하면서 타이밍을 딱딱딱 맞춰야 했는데 그게 잘 안되서 꽤 오래 걸렸어요.

<기적>

박정민 배우로부터 아낌없는 배려와 위로를 받았다고 했어요. 호흡이 어땠나요.

정민 오빠랑 제일 많이 찍어서 정말 친해졌어요. 제가 오디션 때부터 어려워했다는 그 양원역 장면이 오빠한테도 어려운 장면이었어요. 대사가 길기도 길고. 감독님이 처음에는 카메라가 두 대니까 한쪽에 한 대씩 놓고 한꺼번에 찍자고 하셨는데, 여건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두 대를 한쪽에 몰아 놓고 똑같은 장면을 두 번 나눠 찍어야 했어요. 보통 같으면 선배님이 먼저 찍는 게 맞는데, 오빠가 저 몰래 저부터 찍으라고 말을 해두셨더라고요. 오빠는 감정을 아끼고 있어야 했는데 저 할 때도 터뜨려줘서 본인 테이크 갈 때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동네 개 짖는 소리, 차 소리 때문에 NG도 많이 났거든요. 근데도 오빠는 너무 잘했죠. 저도 오빠를 도와주고 싶어서, 제 테이크 끝나고도 눈물을 쥐어짜려 해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오빠를 잘 못 도와줬습니다.

촬영하면서 서로 통화도 많이 했다고요.

한번은 보경이랑 준경이가 기차에서 이별하는 장면을 찍기 전에 전화가 왔어요. 오빠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땐 제가 오빠의 걱정을 덜어줘야 했어요.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오빤 잘할 거예요. 대사가 가진 힘이 좋으니까 우린 거기에 맡기기만 하면 돼요,” 하고 끊었는데. 정작, (웃음) 현장에서는 제가 더 떨었어요. 그 장면에 원래 안는 건 없었어요. 오빠 애드리브였는데. 그렇게 해주니까 어린 준경이, 강훈이랑 안았던 게 생각나면서 더 울컥하더라고요.

아. 저 정정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죠. 정민 오빠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제가 영화에서 오빠한테 하이킥을 날린 걸 애드리브라고 했더라고요. (“실제로 수경이가 제게 하이킥을 날리기도 하는데, 그건 대본에 없던 장면이었는데 받아줬어요.”(박정민)) 근데 그거 애드리브 아니었어요. 저는 딱 감독님이 지시하신 대로 했던 거예요. (웃음) 오빠 때린 게 너무 미안했어요. 애드리브 아니었습니다.

박정민 배우가 <로스쿨> 촬영장엔 무려 회오리감자도 돌렸던데요.

아, 회오리감자차. (웃음x10) 맞아요. 그게 실은 장난이었어요. 오빠한테 장난삼아 “나 회오리감자 먹고 싶어”라고 했는데 “알았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진짜로 보내주신 거예요. 깜짝 놀랐죠. 저는 오빠 촬영 현장에 놀러 간 적이 있어요. 작년에 ‘엘르’에서 프로젝트로 코드쿤스트 프로듀서 뮤비를 찍었는데, 오빠가 그 뮤비를 연출했어요. 저는 놀러 갔다가 출연까지 했죠.

<기적>

<기적>은 1988년 이야기예요. 흥미로운 레트로 소품도 많았을 것 같아요.

형광등 줄에 똑딱이가 달려있어요. 똑딱, 이렇게 해야 불이 ‘쨩’ 하고 켜지는데…

김남길 이렇게 동그랗게 생겨서 줄 연결돼 있는 거. 초록색 버튼 있어가지고 누르고 빼고 하는…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웃음) ‘내 남자의 남자’ 장면에 그걸 처음 써봤어요. 치마가 바닥에 끌려서 계속 넘어지고 정신없는 와중에 불을 켜려고 하는데, 원래 같으면 불 켜는 게 이쯤 있어야 할 게 없는 거예요. “뭐야?!” 하고 보니까 웬 똑딱거리는 게 있더라고요. 그게 기억에 남아요.

명랑 코미디와 감동 드라마를 재치있게 오가는 영화이기도 하죠. 보경도 종종 개그캐로 활약했는데. 현장에서 가장 많이 웃고 울었던 장면을 꼽는다면요?

준경이랑 라희가 라희 집에 가서 “뽀뽀해 봤냐”, “함 해보까!” 하는 장면이 있어요.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웃겨서 계속 생각나요. (웃음) 영화관에서도 제일 많이 웃었던 장면이에요.

그 장면에 보경이 등장하진 않는데, 현장에 함께했나요?

아니요. 촬영장에 있던 건 아닌데 그 장면이 스태프 사이에서는 유명했어요. 준경, 라희의 애정신을 찍는 날이면 스태프 언니들이 오늘 그거 찍는 날이라면서 카톡으로 알려줬거든요. (웃음) 그럼 저는 괜히 “오빠, 오늘 찍는다면서요?” 하면서 정민 오빠를 놀렸어요.

슬펐던 장면은?

기차 이별 장면이요. “누나, 내 갔다 오께.” 보경이가 기다리던 말이잖아요. 오빠가 그 말을 할 때 마음에서 뭔가 터지는 것 같았어요. 연기할 때도, 영화로 볼 때도.

지난 작품을 잠시 돌아볼게요. 당신에게 <차이나타운>은 배우를 해야겠다는 확실한 믿음을 준 작품이라고요. 시작점이자 터닝 포인트가 됐던 작품이 <차이나타운>이었다면, 이수경이란 배우를 무르익게 한 작품은 뭘까요.

무르익었다기보단, 앞으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건 <기적>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장르, 재밌는 시나리오, 하고 싶은 캐릭터. 이렇게 삼박자가 맞춰지기 쉽지 않잖아요. <기적>은 그런 작품이었어요. 제작진, 배우진도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흡이 좋았어요.

<기적> 다음으로는요?

<로스쿨>이요. 그렇게 대사 연습을 많이 한 적이 없어요. 대사도 많고 말도 빨라서.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걸 어려워해 본 적이 없는데 <로스쿨>은 좀 어려웠어요. 캐릭터의 성격에서 벗어나는 게 어려웠다기보단… 새로 대본이 들어오면 보통 한번 소리 내서 읽어보는데, <로스쿨> 끝나고는 뭘 해도 솔B 톤이 되는 거예요. (웃음) 딱딱하게 말하게 되고. 그 톤을 벗어나기가 힘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