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고개를 숙이다가도 ‘그랜절’을 떠올리면, 어쩐지 이 설움을 아는 게 나 하나만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
빨아도 빨아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종영한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장면을 남기는 드라마들이 있다. 내겐 tvN <쌉니다 천리마마트>(2019)가 그렇다. 김규삼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 삼은 이 드라마에서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았던 장면은, 천리마마트 점장 문석구(이동휘)가 매장을 찾아온 국회의원 앞에서 궁극의 예를 갖춘 절 ‘그랜절’(두 손을 공손히 모아 이마 위에 대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물구나무를 서는 자세)을 올리는 장면이었다. 원작에서는 가볍게 한 컷으로 처리되었던 문석구의 그랜절은, 드라마 판에서는 비장한 각오를 다진 문석구가 슬로우모션으로 절을 하는 장면으로 확대됐다. 모두의 경악 속에 그랜절을 올리는 문석구의 표정은 한껏 진지하면서도 서글프다. 왜,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원작에서나 드라마에서나, 문석구는 늘 마음 놓고 큰소리 하나 치지 못하는 소심한 사내다. 젊은 나이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점장이 된 비결은, 그의 전임자들이 줄줄이 사표를 쓰고 나갔기 때문이다. 대마그룹이 비자금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름한 마트,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도록 방치해 둔 이 천리마마트의 점장이 되었다가는, 자칫 그룹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누명을 혼자 뒤집어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소시민인 문석구는 차마 천리마마트를 떠나지 못한다. 자신이 번듯한 대기업 정직원이 되어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을 지켜줄 무기로 활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마트와 얽힌 비리의 증거들을 모아 챙겨 두는 주도면밀한 남자이지만, 동시에 마트에 남아 있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도리도 없어서 사장 정복동(김병철)의 기행을 매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도망치고 싶어도 차마 도망치지 못하는.
그러니 지역구 국회의원의 방문에 사장 정복동을 대신해 인사를 올리며 그랜절을 선보이는 건 무사히 살아남고는 싶었던 그의 보신주의였을 것이다. 절대로 흠 잡히면 안 된다고, 툭하면 “봉황시의 흉물 천리마마트를 이전시키겠다”를 공약이랍시고 내세우는 국회의원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간절히 생각했겠지. 일단은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 오늘 퇴근하고 내일 출근할 직장이 남아있을 것 아닌가. 자신의 존엄과 체면을 모두 내던진 채 마트 한복판에서 묘기에 가까운 그랜절을 선보이는 문석구의 비장함은, 그걸 연기하는 이동휘의 서글픈 얼굴은 그런 것이었으리라. 처음 봤을 때에는 원작에 비해 과도하게 감상적으로 연출된 게 아닌가 싶어서 아쉬웠던 <쌉니다 천리마마트>의 그랜절 장면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곤 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랜서 글쟁이에게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무조건 상대를 달래야 하는 상황이 있으면 뭐 얼마나 있겠는가 싶겠지만, 살다 보면 당장의 생존을 위해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무조건 빌어야 하는 순간들이 생기는 법이다. 비록 그랜절 같은 궁극의 예를 갖추지는 못하지만, 오늘 무사히 잠들고 내일 일어나 또 싸워 보기 위해 일단은 고개를 조아리며 서글픔을 속으로 삼켜야 하는 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비장한 표정으로 그랜절을 선보이던 문석구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아, 이런 거였구나. 그래서 원작에선 한 컷으로 지나갔던 순간을 드라마는 그토록 긴 슬로우모션으로 그려냈던 거구나. 연신 고개를 숙이다가도 그랜절을 떠올리면, 어쩐지 이 설움을 아는 게 나 하나만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
그런데 정작 그랜절로 깊은 인상을 남긴 문석구는, 결말에 가선 절은커녕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권위와 맞선다.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마트의 내일을 지키기 위해, 모아둔 비리 자료들을 가지고 그룹의 회장과 직접 맞서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문석구는 안다. 정복동 사장이 덜컥 채용한 천리마마트의 직원들은 대부분 다 이상하고 나사 풀린 인간들이지만, 그 이상하고 나사 풀린 직원들 모두 자기처럼 무사히 퇴근하고 또 내일 출근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어느새 진심으로 이 이상한 마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 문석구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마트의 내일을 위해 두렵지만 고개를 꼿꼿이 세운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상대였을 대마그룹 회장 김대마(이순재) 앞에서, 마트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내부고발도 불사하겠다고 말하며. 사실은 가장 크게 고개를 숙이고 그랜절을 올리며 안위를 찾고 싶었을 상대였을 텐데도 말이다.
다시, <쌉니다 천리마마트>를 생각한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 일단 고개를 숙이고 그랜절을 해야 하는 순간과, 가장 어려운 상대 앞에서도 고개를 꺾지 않고 모든 걸 걸고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을 잘 구분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순간마다 문석구의 그랜절을 떠올리며 외롭지 않았던 것처럼, 언젠가 용기를 내서 고개를 들어야 하는 순간 꼿꼿했던 문석구의 목을 떠올리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