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1991)은 누구의 영화인가. 단 16분 동안 등장한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 아니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며 버팔로 빌(테드 레빈)이라는 끔찍한 살인마를 추적하는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탈링(조디 포스터).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렉터를 더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는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스탈링 요원을 향해, 실제로는 카메라, 즉 관객과 시선을 마주한 괴물이다. <양들의 침묵> 이후 10년이 흐른 2001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한니발>을 통해 안소니 홉킨스의 렉터를 스크린에 부활시켰다. 이때 줄리안 무어가 스탈링 요원을 연기했다. 2013년에는 매즈 미켈슨이 출연한 TV 시리즈 <한니발>이 등장했다. 2021년 드디어 스탈링 요원이 주인공으로 나선 TV시리즈 <클라리스>가 공개됐다. 30년 전 <양들의 침묵> 속 버팔로 빌 사건 이후 1년이 지난 시간을 다룬다.
더 잔인한 연쇄 살인마의 등장?
<클라리스>는 <양들의 침묵>의 속편이다. 속편이 지닌 운명은 가혹하다. 전작보다 좋은 반응을 얻기 쉽지 않다. 영화사에서 전작보다 뛰어난 평가를 얻은 속편은 손에 꼽는다. 속편은 전작의 성취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무게감을 이겨내고 넘어서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하게 된다. 액션 영화라면 더 큰 스펙터클을, SF 영화라면 더 확장된 세계관을, 로맨스 영화라면 더 매력적인 새 캐릭터를 투입하는 식이다. 범죄 스릴러 영화라는 어떨까. 더 잔인한 연쇄살인마를 투입하면 된다.
덩치가 큰 여성들을 납치한 뒤, 피부를 벗겨낸 버팔로 빌보다 더 잔혹한 살인마가 <클라리스>에 등장할까. <클라리스>의 제작진은 이 부분에서 묘안을 고안했다. 첫 에피소드를 보면 <클라리스>의 뛰어난 속편 스토리 전략을 알 수 있다. 스탈링(레바카 브리즈)은 법무부 장관 루스 마틴(제인 앳킨슨)의 명령으로 연쇄 살인으로 의심되는 사건 현장에 투입된다. 참고로 마틴 장관은 <양들의 침묵>에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었고, 그녀의 딸 캐서린(마니 카펜터)은 버팔로 빌의 자택에서 스탈링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법무부 장관의 전속 수사팀인 강력범죄 체포 프로그램 전담반, 바이캡(VICAP, Violent Crime Apprehension Program) 특수요원에 임명된 스탈링. 총에 맞고, 칼에 찔리고, 심지어 이빨로 깨문 흔적이 있는 끔찍한 범죄에 희생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 강가에서 그는 동료들과 처음 만난다.
팀을 이끄는 반장 폴 크렌들러(마이클 쿠드리츠) 및 베테랑 남자 동료들에게 스탈링은 눈엣가시다. 새파란 여성 신임 요원이 스타가 됐기 때문이다. 반면, 언론은 스탈링의 입에 주목한다. 스탈링은 버팔로 빌 사건 이후 유명세(有名稅)를 치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려 기자들 앞에 선 스탈링은 폭탄 선언을 한다. 사건을 조속히 해결하고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려고 한 마틴 장관과 그를 따르는 크렌들러 반장은 당혹스럽다. 관객마다 당황시킨 스탈링의 발언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 새로운 국면이 <클라리스>를 전작 <양들의 침묵>의 무게를 뛰어넘는 범죄 스릴러 속편으로 만든다.
레베카 브리즈, 새로운 스탈링
속편의 또 다른 숙명.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작의 무게를 뛰어넘는 새로운 스토리가 필요한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배우다. 속편의 배우들은 전작의 배우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사실 속편에 전작의 배우가 그대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의 속편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클라리스>의 경우는 다르다. 게다가 <클라리스>는 렉터 박사가 아닌 스탈링 요원을 전면에 내세웠다. 조디 포스터, 줄리안 무어 같은 대배우를 기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결책은 괴물 같은 신인을 발굴하는 것 말고는 없다. 레베카 브리즈가 그 중책을 맡았다. 브리즈가 괴물은 맞는 것 같지만 신인은 아니다. 1987년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난 브리즈는 <오리지널스>(2015~2016), <프리티 리틀 라이어스>(2015~2017), <홈 앤 어웨이>(2008~2012) 등 수많은 TV 시리즈에 출연했다. 다시 말해 연기 내공이 상당한 배우라고 말할 수 있다. 브리즈는 시리즈 내내 트라우마와 싸우는 스탈링의 내면을 충실히 재현한다. 이 부분에서는 전작의 조디 포스터에 비해 더 빼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뛰어난 연기력에 더해 브리즈가 스탈링 요원 캐릭터에 어울릴 수 있었던 건 <양들의 침묵> 속 젊은 조디 포스터와 묘하게 닮아 보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클라리스>의 네 번째 에피소드의 도입부에서 스탈링이 FBI 로고가 새겨진 회색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양들의 침묵>의 첫 장면에서 조디 포스터가 연기한 스탈링과 똑같은 복장이다. 두 배우는 은근히 닯았다. 말투까지 비슷해 보인다. 그럼에도 단지 닮았다는 것만으로는 브리즈가 창조한 2021년 버전의 스탈링 요원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브리즈의 재능과 내공으로 <클라리스>는 배우 부분에서 생기는 속편의 숙명을 견뎌낸다.
<양들의 침묵>과의 연결고리
속편이라는 측면에서 <클라리스>가 택한 새로운 스토리 전략과 주인공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 대해 알아봤다. 두 가지 모두 속편이 감내해야 할 무게에 대한 부분이다. 반대로 <클라리스>라는 속편이 지닌 이점은 무엇일까. 전작 <양들의 침묵>의 성취가 <클라리스>에 남긴 유산은 없을까. 속편의 성공이 어렵다고 서두에 언급했지만 뛰어난 전작의 속편은 크게 실패하지도 않는 법이다. “의리로 본다”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전작을 그만큼 아끼기 때문에 속편도 본다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클라리스>는 <양들의 침묵>의 팬이라면 꼭 봐야 할 작품이다.
<클라리스>는 영리하게 전작의 유산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활용한다. 조디 포스터와 닮아 보이는 배우 레베카 브리즈 이외에도 수많은 요소가 숨어 있다. 대표적으로 시리즈 전체에 등장하는 나방의 이미지가 그렇다. <클라리스>가 스탈링의 정신 상담에서 시작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비록 렉터 박사 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가 <클라리스>에 없지만 스탈링은 계속 정신 상담을 받고 이 과정에서 <양들의 침묵>과 연결고리를 찾는다. 버팔로 빌, 그가 키우던 강아지 프레셔스, 빌의 집 우물에 갇혀 있던 캐서린, 스탈링의 아버지 등이 등장한다. 특히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캐서린의 캐릭터가 <클라리스>에서 중요한 비중을 맡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심지어 그는 버팔로 빌의 어머니를 찾아가기도 한다.
또한 아델리아 매프(데빈 A. 타일러) 캐릭터 역시 전작에 이어 스탈링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매프 캐릭터는 FBI 내에서 일어나는 흑인 인종 차별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밖에 줄리아라는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 캐릭터도 원작의 팬이라면 눈에 띌 것이다. 또 그가 남성일 때의 이름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밖에 스탈링의 심리 상담 중 일종의 최면 요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객의 스탈링의 과거 기억을 엿보게 된다. 바람에 흔들리며 돌아가는 나방 혹은 나비 그림의 모빌은 <양들의 침묵>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것과 똑같다. 원작 팬이라면 <클라리스>의 숨어 있는 <양들의 침묵>과의 연결고리를 찾기에 바쁠 것이다.
벽돌 휴대폰과 삐삐
3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속편 <클라리스>는 새로운 스토리 전략, 새로운 배우를 통해 전작 <양들의 침묵>의 무게를 견뎌냈다. 또한 전작과의 연결고리를 곳곳에 심어두고 있어서 오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1993년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바이캡 팀원들이 무선호출기, 삐삐를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 ‘벽돌’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모습도 아재 팬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게 요소다. 그렇다고 삐삐로 ‘1004’ 같은 메시지를 보냈던 아재들만 이 시리즈를 재미가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양들의 침묵>을 먼저 보고 이 시리즈를 본다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클라리스>의 세계에 들어서려면 왓챠에서 <양들의 침묵>을 먼저 보기를 추천한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