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만 로맨스>는 7년째 신작을 내지 못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현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킨 인물들의 다채로운 감정을 다룬다. 무진성이 연기한 작가 지망생 유진은 현의 자극제 같은 존재다. 글을 쓰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지닌 유진으로부터 신선한 영감을 얻은 현은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펜을 잡는다. 상대를 통해 활력을 얻은 건 유진 역시 마찬가지다. 잠재된 능력을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리던 유진은 존경하던 스승 현을 만나 날개를 달고 작가로서 제 역량을 뽐내기 시작한다.

동경하던 선배와 함께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유진뿐만이 아니다. 유진을 연기한 배우 무진성 역시 대선배 류승룡과 함께하며 한층 성숙해진 제 모습을 발견했다. <밤을 걷는 선비> 등의 드라마에서 신스틸러로 존재감을 알린 후, 몇 년의 공백기를 마주한 그는 슬럼프를 겪고 있던 도중 <장르만 로맨스> 속 유진을 만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자신과 똑 닮은 캐릭터를 만나 배우 인생의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그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장르만 로맨스>가 스크린 데뷔작이니 이후 이뤄진 모든 프로모션 행사도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을 터. 살짝 경직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한 무진성은 유진과 같이 차분하고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속내를 들려주었다.


2019년 촬영 후 개봉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마음으로 <장르만 로맨스>의 개봉을 기다렸나.

크랭크업 후 개봉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무렵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됐다. 개봉일이 구체적으로 정해졌다면 1년이든, 2년이든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렸을 텐데. 기약 없는 기다림이 꽤 힘들더라.(웃음) 개봉을 기다리며 후에 관객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하고 싶어 자기 계발에 집중했고, 복싱도 시작했다. 운동을 하니 정신이 건강해지더라. 삶에 활력이 생기기도 하고. 다른 역할을 위해 많은 경험을 쌓고 싶어 무언가를 많이 배우기도 했다. 여행도 갔고.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냈다.

<장르만 로맨스>는 무진성 배우 필모그래피의 첫 영화란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어떻게 유진을 만나게 됐나.

정말 힘든 순간에 기회가 온다고 하던가. 많은 일이 겹쳐 슬럼프를 겪고 있던 시기에 한줄기 빛처럼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힘든 시기였기에 오히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각오로 오디션에 임했다. 그런 부분을 긍정적으로 봐주셨던 것 같다. 가능성을 봐주셨다.

<장르만 로맨스>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대본이 너무 재미있어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대본을 덮은 후 웃음만 남는 게 아니라, 묵직한 메시지가 느껴지더라. 내가 연기한 캐릭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유진이라는 인물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어떤 배우라도 이 역할에 욕심을 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유진을 연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유진의 어떤 면이 매력적이었나.

유진의 대사 중 ‘바라는 게 없는데 어떻게 상처를 받아요’라는 대사가 있다. 당시 인간관계에 있어 상처를 많이 받고 슬럼프를 겪고 있던 시기였는데, 유진의 대사를 보며 정말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들었다.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더라.

배우 출신 조은지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보통의 현장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 고민과 문제가 생겼을 때, 표현하지 않아도 감독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더라. 그런 부분이 정말 감사했다. 배우의 입장에서 고민을 들어주시고, 연기적으로 잘 안 풀릴 때 역시 감독님이 배우의 입장에 서서 직설적으로 많은 설명을 해주셨다. 감독님이시기도 하지만 선배님이시기도 하고, 그래서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류승룡 배우와의 호흡에 대해 이미 여러 자리에서 존경과 설렘을 표현해온 바 있다. 류승룡 배우 역시 현장에서 많은 조언을 건네주었을 것 같다.

워낙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항상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을 해주셨다. 연기뿐만 아니라 삶을 살면서, 모든 일엔 항상 기본이 중요한 것 같다. <장르만 로맨스> 촬영 중 긴장을 많이 했다. 스크린 데뷔작이라는 점, 상대 배우님이 너무 존경해오던 류승룡 배우라는 중압감과 압박감에 치여 더 잘하려다 오버 페이스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선배님이 기본에 충실해야 된다는 걸 일깨워주셨다.

수시로 몰려드는 긴장감, 압박감을 컨트롤하며 촬영에 임했을 텐데, 이를 어떻게 해소해갔나.

류승룡 선배님께서 유연하게 분위기를 잘 이끌어주셨다. 예측할 수 없는 애드리브가 막 튀어나왔고, 그럴 때마다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아져서 하하 호호 웃으며 촬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극 초반 유진과 현이 고량주를 마시는 장면이 있다. 현이 만취 상태의 유진을 소파에 눕히면서 그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데, 이는 대본에 없었던 장면이다. 아프고 놀라 움찔한 극 중 유진의 반응은 정말 리얼한 내 반응이었다.(웃음)

현과 유진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했나.

<장르만 로맨스>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다. 7년째 슬럼프를 겪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현이 쓴 소설 <빈 공간>이 작가 지망생 유진의 인생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 현의 책이 삶의 희망이 되고, 좋은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자극제가 되는 거다. 유진에게 현은 그런 의미다.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 그에 대한 존경과 동경을 아우르는 마음으로 접근하며 캐릭터를 구축해갔다.

오정세 배우는 현과 라이벌 관계에 놓인 인물로 등장한다. 오정세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오정세 선배님은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선배님만의 스타일대로 예측불허의 연기들을 유연하게 보여주신다. ‘아이디어 저장 창고’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아이디어들을 감독님과 함께 나누시더라. 제게도 이런 방법, 저런 방법 많은 아이디어를 공유해 주셨고. 그런 부분이 인상 깊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유진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나. SNS에 업로드된 글들이 꽤 묵직하더라.

평소 좋은 글귀를 찾아보는 편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기보단, 영화 혹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극 중 인물들에 이입해 보기도 하고, 후에 따라붙는 생각들을 정리한다. 그런 글들을 가끔 SNS에 업로드한다. 누구나 다 각자 상황만 다르지,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사는 것 같더라.

2013년 <투윅스>로 데뷔한 후 <밤을 걷는 선비> <아름다운 당신>에 출연한 2015년까지 쉴 새 없이 달리다 공백기를 맞았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작품 활동을 쉬었는데, 그 당시 본명 여의주에서 무진성으로 이름을 바꾼 건가.

맞다.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하다가 ‘다시 시작하는 의미로 이름을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는 지인분의 권유로 이름을 바꿨다. 진성은 ‘세상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별이 되어라’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이 이름에 좋은 에너지가 있는지, 이후 웹드라마도 다시 시작했고 조금씩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는 캐릭터들을 맡기 시작했다.

벌써 8년 차 배우다. 긴 시간 동안 연기만을 바라봐왔는데, 그 시작점이 궁금해진다. 어떻게 배우를 꿈꾸게 됐나.

초등학교 땐 전교 회장, 중학교 땐 전교 부회장을 맡았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좋아하던 학생이었고, 변호사, 검사, 호텔 경영 등의 꿈을 품고 있었다. 당시 짝꿍은 연극과를 지망하는 친구였다. 어느 날 그 친구를 따라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갔다. TV나 영화를 통해서만 배우들을 접하다가, 무대 앞에서 배우들의 살아 숨 쉬는 연기를 보니 낯설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더라. 연극이 끝난 후 커튼콜이 진행될 때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많은 관객이 환희에 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의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직업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막연하게 시작했다. 무작정 부모님에게 연기를 하겠다고 이야기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다. (웃음)

부모님께선 바로 허락하셨나.

부모님께서 반대하시긴 했는데, 제가 말씀드렸다. 연기 학원 한 달만 다니고 재능이 없으면 바로 다시 공부에 몰입하겠다고. 그렇게 한 달이 두 달이 됐고, 두 달이 석 달이 됐다. 당시 연기 학원 선생님의 공이 크셨다. 가능성을 알아봐 주셨던 것 같다. 부모님도 설득시켜주시고 그랬다.

가족분들이 영화를 보면 많이 좋아하실 것 같다.

아직 안 보셨는데… 많이 우실 것 같기도 하다.

가족 이야기를 하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제가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 가족들이 영화를 봐야 (이 상황이) 조금 더 실감이 날 것 같다.

커튼콜을 보며 배우를 꿈꿨는데, 후에 연극에 도전할 생각도 있나.

너무 하고 싶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출연하고 싶은 연극 작품도 많고, 연극 제작도 하고 싶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 좋은 공연을 올리고 싶고, 이에 대한 계획도 있다. 늘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하고. 가슴이 뛴다고 할까. 어떤 장르든 마음이 간다면 무엇이든 도전해 보고 싶다.

극 중 유진에게 <아비정전>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 영화다. 배우 무진성의 인생 영화를 소개해 준다면?

너무 많아서 한 편만 꼽기 어려운데…. 최근에 다시 <라라랜드>를 봤는데, 너무 내 이야기 같더라. 배우 지망생이 주인공인데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기회가 찾아오고, 그 기회를 통해 유명한 배우가 된다. <라라랜드>를 처음 봤을 땐 그런 꿈만 꿨다. 어떻게 버티고 버티다 보면 그런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고. <라라랜드>처럼 정말 그 기회가 찾아와서 영화도 촬영하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있다.

떨어지고 버티던 시기. <장르만 로맨스>를 만나기 전 슬럼프를 겪었단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시절을 어떻게 통과했나.

슬럼프가 온 순간을 늘 이겨내고 극복했다면 거짓말인 것 같다. 극복을 못했던 때도 있었고, 고민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던 시절도 있었다. 30대 중반을 앞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많이 했고, 다른 일을 해봐야겠단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다. 하지만 연기 말고 하고 싶은 게 없더라. 너무 간절하고 소중해서 놓지 못할….

또 눈가가 촉촉해졌다.(웃음) 그렇게 슬럼프를 견뎌냈고, 결국 <장르만 로맨스>를 만났다.

(잠시 생각한 뒤) 뭔가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장르만 로맨스>에 캐스팅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 자신에게 집중했고, 나를 다시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지냈다. <라라랜드>의 미아(엠마 스톤)도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관계자의 눈에 띄어 유명 배우가 된다. <장르만 로맨스>의 유진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자, 있는 그대로의 무진성을 보여주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무진성 배우에게 있어 유진은 어떤 인물로 남게 될까.

유진, 그리고 <장르만 로맨스>를 보면 슬럼프를 겪었던 그 시절이 계속 생각날 것 같다. 당시 유진의 감정이 영화를 촬영하기 직전 내 감정과 비슷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유진은 존경해왔던 선배의 글을 보며 슬럼프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선다. 현실의 나 역시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류승룡 선배님의 작품을 보며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선배님을 통해 정말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간다면 인정받는 순간이 온다는 확신을 얻기도 했고. 포기하지 않고 꿈을 키우니 정말 선배님과 작품을 함께했고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 작품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대선배들과 함께 포스터에 나란히 얼굴을 비추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지금 이 시점에서 배우로서 다짐이나 목표가 있다면?

‘간절히 그리고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언급해 주시니 그 말이 떠오르더라. 개인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정말 좋아한다.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출연작마다 배우로서 성장한 과정이 차곡차곡 담겨있지 않나. 나 역시 한 살 한 살, 조금씩 성숙해지는 모습을 작품에 녹여내는 배우가 되고 싶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

사진 스튜디오앤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