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이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다시 극장에 걸렸다. 자타공인 최민식의 최고 연기가 담겼다고 추앙받는 <파이란>에 관한 사실들을 정리했다.
**<철도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 작가 아사다 지로의 단편소설 <러브 레터>가 <파이란>의 원작이다. 한국에도 번역된 소설집엔 첫 작품이 <철도원>, 바로 다음으로 <러브 레터>가 배치돼 있다. 불법 포르노 비디오를 팔다가 열흘간 감방살이 한 주인공이 호적상 부인 파이란의 죽음을 수습하러 다닌다는 골자는 크게 다르지 않다.
** 파이란(장백지)이 처음 한국에 도착해 입국 수속을 밟는 첫 장면은 속초세관에서 촬영됐다. 대규모 찬조 출연자들을 통제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파이란>은 흑백으로 시작해 흑백으로 끝난다.
** 그로부터 1년 후 강재(최민식)가 처음 등장한다. 오락실에서 고개를 떨군 채 졸다가 어느 학생이 깨우니 오히려 그를 욕하고 때리는 인간 말종이다. 최민식은 강재의 꾀죄죄한 행색을 위해 3일간 머리를 감지 않았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오락실 신이 가장 먼저 찍은 장면인데, 촬영 첫날이라 연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아 강재한테 맞는 역할을 한 배우를 많이 때리게 돼서 미안하다고.
** 2000년 12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찍었다. 영화 속 계절은 한겨울이 아니라 촬영이 그야말로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너무 추운 나머지 야외 촬영이 여러 차례 미뤄졌는데, 최민식은 몸에 랩을 둘러서라도 찍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 영화 속 비디오 가게는 섭외한 곳이 아닌 직접 만든 세트였다. 실제 비디오 가게인지 알고 사람들이 찾아와 비디오를 빌려갔다.
** 경수(공형진)는 강재에게 차범근이 감독인지도 모른다며 무시당하고 이상한 자세를 취하곤 “형 그럼 얘 알어? 쇼트트랙. 배동성”이라 말한다. 김동성을 배동성이라고 잘못 말한 건데, 각본상 의도가 아니라 공형진이 대사를 틀린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경수와 잘 어울려서 그냥 넘어갔다.
** 강재가 어릴 적부터 신세지던 슈퍼마켓에 깽판 쳐놓고 나서 똘마니(지대한)에게 무시당하고 머리에 연탄을 던져 길 한복판에서 육탄전을 벌이는 걸 리허설 할 때 동네 주민이 실제 싸움인지 알고 말리러 왔다. 최민식은 그때 촬영이 진행됐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 했다.
<올드보이>
** 영화 내내 선배인 강재와 각을 세우던 후배 똘마니1 역의 지대한은 2년 뒤 영화 <올드보이>(2003)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오대수의 친구 노주환 역을 맡았다.
** 나이트클럽에서 용식(손병호)과 강재가 술 마시는 신은 영업시간이 촉박해 급하게 찍었다. 룸 바깥에선 심수봉의 노래 ‘미워요’를 연주하는 색소폰 소리가 들리는데, 저작권 허가가 나지 않아 색소폰 연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고, 섭외된 연주자 김원용은 실제 심수봉의 원곡에서도 색소폰을 연주한 인물이었다. 의도가 아닌, 연주 녹음할 때 비로소 알게 된 사실.
** 영화가 시작하고 35분 즈음부터 처음 음악이 나온다. 이재진 음악감독은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강재에게 음악이 어울리지 판단해, 상대편 건달을 죽인 용식 대신 감옥에 가기로 결정하고 용식에게 전화 하는 신부터 음악을 배치했다. 기억에 남는 멜로디가 없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인천이라는 척박한 땅엔 음악이 기본적으로 사치스럽다는 생각해 최대한 절제하려고 했다.
** 한국영화는 처음인 장백지와의 촬영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소통이 어렵고, 홍콩영화 특유의 오버스러운 연기 톤과도 잘 안 맞았다. 송해성 감독은 인위적인 느낌을 배제하기 위해 롱숏을 지향했는데, 장백지는 홍콩 측에 연락해 클로즈업도 없이 멀리서만 찍는다고 항의를 하기도 했다.
** 직업소개소 신은 전체를 다시 찍었다. 장백지가 너무 이쁘게만 보였기 때문이다. 묶었던 머리를 푸는 설정도 재촬영 때 추가됐다. 강재가 결혼 선물이라고 준 새빨간 스카프를 경수가 걸어주는데, 장백지는 사주에 빨간색이 죽을 운을 불러온다고 해서 그걸 꺼려했다.
** 위험을 직감한 파이란이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하는 연기를 하는 강릉 술집 시퀀스를 찍을 때 촬영이 지연돼 장백지에게 오버 차지를 지불했다. 계약 상 하루 최대 12시간 촬영에, 초과 시 시간당 900만원을 지급하기로 돼 있었다.
** 강릉 술집 매니저를 연기한 김해곤은 송해성 감독, 안상훈 프로듀서와 함께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썼다. 송해성의 데뷔작 <카라>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무적자>(2010)와 <고령화 가족>(2013)에도 각본과 조연으로 참여해 송해성과의 연을 이어갔다.
** 술집에서 쫓겨난 파이란이 하필 세탁소에서 일하게 된다는 설정은 강재를 세탁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세탁소에 온 다음날 많은 양의 빨래를 혼자 해내자 주인 할머니(김지영)가 "야가 여 인간 세탁기네 인간 세탁기라’ 하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 파이란이 강재에게 보내는 편지는 원래 자막을 올리는 방식으로만 처리하려고 했는데, 감정을 해친다고 판단해 <파이란>을 마치고 일본에서 촬영 중이었던 장백지를 찾아가 편지 목소리를 따로 녹음을 했다. 한국말이 유창하지 않아 “친절합니다”의 경우 친절, 합, 니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따로 녹음해 이어붙였다.
** 감독은 파이란이 한국말을 공부하다가 “보고 싶습니다”라 말한 다음에 액자 속 강재의 증명사진을 보는 진행이 영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장백지가 고개를 돌릴 때의 느낌이 좋아서 오케이를 외쳤다.
** 한밤 중에 자전거를 타고 와 강재에게 편지를 보내는 신. 술에 취한 동네 주민이 차를 타고 장백지를 위협하는 일이 벌어졌다. 프로듀서가 사과하니 장백지는 홍콩엔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 파이란이 앓는 병은 바이러스성 급성 간염이다. 그 병에 걸리면 단기간에 피를 토하고 곧 죽을 수 있다는 조사를 거친 설정이다.
** 처음 피를 토한 날 밤 파이란이 잠에 들지 못하는 신. 괴로우면 무엇을 할 거냐고 물어보니 장백지가 양을 세겠다고
대답해서 그 말을 고스란히 따랐다. 영화를 본 최민식의 아내가 양 세는 대사를 똑같이 따라했다고.
** 강원도에 온 강재와 경수가 파출소 앞에서 머뭇대는 장면은 고성의 송지호해수욕장 근처에서 찍었다. 내부는 감독의 요구로 인제에 있는 파출소에서 찍었다. 불손하게 대하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는 건 11번이나 찍었다.
** 파이란이 병에 걸려 직업소개소에 찾아오는 장면은 장백지가 강원도에 온 초기에 찍었다. 감독은 공간에 충분히 동화된 후에 찍으면 좋았겠다며 아쉬워 했다. “제가 많이 아픕니다” 대사도 한국어였는데 녹음기사가 도저히 쓸 수 없다고 판단해 중국어로 대체했다.
** 강재를 보러 인천에 온 파이란이 비디오 가게 앞에서 연행되는 강재를 스쳐지나가는 신을 찍을 때 실제로 장백지가 많이 아팠다. 구토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는데, 촬영현장을 언론사에 공개하는 날이라 일정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 강재와 파이란은 경찰에게 연행될 때 딱 한번 마주친다. 파이란은 강재를 알아보고, 강재는 파이란을 못 알아볼 뿐.
** 파이란의 빈소에 촛불을 붙여주고 그 앞을 서성이는 건 최민식의 즉흥 아이디어였다. 뒷모습으로나마 죽어서라도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을 만들고 싶었다.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의 장례식장의 뒷모습을 생각하면서 흔쾌히 동의했다.
** 영안실에 등장하는 간호사는 김민희 의상감독이 연기했다. 출연료는 3만원. 본인이 하겠다고 의지를 보여줬다고. 송해성의 또 다른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에서도 의상을 담당했다.
** 하루종일 괴로워하던 강재가 경수에게 시비를 걸고 결국 다른 손님들과 싸우게 되는 술집 신은 4분 30초가 넘는 롱테이크로 찍혔다. 워낙 분량이 길어서 필름이 먼저 끊기는 바람에 NG가 나기도 했다. 총 5번 찍었다.
** <파이란>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강재가 오열하는 신. 최민식은 아침부터 대진항에 혼자 나가 있었다. 스탭들이 모인 후에도 100m 떨어진 데서 지켜보고 있다가 촬영했다. “격투 신보다 더 힘든” 신을 다섯 번 촬영했다. 눈물 흘리는 걸 더 길게 찍었는데, 슬픔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기 위해 편집 과정에서 과감히 짧게 잘랐다.
** 2001년 개봉 당시 서울 관객 22만 명을 동원했다. 같은 주에 개봉한 영화들이 그다지 강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먼저 개봉한 <친구>의 흥행 열풍에 밀려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 최민식은 2001년 <파이란>과 2003년 <올드보이>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때 함께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는 모두 장진영(<소름>과 <싱글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