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빠진 로맨스>

로맨스로 물든 극장가. 남녀 간 관계에 대한 설렘과 달콤함을 맛보기도 전에 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들로 귀를 트이게 만들 작품이 하나 있다. 김보라, 이옥섭에 이어 독립영화계 여성 감독 계보를 잇는 정가영 감독의 상업 장편영화 데뷔작 <연애 빠진 로맨스>다. 자신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연애에 지친 여자, 연애에 있어 호구인 한 남자가 각자의 목적을 위해 데이팅 어플로 만나게 되며 일어나는 일을 그린 <연애 빠진 로맨스>는 그간 독립영화계에서 보여준 정가영 감독만의 당돌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작품이다. ‘여자 홍상수’라 불리는 정가영의 예리한 고찰과 위트 있는 대사들이 구축해낸 세계는 어떠한지. 알고 가면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정가영 감독의 영화 8편을 선정해봤다.


<혀의 미래> │단편, 5min

정가영 감독의 초기작 <혀의 미래>.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제4회 olleh 국제스마트폰영화제에 출품한 <혀의 미래>는 정가영 감독이 그려낼 작품론을 5분에 달하는 초단편 분량의 러닝타임에 응축시켜낸 단편영화다. 첫 키스를 앞둔 두 남녀가 쑥스러움과 긴장감을 안고 벤치에 앉는다. 곧 입술이 닿기 직전, 여자(정가영)가 부끄러움에 첫 키스를 잠시 유보한다. 재밌는 얘기로 긴장감을 풀려 하는 두 사람. 남자(이승찬)는 자신의 아버지가 곧 재혼을 앞두고 있다는 가족사를 고백한다. 여자 역시 재밌는 우연이라며 어머니가 재혼을 앞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예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첫 키스의 긴장감은 순식간에 기묘한 긴장감으로 뒤바뀐다. 두 사람은 첫 키스에 성공해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내가 어때섷ㅎㅎ>│단편, 13min

정가영 감독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성에 대한 거리낌이 없다. 누군가는 들으면 낯 뜨거워할 대사도 정가영의 입을 통해 전달되면 그 솔직함에 무릎을 치며 웃을 뿐. 정가영은 그렇게 당돌하게, 그리고 때론 찌질한 모습으로 여성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 만든다. <내가 어때섷ㅎㅎ> 가영(정가영)이 그렇다. 친구들과 놀러 온 자리, 가영은 짧은 치마를 입고 혼자 방에 들어간 수찬(백수장)에게 작정하고 들이댄다. 수찬에겐 여자친구가 있고, 그 여자친구는 가영의 친구다. 수찬은 가영을 난감해하며 단호히 밀어내지만, 쉽게 물러날 가영이 아니다. 결국 혼자 남게 된 가영과 밝혀지는 비밀. 생각지도 못하게 가영은 스스로를 할퀴고 외로워한다.


<처음>│단편, 10min

정가영 작품의 매력? 대사를 통해 숨 쉬듯 쏟아지는 플러팅(Flirting)이다. 때론 작위적이라 헛웃음이 나지만, 자연스럽게 그러나 예리하게 상대방을 찌르는 플러팅이 정가영의 진정한 무기다. 후자는 단편영화 <처음>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가영(정가영)과 친구(김은선). 갑자기 한 남자(신규일)가 방문을 열고 둘에게 다가온다. 자신이 연기과 학생이며 촬영을 앞두고 있다고 소개한 남자는 황당한 부탁을 꺼낸다. 곧 들어갈 촬영이 키스신인데 카메라 앞에서 첫 키스를 하고 싶지 않다며 두 사람 중 자신과 마찬가지로 첫 키스를 해보지 않은 여자와 촬영에 앞서 키스를 하고 싶다는 것. 다소 불쾌한 의사를 비추던 가영과 친구는 황당하지만 진솔한 남자의 제안을 고려해 보기로 한다. “나도 처음인 사람 처음이야”라며 복학생스러운 멘트를 날리는 가영을 관객들은 이겨낼 도리가 없을 것.


<극장 미림>│단편, 10min

미림 극장에서 앉아 있는 가영(정가영)과 승기(백승기). 어느 연인과도 같아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가영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꽤나 당황스럽다. “나랑 잔 사람들은 다 망했어요.” 감독으로서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승기에게 가영의 징크스는 흔들릴 여지를 주고 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까. 정가영 감독의 유머 코드가 곳곳에 녹아있는 <극장 미림>은 정가영식 남자 밀어내기(?)를 선보인다. 오고 가는 대화가 성적인 요소들이 있음에도 긴장감보다는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대화도 그저 웃음만 날뿐. 신도림 메가박스의 비밀이 영화의 숨겨진 킬링 포인트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단편, 19min

아슬아슬한 남녀 간의 줄다리기. 그 사이에서 오는 짜릿한 ‘텐션’을 그렸던 여타 작품들과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은 다르다. 일종의 돌연변이와도 같지만 정가영 감독의 재기발랄함과 당돌함은 변함이 없다. 시놉시스는 아주 간결하다. 차기작은 구상 중인 감독 가영(정가영)은 친구와의 통화에서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 시나리오도 없지만 말이다. 류준열도 안된다. 조인성이어야 한다. 영화의 영제 <LOVE JO. RIGHT NOW.>에서도 조인성을 향한 그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렇게 친구와 통화 중인 가영의 핸드폰으로 새로운 전화가 들어온다. 전화의 주인공이 궁금하다면 당장 영화를 틀어보시길.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한국 단편 경쟁 부문 진출작.


<비치온더비치>│장편, 99min

정가영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비치온더비치>.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포스터의 문구처럼 도발적인 대사가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흑백의 스크린, 한정된 공간, 고정된 카메라와 롱테이크 등 ‘여자 홍상수’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홍상수의 잔상도 언뜻 비친다(실제로 정가영은 홍상수 감독의 팬이다). 주인공인 가영(정가영)과 정훈(김최용준)은 헤어진 연인 관계다. 어느 낮, 오디션을 본 가영이 정훈의 집에 들이닥치며 영화는 시작한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며 불편해하는 정훈에게 가영은 솔직하게 말한다. “우리 자면 안 돼?” <비치온더비치>는 총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막이 진행될수록 가영은 정훈에게 솔직하게, 그래서 더 찌질하게 돌진하고, 정훈은 흔들린다. 주고받는 대화들로 유추해 보아 견고해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사실 돌이킬 수 없이 이미 어긋나있다. 정가영이 말하는 전남친, 전여친에 대한 담론은 이다지도 쓸쓸하다.


<밤치기>│장편, 84min

모든 것을 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패. 과연 승자는? 로맨스라기보다는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키려는 여자의 스릴러물에 가까운 영화 <밤치기>. 영화 자료 조사라는 핑계로 술자리에서 한 번 만난 진혁(박종환)을 불러낸 가영(정가영)은 대답하기 곤란한 수위의 질문을 던지며 진혁을 당황하게 한다. 남녀 간의 성행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가영의 유도 질문은 어느새 진혁을 향한 개인적인 질문으로 변하고, 이내 가영은 “저 오빠랑 자는 건 불가능하겠죠?”라며 진심을 꺼내 놓는다. 필사적으로 가영의 공격(?)을 막아내는 진혁, 여기에 진혁의 선배인 영찬(형슬우)가 나타나면서 세 사람의 밤은 각자의 방향을 찾아 아침으로 흘러간다. <밤치기>는 직설적인 화법이 주특기인 정가영 감독의 야심작으로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 진혁을 연기한 박종환에겐 올해의 배우상을 안겨주었다.


<하트>│장편, 70min

<비치온더비치>, <밤치기>로 솔직함과 아슬아슬함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정가영은 <하트>를 통해 한 단계 더 과감해지기에 이른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사랑이다. 사실 정가영의 작품 전반에는 남녀 사이의 섹슈얼한 욕망들이 팽팽히 흐르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춰내고 보면 사랑과 짙은 외로움이 있다. <하트> 속 가영(정가영)은 성범(이석형)을 찾아가 자신의 연애 고민을 털어놓는다. 가영의 짝사랑 상대는 유부남이다. 연애를 상담해 주는 성범 역시 유부남이다. 그리고 영화는 카메라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액자식 구성을 통해 전달하려는 연애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 오직 정가영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씨네플레이 객원기자 문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