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첫 주말. 겨울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직전. 스크린을 하얗게 수놓은 겨울 멜로영화 5편을 준비했다. 많이 알려진 작품들로 구성했지만 어느 것 하나 빼놓기가 섭섭하다. 5편 가운데 이미 봤던 작품은 다시 보고,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은 이번 기회에 꼭 챙겨보시길.
<러브레터>
나카야마 미호가 아직도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시에 살고 있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오타루시립도서관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의 사서가 있을 것만 같다. 후지이 이츠키를 연기한 나카야마 미호. 그가 출연한 다른 영화의 제목은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누군가의 부름에 땀을 훔치며 뒤돌아보는 모습은 결코 상상할 수도 없다. 국내 한정일 것 같긴 하지만 <러브레터>는 겨울 멜로영화의 고전이자, 아이콘이자,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매년 이맘때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할 무렵 <러브레터>를 다시 꺼내 보기를 추천한다. 세상의 좋은 영화가 대부분 그렇듯이 <러브레터> 역시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역대 가장 완벽한 PPL이라고 불리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윤희에게>
<러브레터>를 본 사람들에게 <윤희에게>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눈에 둘러싸인 도시의 풍경이 기시감의 정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러브레터>와 <윤희에게> 속 도시는 모두 오타루다. <윤희에게>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오타루 여행 중에 만난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눈이 언제 그칠까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 공간에 대한 인상으로 남았다. 매년 눈이 아주 많이 오는 동네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이 새롭게 들렸다”라고 밝혔다. <윤희에게>에서 윤희(김희애)와 새봄(김소혜), 윤희 몰래 여행에 동참한 새봄의 애인 경수(성유빈)는 왜 하필 오타루를 선택했을까. 이 여행은 엄마의 첫사랑을 만나게 해주기 위한 새봄이 계획한 것이다. 새봄은 엄마에게 온 편지를 보고 그 발신인이 살고 있는 오타루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고 보니 편지 속 주소를 찾아가는 것도 <러브레터>와 유사하다. 묘하게 닮은 두 영화.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것도 겨울 멜로 영화를 즐기는 색다른 경험이 되지 않을까.
<렛 미 인>
북유럽의 영화는 차가운 공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렛미인>이 이런 이미지를 우리에게 심어준 첫 영화일지도 모른다. 2008년 <렛 미 인>이 국내에 개봉하기 전까지 기억에 남는 북유럽 영화가 있었던가. <렛 미 인>이 이렇게 오래 북유럽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물론 이 영화의 뛰어난 완성도 때문일 것이다. 후반부 수영장 시퀀스는 그전까지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형식의 공포를 보여줬다. 이야기 자체의 힘도 대단하다. 12살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과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의 사랑을 뱀파이어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상상은 꽤나 신선하고 어쩌면 충격적이다. 이런 상상력은 <렛 미 인>을 만든 스웨덴의 혹독한 겨울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실용적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의 북유럽 가구가 발달한 이유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렛 미 인>은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에 담긴 하얀 눈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차갑고 미스터리한 정서가 가득한 영화다. 하얀 눈에 흩어지는 붉은 피는 여러 영화에서 본 것 같지만 <렛 미 인>이야말로 그 강렬한 이미지의 대비가 도드라지는 영화다. 참고로 클로이 모레츠와 코디 스밋 맥피가 출연한 할리우드 리메이크 <렛 미 인>도 나쁘지 않지만 스웨덴의 오리지널을 먼저 보는 걸 추천한다.
<이터널 선샤인>
<이터널 선샤인>을 빼놓고 겨울 멜로 영화를 논하는 것은 직무유기 같다. 또 <이터널 선샤인>을 소개하냐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이 영화의 위대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다. 위대함? 과한 표현 같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창의적인 미장센과 스토리를 만들어낸 위대한 영화다. 말장난 같지만 <이터널 선샤인>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짐 캐리가 연기한 조엘이 자신이 사랑했던 클레멘타인(케이트 위슬렛)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특정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SF 장르적인 상상을 통해 사랑의 기억, 본질에 대해 <이터널 선샤인>은 말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의 틀에 미셸 공드리의 뛰어난 미장센, 꽁꽁 얼어붙은 호수,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해변의 풍경 등은 관객의 감각을 완벽하게 홀린다. 이렇게 써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역시 이 리스트를 <이터널 선샤인>을 빼고 만드는 것은 직무유기인 것 같다. <이터널 선샤인>은 우리 시대의 <러브 스토리>(1970) 그 이상이다.
<퐁네프의 연인들>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 교회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릴 때 한 남자가 와인을 손에 들고 지하철 승강장에서 출입구를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출입구 앞에는 퐁네프(Pont-Neuf)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종소리가 멈추고 택시 한 대가 퐁네프 다리 중간에 멈추어 선다. 이젤을 든 여자가 택시에서 내린다. 크리스마스에 만나기로 한 두 사람. <퐁네프의 연인들>이 겨울 멜로 영화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시퀀스는 이렇게 시작된다. 레오 카락스 감독은 폐쇄된 다리 퐁네프에서 지독한 사랑을 나누었던 미셸(줄리엣 비노쉬)과 알렉스(드니 라방)의 재회의 밤에 함박눈을 내리게 했다. 이 가슴 시린 재회의 순간은 영화의 중반부 폭죽이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 시퀀스와 대비된다. 불꽃과 눈. 이 두 재료가 상징하는 것은 달라 보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미장센에 매혹되는 건 매한가지다. 그게 바로 오랜 세월 <퐁네프의 연인들>이 사랑받는 이유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