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손석구, 최희서, 이제훈. 네 명의 배우가 <언프레임드>로 관객들을 찾는다. 쟁쟁한 캐스팅 라인업이라 오해하기 십상이겠으나. <언프레임드>에서 이들의 역할은 ‘감독’이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관객과 눈을 맞추던 이들이 카메라 프레임 밖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제작이 결정된 순간부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기까지, 많은 영화 팬들이 <언프레임드>에 뜨거운 관심을 보낸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프레임 안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말을 걸던 이들이 진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겠다며 프레임을 박차고 나와 우리 곁을 찾아왔으니. 관객들은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언프레임드>는 이제훈이 대표로 있는 콘텐츠 제작사 하이컷이 기획한 첫 번째 프로젝트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언프레임드>는 프로젝트 안에서 하나의 큰 주제를 정하기보단 틀이 없는(Unframed) 백지 위에 네 가지 이야기를 모았다. 덕분에 우리는 네 배우의, 아니 네 감독 각자의 개성이 오롯이 묻어있는 네 편의 단편 영화를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언프레임드> 프로젝트를 통해 감독 명찰을 달게 된 박정민, 손석구, 최희서, 이제훈. 이들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완성한 작품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 왓챠 오리지널 숏필름 프로젝트인 <언프레임드>는 오직 왓챠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박정민 감독 <반장선거> 러닝타임 24분

배우 박정민의 출발점에 <파수꾼>이 서 있었듯, 감독 박정민의 첫 도전 역시 교실로부터 출발한다. <파수꾼>이 고등학교 한구석의 기억을 소환했다면, <반장선거>는 우리 시대 ‘초딩’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해서 유치하다거나 훈훈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반장선거>는 ‘초딩 누아르’라는 수식어가 따를 만큼, 묵직하고 날카롭다. “반장선거에 나온 친구들과 친구의 친구들이 반장선거에 진심인 걸 보고” 공포를 느꼈다는 박정민. 그의 자전적인 기억으로부터 출발한 영화 <반정선거>는, 온갖 네거티브가 범람하는 5학년 2반 교실의 반장선거 풍경을 담았다. 기존 대부분의 영화들이 아이들의 순수함을 조명했다면, 이 영화는 다르다. 아이들의 세상 속에도 검은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기존의 관념을 비튼다. 푸르스름하게 차가운 화면은 아이들의 열띤 표정을 극대화하며 인간의 본성은 선에 가까운가, 악에 가까운가,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라는 질문을 넌지시 던진다.

* 박정민의 연출 포인트

비교적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반장선거>는 축축 처지는 분위기의 영화는 아니다. 요즘 말로 ‘힙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는 <반장선거>를 채우는 음악 때문이다. 러닝 타임을 가득 채우는 힙합 리듬은 반장선거의 치열한 분위기를 완성하는 동시에 박정민이 보여주려 했던 반항적인 시선을 자연스럽게 버무려내며 기존의 단편 영화와는 다른 지점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에는 래퍼 마미손의 음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박정민은 직접 마미손을 섭외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감독 박정민의 연출 센스가 고스란히 느껴진 부분 중 하나.


손석구 감독 <재방송> 러닝타임 30분

<재방송>은 ‘손석구다움’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작품이다. 츤데레스러운 캐릭터들을 자주 연기했던 탓인지 손석구를 떠올리면 까칠하면서도 다정함이 함께 느껴지는데. <재방송> 역시 성가시면서도 애틋한 두 캐릭터의 관계를 조명하며 극을 이끈다. <재방송>의 두 주인공은 이모와 조카 사이다. 수인(임성재)은 가족들 중 가장 한가하다는 이유로 가족 행사에 이모를 모시고 가게 됐지만, 두 사람은 가족 행사에 참여하는 게 딱히 내키지 않는다. 텁텁한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며 손석구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이모와 조카의 투 숏을 담아낸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멀다고 하기엔 가깝고, 가깝다고 하기엔 먼. 애매한 관계에서 영화적인 소재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손석구는 이모와 조카 사이의 데면데면한 관계성에 집중하며, 그 속에만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유대감을 조명했다. 오래전 사진을 계속해서 꺼내 보는 이모와 지겹도록 재방송하는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고픈 무명 배우 조카. 각자의 이유로 재방송을 꿈꾸고 있는 두 사람의 동행은 결국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 손석구의 연출 포인트

<재방송>에서 감독 손석구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건 비단 소재뿐만이 아니다.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손석구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다. 사실적인 연기를 좋아하는 손석구답게 배우들 역시 현실 연기에 특화된 이들을 캐스팅했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연극을 통해 제 실력을 인정받아온 임성재와 변중희가 조카와 이모를 연기하며 관객들의 마음을 훔친다. 툭툭 대사를 내뱉으면서도 그 속에 형용할 수 없는 따스함을 녹여낸 두 배우의 깊이 있는 호연은 <재방송>을 봐야 할 가장 큰 이유로 남았다. 손석구는 실제로 캐스팅에 가장 긴 시간을 할애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임성재와 변중희를 캐스팅한 안목과 두 사람의 발걸음을 섬세하게 담아낸 손석구의 연출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최희서 감독 <반디> 러닝타임 40분

여러 편의 작품에서 싱글맘을 연기한 배우 최희서는, 이전부터 “싱글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깊게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언프레임드>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전부터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서랍 속에 넣길 반복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드디어 시나리오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영화 제목 <반디>는 싱글맘 소영의 딸 이름이다. 아빠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반디와 이제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소영의 얼굴을 번갈아 조명하며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아름답게 그린다. 아이의 상처가 두려워 차마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한 엄마가 아이의 한 마디를 통해 커다란 위로를 얻어가는 반나절의 시간을 늦은 오후의 햇빛, 녹음과 함께 담아내며 따뜻한 작품을 완성했다. 감독과 배우를 병행한 최희서의 연기도 좋았지만, <반디>를 보고 난 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아역 배우 박소이의 깊은 눈망울이다. 말더듬증을 갖게 된 반디가 제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아빠를 추억할 때면 말문이 트이는데. 그 습관을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모습을 보며 배우 박소이의 천재성에 놀랄 수밖에 없다.

* 최희서의 연출 포인트

<언프레임드> 제작보고회에서 최희서는 <반디>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반디>는 특별한 사건/사고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소영과 반디가 주고받는 대화들, 그리고 아빠를 추억하는 반디의 행복한 얼굴만으로 꽉 채워져 있는 작품이다. 자칫하면 평범하다거나 밋밋한 인상을 남길 수도 있었으나. <반디>는 최희서가 써 내려간 온기가 가득한 대사들로 관객들의 맘을 쥐고 흔든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아빠의 죽음, 엄마의 마음으로 떠올린 아들의 빈자리, 그리고 아내로서 느끼는 남편의 부재를 따뜻한 대사로 표현해내며 위로를 전한다.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꾹꾹 눌러쓴 최희서의 진심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제훈 감독 <블루 해피니스> 러닝타임 36분

불안한 청춘의 얼굴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제훈은 감독 데뷔작에서도 청춘이란 키워드를 떠올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무엇에 가장 몰두하는가를 고민한 끝에 취업, 사랑, 그리고 주식이란 소재를 <블루 해피니스>에 녹여냈다. 돈이 되지 않는 사진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찬영(정해인)이 우연한 기회에 주식에 손을 담그면서부터 벌어지는 일상의 균열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청년들의 이야기지만 <블루 해피니스>는 불안한 미래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땅 위에 서 있는 이들이 부풀려진 말 한마디에 얼마나 나약할 수밖에 없는지, 그렇게 뒤집힌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대가가 얼마나 가혹한지를 담담하게 풀어가며 현 시대상을 반영한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블루 해피니스>는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가 깔린 작품이라는 거다. 차가운 도시의 공기와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집 안의 모습을 대비시키며 꿈과 현실을 오가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아마도 <블루 해피니스>라는 제목 역시 그 대비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제훈의 연출 포인트

<블루 해피니스>를 봐야 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단연 정해인이다. 시나리오를 써 내려갈 당시부터 배우 정해인을 떠올렸다는 이제훈의 말마따나, <블루 해피니스>는 청춘을 대변하는 정해인의 얼굴, 그중에서도 정해인의 전매특허 중 하나인 흔들리는 눈빛을 맘껏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3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수긍, 로맨스, 불안, 행복, 후회의 감정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데는 정해인의 공이 컸다. 이제훈은 정해인의 어투에 맞춰 대사를 써 내려간 만큼, 정해인은 그 누구보다 <블루 해피니스>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씨네플레이 유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