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초는 그런 때다. 365일 단위로 끊어둔 한 해라는 경계의 끝자락일 뿐 시간은 다름없이 연속하는데, 괜히 마음이 말랑해지는 때. 아주 작은 영감을 주는 무언가를 봐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자극을 느끼기 딱 좋을 때다. 이맘때 우리에겐 뻔하지만 착한 영화가 필요하다. 긍정적인 기운을 몰고 와 인생 열심히 살고 싶어지게 하는 영화 5편을 준비했다. 많이 알려진 작품들로 구성했지만 어느 것 하나 빼놓기가 섭섭하다. 안 본 작품 보고, 본 작품 또 보며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자. 글에 진부하더라도 곱씹게 될지도 모를 말이 꽤 많다는 것도 예고해 본다.


사랑의 블랙홀

<이프 온리>(2004) <어바웃 타임>(2014) <팜 스프링스>(2021)… 시간 여행과 로맨스가 만난 영화가 끝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알고도 우리는 당한다. 하릴없이 또 감동해버리고 만다. <사랑의 블랙홀>(1993)은 그 고전 격인 영화다. 기상 캐스터 필(빌 머레이)은 2월 2일 성촉절을 맞이해 마을 축제를 취재하러 갔다가 폭설로 발이 묶인다. 당장 떠나고 싶은 지루한 마을에서는 몇 시간도 견디기 힘든데, 별안간 무한히 반복되는 하루에 갇혀버린다. 건강 따위 괘념치 않고 설탕을 과다 섭취하거나 은행을 털며 시간을 죽이지만 탕아 생활이 흥미로운 것도 하루이틀이다. 자살 시도마저도 안 먹히는 세상에서 필은 결국 현실을 즐기기로 하고, 가장 완벽한 하루를 살아내고 나서야 굴레에서 벗어난다. 기묘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판타지는 필이 대신 겪었다. 영화는 당신은 필이 치른 절망감이라는 기회비용 없이, 일상의 소중함을 그저 알고 소소하더라도 끝내주는 매일을 살기만 하면 된다고 나긋하게 제안한다.


굿모닝 에브리원

오전 네 시 반이면 회의 테이블 앞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뉴스쇼 PD 베키(레이첼 맥아담스)는 <굿모닝 에브리원>(2011)이 시작하자마자 직장에서 잘린다. 젊고 경험이 적지만 패기만만한 기질로 어렵사리 메이저 방송국에 들어간 베키. 그가 맡을 쇼는 동시간대 시청률 최저의 ‘데이 브레이크’다. 맹렬한 추진력으로 동료들의 사기를 올려놓으며 한숨 돌린 것도 잠깐. 쇼를 살릴 회심의 카드로 전설적인 앵커 마이크(해리슨 포드)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지만, 연성 뉴스는 취급하지 않겠다며 고상한 고집을 부리는 진행자 탓에 베키는 골치가 아프다. 말 그대로 영화 내내 뉴욕 거리를 뛰어다니는 레이첼 맥아담스와, 노련해서 매정한 상사와 숫한 신입사원, 일과 사랑 사이의 줄타기. <굿모닝 에브리원>은 여러모로 이 분야의 최강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떠올린다. 베키의 출처 모를 긍정 에너지는 전염성이 강하고, 차 한 대 없는 도로의 끝을 지평선으로 해가 뜨는 마지막 장면은 당장 내일 아주 일찍 일어나고 싶은 충동을 남긴다.


인턴

일 년 사이에 직원을 열 배 늘린 줄스(앤 해서웨이)는 잘나가는 패션 스타트업 CEO다. 코딩 작업 중인 모니터, 바쁜 화보 촬영 현장, 끊이지 않는 고객 문의. 온갖 쿨한 것들로 그득한 사무실에, 쿨하다는 것보다 클래식하다는 말이 칭찬으로 어울릴 고령 인턴 벤(로버트 드 니로)이 입장한다. 열정이 과해 삶이 균형을 완전히 잃기 직전인 30세 줄스와, 수십 년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노하우와 인생 경험이 무기인 70세 벤은 조언을 나누며 함께 성장한다. 벤은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건네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턴>(2015)은 문득문득 외로움을 느끼는 당신도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다. 당신 곁에 당신을 이해하는 이해하는 당신의 벤이 있으니 기꺼이 위로받고 기댔다 가라고.


빌리 엘리어트

탄광 노조 파업이 한창이던 영국 북부 작은 마을. 빌리(제이미 벨)는 시위에 열성인 아버지 몰래 발레에 빠진다. 그걸 알게 되자마자 반대하는 아버지에 빌리는 낙담한다. 남자가 발레 하는 걸 수치로 여기는 것은, 치열한 가족의 삶과 동떨어진 발레가 사치일 뿐이라는 가혹한 현실과 비교하면 고상한 핑계다. 종이 쪼가리와 빵 쪼가리 몇 장으로 크리스마스도 겨우 기념하는 열악한 집안이지만, 일단 빌리의 간절한 춤을 보면 현실을 잊고서라도 빌리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진다. <빌리 엘리어트>(2001)는 스스로 땔감이 되어 빌리를 비춘 아버지 재키(게리 루이스)의 이야기이기도, 빌리에게 걸맞은 새길을 안내하고는 지분 따위 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퇴장한 윌킨슨 부인(줄리 워터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춤을 출 때의 기분에 대한 빌리의 짧은 연설이 남긴 짙은 인상은 여전하다. “모르겠어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그리고 사라져버려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날으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 네, 전기처럼요.” 내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그 정도로 황홀에 겨워서 뭘 해본 적이 있던가.


포레스트 검프

IQ 75로 남들보다 지능이 낮고 다리가 불편한 포레스트(톰 행크스) 또래에게 놀림당하기 일쑤다. 유일한 친구 제니(로빈 라이트)는 그를 향해 소리친다. “도망가, 포레스트!” 짓궂은 친구들을 따돌리기 위해 달리던 포레스트는 달리기에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미식축구 선수로 진학한다. 대학 졸업 후 군에 들어간 그는 베트남전에서 공로를 세워 훈장을 받는다. 전사한 전우와의 약속을 지키려 시작한 새우잡이 사업은 그를 억만장자로 만든다. 포레스트의 끊임 없는 노력은 꼭 믿기 힘든 우연을 만나고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만, 그 끊임 없는 노력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열심히 달린 그의 동화 같은 이야기에 응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포레스트 어머니의 말대로,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네가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른단다.” 달콤한 초콜릿을 만날지 씁쓸한 초콜릿을 만날지는 손이 가는 대로 이것저것 까봐야 안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