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사라 게이 포든이 쓴 <하우스 오브 구찌: 살인, 광기, 화려함, 그리고 탐욕의 충격적 스토리>가 출간되고, 리들리 스콧과 그의 아내인 지안니나 스콧이 운영하는 스콧 프리는 일찌감치 책의 판권을 사들였다. 구찌 가문 3대에 걸친 논쟁적이고도 매력적인 흥망성쇠를 읽은 리들리 스콧은, 오랜 직조 끝에 그로부터 20년 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이후 두 달 만의 신작인 <하우스 오브 구찌>를 완성했다.

창립자 구찌오 구찌가 피렌체의 명품 거리에 가죽용품 전문점을 연 것이 패션 제국 구찌의 기원이다. 영화는 구찌의 명망이 이를 데 없이 높아진 가운데 구찌오의 두 아들 알도(알 파치노)와 로돌포(제레미 아이언즈)가 경영권을 나눠 가진 상황에서 시작한다. 승계 쟁탈전과 무리한 시장 넓히기, 탈세를 거치며 브랜드 구찌가 이탈리아에 깊은 뿌리를 둔 가족 사업에서 전문 경영인 체제의 글로벌 기업으로 전환되던 30년을 담는다. 그 중심에는 로돌포의 아들 마우리찌오 구찌(아담 드라이버)와, 종국에 그를 청부 살해하는 전부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레이디 가가)의 로맨스가 있다.

리들리 스콧은 구찌였고 누구보다 구찌가 되고 싶었던 영원한 아웃사이더 파트리치아의 이야기로 <하우스 오브 구찌>를 그렸다. ‘레이디 구찌’ 혹은 ‘블랙 위도우’로 알려진 그가 마우리찌오를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고 경영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개입한 것이 생존욕과 인정욕의 순수한 발로에 기인한다는 게 감독과 파트리치아를 연기한 레이디 가가의 해석이다. 이에 구찌 일가는 할리우드가 이익을 위해 가문의 정체성을 이용, 왜곡했다며 공공연하게 비판했고, 더불어 영화의 코믹적인 캐릭터 묘사 방식에 반발해 급기야 알 파치노의 외모 지적까지 한 바 있다. 북미에서 지난 11월 먼저 개봉한 <하우스 오브 구찌>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원작 논픽션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긴 평이한 각색과 전개가 그 이유다. 배우들의 어색한 이탈리아 억양과 고양된 연기톤은 영화에도 등장하는 톰 포드도 거들어 혹평했지만, 메소드 연기를 동원해 호연을 보여준 레이디 가가에는 이견 없이 찬사를 보냈다.

1978년 운수 회사 사장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22세 파트리치아는, 양쪽으로 트럭이 줄지어 서 있는 주차장 속 흙먼지를 뚫고 당당한 캣워크로 영화에 입장한다.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야심을 품던 그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분명히 안다. 파트리치아가, 아직은 법률공부에 몰두해 가업엔 관심이 없던 훗날의 남편을 처음 만난 건 사교 파티에서다. 마우리찌오 구찌. 그 이름을 소개받는 순간, 마치 치즈 냄새를 알아챈 만화 속 쥐처럼 파트리치아의 눈에는 돌연 생기가 돈다. 우연을 가장한 노력 깃든 만남에서 파트리치아는 그 끝에 어떤 비극이 있는지 모른 채 “운명이 우리를 어디에 데려다 놓을지 궁금하다”고 추파를 던지며, 어수룩한 마우리찌오의 스쿠터에 진한 빨간색 립스틱으로 전화번호를 새겨 넣는다.

로돌포에게 구찌는 공유가 아닌 독점의 대상이었다. 그가 기지를 발휘해 고안한 구찌의 시그니처 아이템 플로라 프린트 스카프가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에 헌사되었듯, 그에게 구찌와 그의 가문은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하는 이들만 가질 수 있는 무언가였다. 이런 고매한 취향의 로돌포가 외동아들의 짝으로 클림트와 피카소도 구분하지 못하는 중산층의 출세주의자를 들일 리 없다. 강렬한 사랑에 휩싸인 젊은 커플의 결혼은 아버지와 아들을 의절하게 만들었다. 마우리찌오를 다시 회사로 끌어들인 건 동족인 파트리치아를 알아본 잇속 밝은 알도다. 구찌를 “박물관”에 빗대던 예술가 동생 로돌포와 달리, 세계 곳곳에 구찌 “쇼핑몰”을 세우길 바랐던 형 알도는 타고난 사업가다. 알도는 없는 재능에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설치는 괴짜 아들 파올로(자레드 레토)가 똑똑해지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대신, 파트리치아와 공조해 이미 똑똑한 조카를 구슬려 후계자 자리에 앉힌다.

알도는 마우리찌오와 파트리치아를 뉴욕 매장으로 초대한다.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던 셋 사이의 균형은 29.95달러짜리 가짜 구찌 가방이 성행하던 시기와 맞물려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구찌의 일원이고 싶었던 열정적인 파트리치아는 길바닥의 가품이 브랜드 가치를 떨어트리는 것을 목격하고 알도에게 호소하는데. 되돌아오는 답은 이랬다. 구찌는 모두 알고 있었다. 수익성이 좋아 내버려 둔 것뿐이다. 이는 구찌의 일이며 남자의 일이다. 너는 신경 쓰지 말거라. 단호하게 선 긋는 알도의 말은 파트리치아로 하여금 가족 내 위치, 그러니까 가족 내 위치가 없음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구찌 가품과 그는 별다를 바 없었다. 위기감과 적개심에 의한 파트리치아의 발버둥은 그의 심령술사 친구 피나(셀마 헤이엑)의 조언을 만나, 알도 부자를 따돌리고 마우리찌오를 최대 주주로 만드는 데 성공하지만, 탐욕에 잠식된 그의 폭주는 마우리찌오의 외도와 함께 결혼 생활의 파탄을 알린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리겠다는 파트리치아의 파괴심은 구찌를 1995년의 예고된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하우스 오브 구찌>의 캐릭터 구상 방식은 그림으로 치면 익살스러운 캐리커처다. 의도적으로 과장된 톤을 택한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다기보다는 차라리 연기하고 있음을 전시하는 극적 묘사에 가깝다. <스타 이즈 본>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추가한 레이디 가가는 그의 두 번째 작품에서,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의 호방한 기질을 닮은 동물의 몸짓까지 참고하는 메소드 연기를 보여준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이기도 한 그는 파트리치아가 작은 도시인 고향 비뇰라에서 쓰는 방언과, 구찌의 터전인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쓰는 상류층 억양에 차이를 두는 세심함을 발휘했다.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에도 이탈리아 억양을 구사하는 등 1년 반을 줄곧 파트리치아로 살았다고. 주인공인 가가 다음으로 (혹은 주인공보다 더) 관객에게 자주 언급된 배우는 매일 오전 4시 반 촬영장에 도착해 파올로 구찌로 파격 변신한 자레드 레토다. 민머리 아래로 늘어진 힘없는 머리카락이며 실제와 달리 두툼한 체형이며, 눈동자를 빼면 파올로가 레토라는 단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블레이더 러너 2049>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그랬듯 그는 분장의 도움을 얻어 캐릭터 뒤로 얼굴을 숨기고, 오로지 직접 창조해낸 아우라만을 겉으로 드러내기로 했다. 레토는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심히 굴곡진 억양과 고래 울음소리에 가까운 이따금의 괴성을 동반해, 특히 어리석은 처사로 시시때때로 웃음과 연민을 동시에 유발하는 캐릭터를 완성했는데. 그의 퍼포먼스에는 마땅한 상찬과 부담스럽다는 평이 동시에 따르고 있다.

아담 드라이버와 알 파치노는 위의 두 배우에 비해 담백한 연기로 중심축에 선 캐릭터를 빛나게 한다. 2021년 세 편으로 극장을 찾은 드라이버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포함한 두 전작에서 극강의 난봉꾼 연기를 소화한 바 있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는 상대적으로 착한 마우리찌오를 덜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한편, 훤칠한 그의 구찌 패션쇼도 감상할 수 있다. 드라이버는 이번에도 의심할 여지 없는 연기로 영화의 안정적인 지지대가 되어주었지만, 야망 없는 내향형 인간에서 사랑에 빠진 남자, 그리고 자부심에 유혹된 권력자로 변해가는 마우리찌오 서사의 궤적이 그다지 선명하진 않다. 마지막에서야 본색을 드러내는 회사의 법률 고문, 도메니코 드 솔레 역을 맡은 잭 휴스턴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분명 <하우스 오브 구찌>는 패션 왕조의 치명적인 권력 싸움에 멜로드라마를 섞어 재미있게 풀어낸 엔터테이닝 영화다. 다만 전반적으로 논픽션이 고스란히 영상화되었으며, 영화보다는 시리즈를 보는 듯한 각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파트리치아의 살인 동기는 끝까지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리들리 스콧은 패션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는데. 비주얼 장치로서의 패션보다는 화려한 패션 하우스 이면의 번영과 몰락, 그 복잡한 대서사시에 집중한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찌에 전성기를 돌려준 전설적인 1995년 톰 포드 쇼를 재창조하면서 쇼의 상징적인 아이템의 성별을 바꾸는 시도를 했으며, 지금까지도 변주되어 출시되는 뱀부백, 플로라 스카프, 홀스빗 로퍼 등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템을 구경하는 재미도 챙겼다.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