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원대한 계획을 세우곤 한다. 올해는 작년과 다를 거라고, 정말 제대로 멋지게 살아볼 거라고.

<49일>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영혼만 몸 밖으로 떨어져 나온 신지현(남규리)은, 저승사자 ‘스케쥴러’(정일우)로부터 ‘다시 살아나려면 49일 안에 가족을 제외하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세 사람의 눈물을 모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5년 전 사고로 연인을 잃은 뒤 살아갈 의욕을 놓아버린 채 죽은 사람처럼 살아가던 송이경(이요원)의 몸에 빙의한 지현은, 세 사람의 눈물을 모으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해맑고 긍정적인 태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삶을 살았던 자신이니까, 그런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이 셋은 있지 않겠어?

하지만 지현은 자신이 선의라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에겐 모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지현이 제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친구 인정(서지혜)은, 지현이 묻지도 않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대책없이 떠안기는 호의를 받으며 끊임없이 모멸감을 느꼈다. 인정이 이 악물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돈과 안정과 평화를, 지현은 부모님께 거저 물려받고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인정에게 베풀었다.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억지로 떠안기는 지현의 공세에 상처를 입고, 그럴수록 자신과 지현 사이의 격차는 갈수록 더 선명해졌다.

가장 친한 친구인 인정에게 선의라 생각하고 베푼 것조차 상대에겐 모멸이 되었으니, 다른 친구나 연인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세 사람을 찾지 못한 지현은, 자신이 저질러 온 실수를 반성하며 제 삶이 통째로 거짓이었음을 뼈아프게 자각한다. 그리고는 다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해가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진실로 잘해주기 위한 행동들로 남은 시간을 채운다. 처음엔 상대로부터 진실한 눈물을 얻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하다 보니 자연스레 제 인생을 복기하고 만회하기 위한 일이 되었다.

소현경 작가의 필모그래피에서 SBS <49일>(2011)은 아마도 그렇게 주목할 만한 작품은 아닐 것이다. 시청률로만 치면 MBC <진실>(2000)이나 SBS <찬란한 유산>(2009), KBS <내 딸 서영이>(2012), KBS <황금빛 내 인생>(2017)처럼 압도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고, 장르적인 즐거움은 MBC <투윅스>(2013)나 tvN <두번째 스무살>(2015)가 앞선다. 매니악한 팬층의 존재로만 치면 SBS <검사 프린세스>(2010)가 훨씬 더 짙은 사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현경 작가가 쓴 이야기들 중 <49일>만큼 어둡고 우울한 작품도 없다. 죽음을 전력으로 피하려는 영혼(신지현)과 삶을 전력으로 피하려는 사람(송이경)을 주인공으로 세운 <49일>은 인간의 선의지에 대한 비관과 냉정한 현실인식으로 가득하다. 서툰 선의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오해를 사고, 배신 당한다. 삶이 멈춘 뒤에야 지금껏 살아온 삶이 허위였음을 깨닫고 반성해야 하는 지현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있는 이경의 이야기가 마냥 즐겁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게다가 이 글에서 다 쓰지 않은 막판의 반전은, 작품을 꾸준히 따라왔던 이들을 얼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결말을 납득하지 못한 이들의 뇌리에, <49일>은 그렇게 좋은 기억만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하루하루 사는 게 바쁘고 버거울 때면, 나는 이상하게 자꾸 <49일>을 떠올리곤 했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면서 사는지도 모른 채 제 위주로 살던 지현이, 제 아픔에 젖어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그저 버티고만 있던 이경이 자꾸 생각났다. 그들이 제 실수를 깨닫고,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던 모습이, 단 하루를 살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쩌면 나도 지금 잘못 살아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죽음을 앞두고 제 삶을 복기하고 반성할 기회를 얻은 지현은 얼마나 큰 행운을 얻었던 건지 곱씹어 봤다.

그런데 그런 행운을 지현만 얻는 걸까? 새해를 맞이하며 사람들은 저마다 원대한 계획을 세우곤 한다. 올해는 작년과 다를 거라고, 정말 제대로 멋지게 살아볼 거라고. 새로 적금을 들고,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금연에 도전한다. 사실 새해가 된다고 뭐가 대단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새해를 핑계로 제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위에 금을 내어 매 사분기가 지나갈 때마다 다짐을 새롭게 하고, 한 달이 지나가 달력을 넘길 때마다 ‘이번 달엔 정말 뭔가 달라질 거야’라고 자기 최면을 걸고, 매일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새로운 하루 속으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삶을 복기하고 반성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매일매일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를 잡을 순간이라는 걸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