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번호 3번. 감독이 되고 싶어 영화과에 지원했던 나는 추가합격 예비번호를 보고 초조함에 입안이 말라붙었다. 포기하고 마음을 접기에 예비번호 3번은 너무 합격에 가까웠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 3번이면 기다려 볼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아는가? 합격자 중 딱 세 명만 더 좋은 기회를 만나서 다른 곳에 간다면 내게도 자리가 날지? 그렇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합격자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기를 기원하는 수준으로 시작된 나의 바람은, 나중엔 “한 세 명 정도만 몸이 아프거나 해서 요양과 치료를 위해 등록 안 해주면 좋을 텐데” 수준으로 흉흉해졌다. 제발, 세 명만 앓아누워라.

그러나 그해 합격자들은 아무도 “더 좋은 기회” 같은 걸 찾아 떠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영화과에 지원한 학생이라면 C대학 영화과에 합격해 놓고는 등록을 포기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내 사악하고 흉흉한 바람과는 달리, 그해 합격자 중 그 누구도 등록 전에 다치거나 아프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정말 세 명씩이나 등록을 포기할 만큼 아파서 추가합격이 되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양심의 가책이 컸을 테니까. 나는 예비번호 3번인 채로 첫 대입시험을 마쳤다. 아, 너무 가시권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 아쉽다. 나는 쓴 입맛을 다셨다.

그러니까 이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차라리 예비번호도 없이 화끈하게 떨어진 거라면 미련도 안 남았을 텐데, 3번이라는 예비번호가 자꾸 날 서성이게 했다. 마침 같은 해 본 다른 영화학교 시험에서도 나는 최종면접까지 올라갔었다. 예비번호 3번, 최종면접 진출.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건지는 몰라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음 해엔 입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뭘 어떻게 더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이 악물고 열심히 영화를 봤고, 이론을 공부했고, 콘티를 그리기를 반복하며 1년을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나는 5년 동안 다섯 차례 영화학교 시험에 응시하고 다섯 번 모두 한 끗 차이로 탈락했다. 뭘 어떻게 더 노력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무작정 노력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영화를 향한 불타던 애정은 차게 식었다. 처음엔 나의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 의심했는데, 그게 5년이 되자 나는 나의 재능을 의심했다. 재능이 있었으면 진작에 붙었겠지. 그 한 끗을 극복 못 했겠어? 노력이 부족했을 것이라 자신을 다그치던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내려놓으면서는 재능도 없으면서 너무 큰 꿈을 꾼 자신을 책망했다. 나는 극장에 발길을 끊었고, 영화에 마음을 끊었다. 영화학교에 진학하는 걸 실패했을 뿐인데, 그렇다고 처음에 내가 영화를 사랑했던 이유가 사라진 건 아니었을 텐데. 영화를 더 깊게 사랑하겠다며 감독이 되는 일에만 집중하다가 그만 영화를 향한 사랑을 아예 잃어버린 것이다.

4등. 초등학생 수영선수 준호(유재상)는 수영이 좋다. 풀장 깊이 잠수해 물속을 유영하는 것도 좋고, 온몸으로 물살을 지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의 감각도 좋다. 하지만 좋아서 시작한 수영에서 준호는 ‘만년 4등’ 신세다. 3등까지는 메달권이니 앞날을 기약해볼 수 있는데, 메달권 코앞에서 떨어지는 4등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준호보다 더 간절한 건 준호의 엄마 정애(이항나)다. 아이가 수영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는 것 같길래 일찌감치 생활비를 쪼개어 아이의 선수생활을 지원해 온 결과가 만년 4등이라니, 정애는 피가 마른다. 준호가 아예 저 멀리 하위권에 있다면, 정애도 준호를 선수로 키울 마음을 접고 수영은 취미로 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지 않은가. 조금만 노력해서 한 명만 제치면 준호도 순위권인데. 1등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정지우 감독이 쓰고 연출한 영화 <4등>(2016)에서, 준호는 수영을 더 잘하려고 하다가 수영을 향한 사랑을 잃는다. 아이를 잘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리는 정애는 악역을 자처하며 준호를 혹독한 훈련의 길로 몰아세우는데, 정애가 수소문해서 데려온 왕년의 수영신동 출신 코치 광수(박해준)는 준호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한다. 자기 자신도 코치의 폭력 때문에 수영선수를 그만뒀으면서, 무조건 1등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는 정애의 바람을 들은 광수는 준호가 피멍이 들도록 준호를 때린다. 성적을 올리는 데에는 애를 쥐 잡듯 두들겨 패는 것만큼 빠른 길이 없어 보였는지, 맞다 보면 맞는 게 싫어서라도 더 빨리 실력이 늘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2등을 했지만 준호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순위 올리는 일에만 집착하느라 맞아가면서 수영을 배우는 길을 택하고 나니, 애초에 왜 수영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잃게 된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게 된 건 정애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제 꿈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려던 게 시작이었을 텐데, 어느새 애가 맞아가며 수영을 배우면서 불행해지도록 방치하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뒤 기댈 곳이 없어진 준호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수영장에 몰래 숨어들어가 종으로 쳐 진 수영 레인을 무시한 채 그 밑으로 잠영한다. 수영장 바닥에 떨어지는 빛을 쫓아 마음껏 수영장을 가로지르고, 제 놀이터처럼 자연스레 물살을 가르며 유영한다. 애초에 이 감각 때문에 수영을 사랑하게 된 건데, 어쩌다가 이 감각을 잊게 된 걸까.

<4등>의 결말은 애매하다. 수영을 향한 사랑을 다시 기억해 낸 준호는, 광수를 찾아가 “때리지 않고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광수는 허탈한 건지 비웃는 건지 알지 못할 웃음을 지으며 대꾸한다. “그냥 너 혼자 해보라”고. 그게 무슨 의미였을지 희미하게 곱씹던 준호는, 대회에 출전해 1등을 거둔다. 맞아가면서 훈련하는 게 아니라, 온전히 수영을 향한 제 사랑으로 거둔 성과였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결말이 꼭 준호의 1등으로 끝났어야 했던 건지는 의문이다. 준호가 되찾은 행복의 가치가, 1등이라는 결과로 승인받는 것만 같아 마음이 복잡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준호가 애초에 왜 수영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게 됐다는 점만큼은 <4등>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만들어주었다.

영화를 향한 내 사랑 또한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며 난 영화를 온통 다 져버리게 되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나는 천천히 영화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극장을 찾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과 그 감상을 나누고, 때로는 예전처럼 영화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직업적 글쟁이가 된 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쓴다. 꼭 감독이 되어야 영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난 오래 돌아온 끝에 깨닫게 되었다.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랑이 꼭 성과로 이어지지 않아도, 행복이 꼭 위업으로 성취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게 된 이유의 고갱이를 놓치지 않는다면 우린 끝내 괜찮을 것이다. 헤매고 실패하고 쓰러지더라도,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