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앨리>

여신이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할리우드 배우는 누구일까. 그저 아름답다는 의미의 여신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 혹은 북유럽의 신화 또는 판타지 세계의 여신 같은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를 떠올려보자.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케이트 블란쳇은 분명 여신에 가까운 외모와 품격을 지닌 배우다. 실제로 그는 여신과 여왕, 요정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블란쳇이 출연한 <나이트메어 앨리>가 개봉했다. 블란쳇은 심리학자 릴리스 박사를 연기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3월 28일(한국시각)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블란쳇의 새 영화 개봉에 맞춰 그가 출연한 작품 가운데 뛰어난 연기를 선보인 5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캐롤>(2015)

<캐롤>

<캐롤>의 제목은 캐롤 에어드(케이트 블란쳇)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다. 1952년, 스릴러 작가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소설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이다. 동성애를 다루는 소설이라 필명을 사용했다. 1990년, 작가가 본래 붙이고 싶었던 제목 <캐롤>로 재출간됐다. 제목은 ‘캐롤’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테레즈(루니 마라)가 있다. 다시 말하면 <캐롤>은 테레즈의 시선으로 본 캐롤에 대한 소설이다. 시선이 중요한 단어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젊은 여성 테레즈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 도중에 캐롤을 만난다. 보게 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캐롤은 딸의 양육권을 놓고 이혼 소송 중인 부유한 중년 여성이다. 그들을 서로 한눈에 반하고 만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그 순간을 두 인물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테레즈가 보는 캐롤과 테레즈를 보는 캐롤이 교차한다. 관객은 먼저 테레즈의 눈으로 캐롤을 보고, 다음에는 캐롤의 눈으로 테레즈를 본다.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던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이렇게 사랑하는 연인을 향한 시선만이 끝없이 교차한다. 이런 시선의 교차와 연출이 <캐롤>의 걸작으로 만들어주는 절대적인 장치다. 그리고 이 장치는 배우들의 연기로 작동한다. <캐롤>을 통해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는 칸영화제부터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거의 모든 시상식의 후보가 됐다. <캐롤>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반복되는 것은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1945)를 오마주한 것이다. <캐롤>을 다 본 다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만 다시 보는 것 혹은 그냥 <밀회>를 찾아보는 것도 재밌는 영화 감상법이 될 것이다.


<블루 재스민>(2013)

우디 앨런의 영화를 이전에 본 적이 없다면, <블루 재스민>을 첫 관람작 후보에 올려보는 걸 추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꽤 재밌다. 이 재미는 다양한 인물에게서 발생하는 데 당연하게도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주인공 재스민이 가장 눈에 띈다. 재스민은 여전히 샤넬 재킷과 에르메스 버킨백이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수많은 여성과 바람을 핀 남편이 사기 혐의로 체포된 이후 몰락한다. 뉴욕 상류층의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완전히 파산한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동생 진저(샐리 호킨스)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무작정 찾아간다. 우디 앨런 감독은 뉴욕(과거)과 샌프란시스코(현재)에서 살고 있는 재스민의 두 세계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우디 앨런 감독은 뉴욕을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블루 재스민>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장면이 훨씬 더 인상적이다. 치과 병원의 접수원 일자리를 제안하는 동생의 지인을 앞에 둔 재스민의 일그러지는 표정, 허드렛일은 하기 싫다고 소리를 지르는 재스민의 짜증 섞인 표정, 결국 치과에 취직한 뒤 과거 자신처럼 커다란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린 중년 여성이 스마트폰의 일정을 보면서 다음 진료 날짜를 자꾸 바꾸자 신경질을 내는 재스민의 화난 표정은 모두 기가 막힌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로 완성된다. 평론가들은 <블루 재스민>에서 우디 앨런의 대표작인 <애니 홀>(1977)을 떠올렸다. <애니홀>에서 애니 홀을 연기한 다이안 키튼은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케이트 블란쳇도 <블루 재스민>을 통해 자신의 두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아임 낫 데어>(2007)

케이트 블란쳇은 <아임 낫 데어>에서 주드 퀸이라는 록스타를 연기했다. 헝클어진 머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금발 머리가 아니다. 무대에 올라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그전까지 보지 못한 블란쳇이다. 미국 팝에 대한 지식이 있는 관객이라면 주드의 외모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란쳇은 <아임 낫 데어>에서 주드 퀸이라는 이름의 밥 딜런을 연기했다. 말이 복잡한데 그건 토드 헤인즈 감독이 밥 딜런의 전기 영화를 독특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 블란쳇이 연기한 주드 퀸 이외에도 이 영화에는 밥 딜런을 연기한 다양한 배우가 등장한다. 다만 모두 똑같은 모습의 밥 딜런을 연기하는 건 아니다. 벤 위쇼는 아서 림바우드라는 시인, 크리스찬 베일은 포크계의 스타 잭과 가스펠을 부르는 존 목사, 리차드 기어는 무법자 빌리 더 키드, 마커스 칼 프랭클린은 떠돌이 흑인 소년, 히스 레저는 잭을 연기하는 영화배우 로비를 연기한다. 사실 이 모든 캐릭터가 밥 딜런이다. 헤인즈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밥 딜런의 여러 면을 다양한 배우의 연기를 통해 표현했다. 한 인물의 주요한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맞춰 돌아보는 형태의 기존 전기 영화는 많이 다른 형식이기에 <아임 낫 데어>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중심이 되는 이야기 틀이 없기 때문이다. 뮤직비디오처럼 이 영화를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러닝타임 135분 동안 딜런의 노래 59곡이 관객의 고막을 자극할 것이다. 밥 딜런의 팬이 아니라면? 그래도 <아임 낫 데어>를 봐야 할 이유는 많다. 이 포스트의 주제에 맞게 이야기를 하자면 블란쳇의 완전히 색다른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2015년, <캐롤>에서 블란쳇과 다시 만난 토드 헤인즈 감독은 ‘씨네21’ 인터뷰에서 “두 번째 일하면서 그가 훌륭한 배우라는 사실을 알았냐고? 아니다. <아임 낫 데어> 작업할 때 이미 깨달았다. 케이트의 대기실에서 밥 딜런의 옷을 입고 가발을 쓴 그녀의 모습을 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에비에이터>(2004)

캐서린 햅번 대 케이트 블란쳇. <에비에이터>에서 블란쳇은 오스카 트로피만 4개를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 케서린 햅번을 연기했다. <에비에이터>는 하워드 휴즈라는 흥미로운 인물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다. 20세의 나이에 억만장자가 된 하워드 휴즈는 할리우드 쇼비즈니스계의 거물이 되어 캐서린 햅번을 만났다. 이후 하워드 휴즈가 어떻게 항공 재벌이 되는지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열연으로 완성된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포스트에서 중요한 건 블란쳇이 연기한 캐서린 햅번이다. <에비에이터>의 블란쳇은 바로 위에서 소개한 <아임 낫 데어>의 밥 딜런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캐서린 햅번을 연기했다. 외모, 의상, 악센트까지 거의 완벽하게 재연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임 낫 데어>도 밥 딜런과 비슷한 외모와 행동 특징을 보여줬지만 그것은 밥 딜런이라는 위대한 가수가 대중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의 재현이었다. <에이비에이터>의 경우와는 다르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에비에이터>의 재연 연기는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블란쳇은 이 캐릭터(?) 아니 선배 배우를 연기한 결과로 두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얻었다. 언젠가 블란쳇을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가 등장해 오스카 트로피를 받아갈지 모를 일이다.


<엘리자베스>(1998)

<엘리자베스>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그는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로 유명하다.이른바 버진 퀸(The Virgin Queen)이다. 1999년 개봉한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논란의 작품이 된다. 당시 시상식에서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 출연한 기네스 펠트로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중과 평단은 이 결과에 동의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에게 트로피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수상 번복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논란은 오스카의 역사에서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서두에 블란쳇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왕, 요정 등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지칭한 것은 <엘리자베스>를 두고 한 말이다. 그만큼 이 영화 속 블란쳇은 영미권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블란쳇의 여왕 연기가 궁금하다면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해 먼저 공부를 좀 하고,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 속 기네스 펠트로의 연기를 먼저 본 다음, <엘리자베스>를 관람하기를 추천해본다. 이렇게 블란쳇의 연기를 보게 되면 그 진가를 만끽할 수 있을 듯하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