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래시라는 말이 이제 보편화를 넘어 남용되는 추세다. 하지만 남녀 누가 봐도 ‘멋있다’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 이 배우에겐 그 단어를 아끼고 싶지 않다. 3월 16일 개봉한 <도어맨>으로 돌아온 루비 로즈다. 여러 액션 작품에서 ‘멋쁨’을 한껏 뽐냈던 그를 좀 더 알고 싶은 관객들을 위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다.
모델에서 배우까지
모델, TV 호스트, DJ, 아마추어 복서, 그리고 배우. 루비 로즈를 수식하는 직업은 다양하다. 그가 최근 몇 년 사이 급부상하기 전, 모국 호주에서 여러 방면에 도전했기 때문. 1986년에 태어난 루비 로즈는 엄마 카티아 랑겐하임(Katia Langenheim) 밑에서 자랐다. 카티아의 남편은 카티아를 몹시 학대하는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카티아는 이런 고통을 딸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아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 카티아는 언제나 딸 루비의 편이었는데, 루비가 성적 취향으로 학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딸의 안전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해변가로 이사하기도 했다.
루비 로즈는 2002년 호주의 패션지 ‘걸프렌드’에서 모델로 데뷔했다. ‘걸프렌드’는 매년 신인 모델을 뽑는 경연을 열었는데, 루비 로즈가 2002년 경연에서 2위로 뽑혔다.(그해 1위는 캐서린 맥닐이었다) 이런 경연에서 장점이 있었는지, 2007년엔 호주 MTV에서 신입 VJ를 뽑는 경연에서 1위를 차지했다. 당시 경쟁률은 2000:1. 그는 100분에 맥주 100잔 마시기 같은 희한한 도전도 과감하게 소화했다. 나중에 말하길 그는 “모델이 되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더 예쁘고, 더 마르고, 그런 변화를 기대받는 것이지만 MTV는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걸 원했다”고 언급했다.
이듬해 2008년, 루비 로즈는 스크린에 데뷔한다. 첫 작품은 <스위트 포 플뢰르>(Suite for Fleur). 호주의 코미디 영화인데 자국에서만 개봉했는지 IMDb에조차 정보가 없다. IMDb 기준 데뷔작은 2011년 단편 영화 <보이즈 라이크 유>, 장편 영화 데뷔는 2013년 <어라운드 더 블럭>이다. 2013년 장편 영화에 데뷔했지만, 한동안 긴 공백기를 갖는다. 이때 로즈는 자신이 직접 각본, 연출, 출연까지 도맡아 한 <브레이크 프리>라는 단편 영화를 작업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루비 로즈의 고민이 담긴 이 5분짜리 짧은 영상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하게 했다. 그의 이 도전적인 자세는 입소문을 탔고, 엄청난 기회로 돌아왔다.
단번에 세계적 스타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브레이크 프리>는 그를 단번에 세계적인 작품에 합류시켰다. 루비 로즈는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스텔라 역 오디션 제안을 받았다. 시즌 3에 등장해 주인공 파이퍼와 교감을 쌓아가는 스텔라는 루비 로즈의 매력을 보여주기 충분했다. 무엇보다 언더컷 헤어의 세련된 스타일과 특유의 ‘잘생쁨’은 시즌 3에 처음 등판한 후속 주자임에도 그를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멋진 스텔라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찾는 제작자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이후 이어진 <레지던트 이블: 파멸의 날>, <트리플 엑스 리턴즈>, <존 윅 - 리로드> 출연은 루비 로즈의 이미지에 대한 수요를 명백하게 보여줬다. 특히 <존 윅 - 리로드>의 아레스는 대사 한 줄 없이 캐릭터와 배우의 매력으로 다소 부족한 연기력을 채우며 전 세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기에 <피치 퍼펙트 3> 카말리티 역까지 소화하면서 그의 이미지가 오직 액션 장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최초의 배트우먼…이었는데
이 기세를 타고 루비 로즈는 2018년, The CW 드라마 <배트우먼>에 캐스팅됐다. 그것도 드라마 하나를 끌고 갈 메인롤 케이트 케인/배트우먼으로 낙점된 것이다. 시작부터 순조롭진 않았다. 케이트 케인이 코믹스 원작에서 레즈비언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루비 로즈가 “레즈비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또 유대인 캐릭터인데 유대인 태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코믹스 캐릭터에 맡았던 많은 배우들처럼) 우직하게 작품에 올인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예고편 공개에서부터 작품에 대한 설왕설래가 오갔고 이런 반응은 드라마 시작 전부터 불안요소로 남았다. 초반에 비해 시즌 막바지에서 점점 평가가 좋아지긴 했다. 그런데 다음 시즌에 기대를 품기도 전, 루비 로즈는 시즌 1을 마지막으로 <배트우먼>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케이트 케인은 드라마에서 ‘실종’ 처리됐고 <배트우먼>은 드라마의 오리지널 캐릭터 라이언 와일더(하비시아 레슬리)가 대신 자리했다.
루비 로즈는 2021년, <배트우먼>이 시즌 3를 준비하고 있을 때 본인이 <배트우먼>에서 하차한 이유를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촬영 도중 큰 부상을 입었을 때 한 임원이 ‘10일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제작진 전체를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냈다는 것. 로즈는 이런 협박을 비롯해 촬영 현장의 부조리한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해고당했고 절대로 <배트우먼>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워너브러더스(The CW의 모회사)는 로즈의 증언이 거짓말이며 오히려 로즈가 촬영장에서 보인 태도 때문에 그를 하차시킨 것이라고 반박했다. 2021년 10월에 서로를 향한 주장 이후 잠잠한 상황에서 <배트우먼>은 시즌 3까지 순항을 마쳤다.
▶ 루비 로즈는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했다. 그의 대부이자 호주의 유명 복서 라이오넬 로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예명이자 그의 이름 루비 로즈(본명은 루비 로즈 랑겐하임) 또한 라이오넬 로즈의 이름을 본떠 지었다. 다만 라이오넬의 아내와 루비 로즈 간의 증언이 엇갈리기도. 제니 로즈는 루비 로즈를 6살 때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루비 로즈는 사실이 아니며 라이오넬과의 유대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반박했다. 라이오넬 로즈가 루비 로즈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건 사실인데, 당사자인 라이오넬 로즈가 2011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찌 된 일인지는 알 방도가 없다.
▶ 몸에 문신이 정말 많기로 유명하다. 그중엔 앞서 언급한 라이오넬 로즈에게 헌정하는 것도 있다. 연예계 데뷔 후에도 문신을 수정하거나 추가하고 있다. 보통 50~70개 사이로 추정하는데, 2018년 인터뷰에서 109개라고 밝힌 바 있다. 어느 하나 허투루 하지 않고 고심해서 새긴, 자신 인생의 타임라인과 같다고 한다.
▶ <메가로돈>을 촬영하던 중 익사할 뻔했다. 헤엄쳐서 도망가는 장면을 촬영할 때 의상이 너무 무거운데다 신발에 물이 차서 점점 가라앉았다. 수중 세트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던 중에 대기하고 있던 안전요원들이 그를 잡아 끌어올려줬다.
▶ 레즈비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젠더 플루이드라고 한다. 젠더 플루이드는 유동적인 성 지향성을 이르는 말로, 본인의 젠더를 남녀 중 하나로 딱 규정하지 않는 분류를 지칭한다. 어릴 적엔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레즈비언이 아닌 젠더 플루이드라고 소개한다.
▶ 현재 차기작으론 <더 요트>(The Yacht)와 <1UP>가 후반 작업 중에 있다. <더 요트>는 3명의 강도에게 하이재킹 당한 요트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패닉 룸> 요트 버전이라고 소개하며 루비 로즈가 이 여성 주인공을 연기한다. 테일러 스위프트, 힐러리 더프, 제스 글린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데클란 화이트블룸의 장편 데뷔작. <1UP>는 남성 동료들의 성차별에 대학 e스포츠팀에서 나와 새로운 팀을 꾸리는 여성 게이머를 그린 코미디 영화. 루비 로즈는 주인공 슬로운(하리 네프)의 새로운 동료 파커로 출연한다. 원래 엘리엇 페이지가 이 역에 내정돼 있었는데 그가 성전환을 해서인지 루비 로즈로 대체됐다. <팬보이즈>를 연출한 카일 뉴먼 감독의 신작. 이외에 북미에선 공개했으나 국내엔 상륙하지 않은 <SAS 특수부대: 라이즈 오브 블랙 스완>이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