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속적 사랑, 절대적 사랑. 루이스 웨인(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사랑’은 불가능하지 않다. 아내 에밀리 리처드슨(클레어 포이)은 그의 삶을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단박에 바꿔놓았다. 나날이 새롭고 더없이 근사한 사랑의 행로에 취한 루이스에게 에밀리는 세상이란 본래 아름다운 것이라 답한다. “이것만 기억해. 아무리 인생이 고되게 느껴져도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영화의 원제는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 루이스 웨인의 전기적 삶이다. 루이스는 전기에 집착했다. 그는 전기를 단지 전구에 불을 밝히는 힘이 아니라, “신비로운 자연의 힘”이자 “삶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여는 열쇠”로 여겼다. 전기를 향한 강박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카메라는 그를 사로잡은 순간에 집중하며 루이스 웨인의 전기(傳記)를 써 내려간다. 그는 열정과 집중력이 폭발하는 찰나를 기민하게 포착하는가 하면, 종종 기이할 정도로 팽창하는 에너지에 둘러싸인다. 그중 손끝을 저릿저릿하게 하는 ‘사랑’은 그에게 가장 강력한 전기(電氣)다.
루이스가 아버지를 여읜 1881년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산업혁명과 제국주의가 유럽 전역을 휩쓸고, 곳곳에서 전통과 현대의 가치가 충돌하는 빅토리아 시대. 그는 쇠락한 영국 귀족 가문의 장남이자 유일한 아들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루이스에게 곧 막대한 책임으로 돌아온다.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부양해야 할 식구만 여섯, 기울어진 가세를 어떻게든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루이스는 가장 역할을 거뜬히 해낼 만한 인물이 아니다. 전기를 중심으로 그의 관심사는 사방에 뻗어 있다. 청년기의 루이스는 특허 출원에 매진하는 발명가이고, 화성악부터 다시 공부하라고 핀잔받는 오페라 작곡가다. 의기양양하게 들어간 권투 시합장에선 매번 우스꽝스럽게 얻어터진다. 그에게 그림은 생계를 유지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는 신문사의 프리랜서 삽화가로 일하며, 농업 박람회에서 발견한 황소를 재빠르게 스케치북에 담아낸다.
훗날 루이스의 든든한 조력자로 자리매김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운영자 윌리엄 경(토비 존스)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첫 번째 인물이다. “황당한 소동을 벌이는” 괴짜 중의 괴짜지만, 사진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에 루이스의 그림은 독자에게 충분히 흡입력을 지닌 콘텐츠다. 예리한 관찰력과 표현력은 물론, 양손을 사용해서 스케치하는 압도적인 작업 속도에 놀란 윌리엄은 루이스에게 정규직을 제안한다. 다만, 영화는 광기에 가까운 천부 재능이나 조력자를 자처하는 우정 어린 관계 대신 로맨스에 집중한다. 에밀리와의 사랑은 루이스가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는 힘이며, 그가 말년에 몸과 정신이 쇠약해진 채로 빈곤자 병동에 머무는 1925년까지 약 40년에 다다르는 세월을 관통하는 주제다. 둘의 사랑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닥친다. 여동생들의 가정교사로 고용된 에밀리는 하층 계급인 데다, 루이스보다 열 살이나 많았다. 그러나 그는 에밀리의 다정하면서도 대범한 면모를 갖춘 성품, 자신만큼이나 다양한 분야를 파고드는 지적 탐구심에 곧장 빠져든다.
루이스와 에밀리의 행복은 그리 오래지 않는다. 가정 내 불화를 무릅쓰고 감행한 “더러운 결혼”은 가문의 평판을 고약하게 추락시켰고, 여동생들의 혼삿길이 막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밀리가 병에 든다. 유방암 선고를 받은 그날, 부부는 정원에서 혼자 우는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온다. 그때부터 루이스는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저 묘사하는 것을 넘어, 고양이를 의인화하며 각각에 캐릭터를 부여한다. 캔버스에서 고양이는 나비 넥타이를 목에 걸고 홍차를 마시며, 흥겨운 파티를 연다. 당시 고양이는 신비하거나 사악한 존재로 취급됐고, 개만큼 사랑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회화 주제로 삼는 것 또한 생경한 일이었다. 에밀리는 “고양이를 재밌는 존재로 봐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일 거야”라며 루이스의 작업을 지지한다. 그녀는 그림 출판을 독려하는 동시에, 절망과 부담으로 무너져가는 루이스를 마지막까지 보듬는다.
루이스가 내민 그림 앞에서 윌리엄은 감탄과 연민을 담아 말한다. “이리도 밝은 그림을 어찌 그리는지. 이 암울한 시기에.” 루이스는 슬픔을 매개 삼아 스스로 타오르는 예술가다. 아내, 고양이, 어머니와 여동생 등 그는 가까운 사람을 연거푸 잃고 상실의 고통에 시달린다. 괴로움이 심해질수록, 그림은 다채롭고 풍성해진다. 반면, 이별과 경제적 무능을 비롯한 불행 속에서 그의 망상 증세는 점차 위기 수준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전기가 발생하는, 루이스 웨인이 전기를 목격하고 체험하는 광휘의 순간을 최대한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한다. 오렌지빛이 그윽이 감도는 화면은 에밀리와의 평온한 사랑을 표현하고, 렌즈 플레어를 적극 활용한 환상적 풍경은 혼란스럽게 진동하는 루이스의 내면을 암시한다. 굴절과 번짐을 거듭하며 둥그렇게 퍼져나가는 빛은 때때로 눈물 자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레이션을 맡은 올리비아 콜맨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나긋한 음성으로 루이스 웨인을 묘사하고, 능청스럽게 관객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클레어 포이는 <레커스>(딕티나 후드, 2011)에 이어 두 번째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호흡을 맞췄다. 생사 기로에 선 인물을 연기하면서도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클레어 포이 덕분에, 에밀리는 폭풍우 같은 시간을 용감하게 받아들인 인물로 남는다. 누구보다 영화에서 빛나는 이는 베네딕트 컴버배치다. 그는 불세출의 탐정 ‘셜록’과 천재 외과 의사 ‘닥터 스트레인지’를 탄생시켰고, <이미테이션 게임>(모튼 틸덤, 2014)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 해독가로 명성을 떨쳤던 실존 인물 앨런 튜링으로 분했다. 인물 창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온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이번 작품에서 창의적 예술가이자 동시에 온갖 문제에 뒤얽혀 신음하는 복잡한 남자로 변신한다. 순진하고 열정 넘치는 청년부터 회한에 잠겨 낮은 울음을 내뱉는 노인까지 공들여 그려내며, 다시 한 번 유감없이 역량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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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