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수직이다. 번듯한 고층 건물이 쭉 뻗은 도로를 직각으로 가를 때, 사람의 질서 또한 위아래로 나뉜다. 성별과 나이, 학력과 재산, 사람의 높낮이를 결정하는 조건이 어디 한둘인가. 거부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는 엄연한 위계 속에서 영진(이태경)의 위치는 애매하고 난감하다. 연애도 한 번 못 하겠구나 싶어 결혼정보회사를 찾아 가지만 업무 전화를 받자마자 쏜살같이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 영진은 딱 봐도 못 말리는 워커홀릭.

그러나 수년 째 휴일까지 반납하며 업무에 매진하는 영진에게 돌아오는 건 합당한 보상이 아니라 “만년대리” 딱지다. 경력은 착실히 쌓이는데,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 “어차피 결혼하면 일 제대로 못 하잖아” 부장은 승진에서 연거푸 밀려나는 영진을 외면한다. 회사 내 해결사로 불리며 온갖 뒤치다꺼리를 도맡으나 디자인 1팀도 아닌 2팀에 소속된 영진은 진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한다. 여기서 집어치우면 영락없는 낙오라고 연신 채찍질하며 간신히 버티는 영진 앞에 억장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다.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사무실에 나타난 남자, 준설(이한주) 때문이다.

영진이 요령도 눈치도 없이 일만 했다면, 준설은 요령과 눈치로 여기까지 왔다. 대학에는 기부 입학했고, 엄마 ‘빽’으로 취직했다. 낙하산 타고 나타난 준설은 출근 첫날부터 영진과 신경전을 치른다. 필요하지도 않은 자료를 정리해오라고 요구하거나 갑자기 청소를 시키는 등 대부분 준설 쪽에서 일방적으로 거는 싸움이다. 영진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자세를 고수하지만, 술을 몇 잔 들이마신 어느 밤 버럭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 “과장님이 내 자리 뺏었잖아요!”

한데, 상대의 반응이 뜻밖이다. 준설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말한다. “죄송해요. 그런 생각 한 번도 못 해봤어요. 항상 무시당한다고만 생각했지.” 준설이 끌어안고 사는 열등감과 피해 의식을, 겁이 나서 그가 수시로 몸집을 부풀린다는 사실을 영진은 모르지 않는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던 두 남녀는 서로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을 알아채며, 조금씩 미소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회사에선 싸우고 퇴근하면 화해”하며 설렘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연애는 도무지 순조롭지 않다. 회사와 부모로부터 인정받길 원하는 준설은 영진의 디자인을 가로챈다. 신제품 디자인 발표회가 끝난 후 영진이 항의하자, 이번엔 억울함을 토로한다. “나도 남자인데 찌질해 보이고 싶지 않아. 좀 도와주면 안 돼?”

영진과 준설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둘의 차이는 두드러진다. 영진에게 일과 사랑을 병행하기란 절대 쉽지 않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믿음과 애정을 기반으로 평등한 관계를 일궈나가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다툼을 반복하는 동안, 두 인물은 점점 초라해진다. 준설은 성공을 위해 신의를 내팽개치는 “양아치”가 되고, 영진은 그만의 개성과 특징을 잃은 채 “이런 것도 모르는 여자”가 된다.

<평평남녀>는 질문한다. 성차별이 여전한 사회에서 남녀의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직을 미덕 대신 부덕으로 치부하는 조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과연 무얼 의미하나? 영진은 애인과 동료들에게 자주 어떤 여자로 불린다. 보통 여자와는 다른 여자, 다이아몬드를 갖다 줘도 반응이 없는 이상한 여자, 자고로 여자라면 살짝 비치는 검은색 스타킹을 신어야 제맛인데 그걸 모르는 센스 없는 여자. 영진은 자신을 가로막는 말과 시선에 힘겨워하지만, 납작하게 뭉개지는 상황을 그저 두고 보진 않는다. 일도 사랑도 엉망진창으로 끝날지언정 화가 나는 만큼 싸우고, 늘 그렇듯 솔직담백한 말투로 다짐한다. “지금부터는 나를 위해 모두 해보려 한다.”

<평평남녀>는 <이매진>(2011) <파란 입이 달린 얼굴>(2018)을 연출한 김수정 감독의 신작. 그간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계급적 갈등을 들여다본 감독의 새로운 시도다. 한층 빠른 호흡으로 극을 전개하며 곳곳에 유머도 심어놓았다. 남녀의 연애를 화두로 삼아 로맨틱 코미디의 장르 규칙을 활용하면서도,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그만의 예민한 시각은 여전하다.

캐릭터를 강조하는 영화에서 배우들은 단연 빛을 발하는 존재다. 이태경은 투명한 눈과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영진을 올곧게 그려낸다. 스크린에서 이태경이 힘주어 소리칠 때, 평평한 표면을 뚫고 나오는 울퉁불퉁한 에너지가 영진에게 고스란히 이식된다. 장편 주연이 처음인 이한주는 유연히 움직이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가 기울인 애정과 정성 덕분에, 준설은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로 남는다. 김수정 감독의 <해변의 캐리어>(2017)에 출연했던 박종환은 전작에서 구현해낸 캐릭터를 옮겨와 일순 긴장을 불어넣는다. 서갑숙은 “여배우는 지겨워서” 연기를 관둔 서갑숙으로 등장한다. “내 마음대로 속도를 낼 수 있”어 택시 운전이 좋다는 그는 작품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유로운 태도로 이야기 폭을 한껏 넓혀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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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