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내가 반수(일단 대학교를 등록해둔 뒤 휴학계를 내고 다시 수능을 준비하는 일)를 준비했던 학원은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있었다. 평생을 서울의 서쪽 끄트머리에서 살다가 갑자기 강남 8학군 한가운데로 다니는 기분은 묘했다. 같이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 중에는 뉴스에나 나오는 강남의 고급 주상복합에 사는 애들도 있었는데, 보안카드로 열리는 문을 몇 차례 통과해 놀러간 그 집에서 나는 북극의 빙하를 녹여 만들었다는 고급 생수를 대접받았다. 물의 맛이 특별하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수 만년간 얼어 있던 북극의 빙하를 생수로 가공한 회사나, 그걸 일상적으로 마시는 이들이 있다는 건 인상적인 일이었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를 살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경험하는 세상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은 확실히 묘한 것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저녁 강의가 시작하기 전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나와 친구들은 학원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서 양재천 너머 고층빌딩 숲이 만드는 야경을 구경하곤 했다. 타워팰리스를 필두로 하늘을 향해 앞다투어 솟구친 빌딩들은 저마다 집요하게 반짝였다. 우리는 마치 ‘불멍’이나 ‘물멍’을 하듯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붕에 앉아있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놈은 건축과에 가서 저런 건물들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놈은 나도 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저렇게 높은 건물의 사무실 불을 켜고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나처럼 그저 잠시 문제집과 모의고사 시험지가 아니라 야경을 바라보며 밤 공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생각이 없는 놈들도 많았으리라.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발광하는 빌딩숲을 볼수록, 양재천 맞은편에 형성된 판자촌 구룡마을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군사정권이 거리 미화를 이유로 강제수용했던 도시빈민과 부랑인들을 분산 배치해 강제 이주시킨 것이 그 출발점이었던 구룡마을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대 초반 도곡동 판자촌 철거를 거치며 그 규모가 부쩍 커졌다. 가난한 이들은 빛나고 멋진 것들을 새로 짓겠다는 도시의 계획에 늘 제 터전을 빼앗기며 쫓겨났는데, 그렇게 쫓겨난 이들이 강제 이주로 형성되어 있던 구룡마을에 모인 것이다. 하지만 도시는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다. 도시미관에 안 좋다고 집을 허물고, 살던 곳에서 나가라고 쫓아내고, 길 위에 있으니 강제수용하고, 이 곳으로 강제 이주시킨 도시는, 2010년대 초반까지도 이들의 주민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불법으로 얼기설기 지은 주택에 주민등록하는 걸 받아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반수가 끝난 뒤 나는 한동안 바쁘게 살았고, 부끄럽게도 바쁘다는 핑계로 그 광경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어쨌거나 나는 서울 서쪽에 살았고, 학교는 서울의 북쪽에 있었으며, 스물 넷이 되던 해부터 지금의 일을 시작했으니까. 그다지 즐겁지 않았던 재수학원 시절의 기억을 굳이 떠올릴 만한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핑계야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 광경을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를 본 뒤에야 간신히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월트 디즈니가 미국 플로리다 월트 디즈니 월드 건설에 붙인 프로젝트 명이었다. 월트 디즈니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테마파크와 가장 진보적인 미래형 주거시설을 건설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전세계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한 자리에 모아둔 일종의 지구촌 테마파크 ‘엡콧(EPCOT)’과 고급 주거단지 ‘셀러브레이션 플로리다’의 형태로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미국인들이 꿈에 그리던 마법 같은 미래 너머에, 월트 디즈니 월드 주변에 포진한 싸구려 모텔 촌들이 있다. 월트 디즈니 월드는 워낙 넓은 탓에, 전체를 다 보려면 넉넉히 일주일은 잡아야 한다. 디즈니가 직접 운영하는 호텔과 리조트가 스물여덟 개나 되지만, 모두가 비싼 호텔 값을 감당할 수는 없지 않겠나? 모텔 촌들은 그런 관광객들을 노리고 건설되었고, 그래서 – 한국의 교외에 지어진 러브호텔들이 흔히 그런 것처럼 - 어설프게 동화 속 마법의 성을 흉내 낸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마치, 염가형 디즈니 캐슬처럼.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 집을 잃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도시빈민이 된 이들이 양산되면서, 이 싸구려 모텔들은 갈 곳을 잃은 도시빈민들이 묵어가는 달방으로 변질됐다. 월세 방이나 고시원에 들어갈 보증금을 마련할 목돈이 없는 이들이 여인숙에 달방으로 묵어가듯, 미국에서도 그런 이들이 꿈과 희망의 나라 월트 디즈니 월드를 코 앞에 둔 모텔에서 살게 된 것이다. ‘퓨처랜드’나 ‘매직캐슬’ 처럼 미래지향적이고 화려한 이름을 단 모텔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간신히 이어간다. 혼자서 여섯 살 딸 무니(브루클린 프린스)를 키우며 살아가는 스물 두 살 엄마 핼리(브리아 비나이테)가 그렇듯. 가까운 음식점 주방에라도 취직할 수 있으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면 월트 디즈니 월드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가짜 명품을 팔아서 간신히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마저 안 되면, 핼리가 그런 것처럼, 몇 안 되는 가진 것을 파는 수밖에 없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나온 뒤, 난 가끔 핼리와 무니는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두 사람이 그 눅눅하고 어두운 모텔촌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꾸려갈 수 있었을까. 서로를 너무나 진심으로 사랑한 핼리와 무니는 다시 행복한 모녀로 지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생각은 딱 그 정도 선을 벗어나지 않았고, 나는 바다 건너 미국의 도시빈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장 내 살기도 바쁜데, 내가 누구를 걱정해. 핼리와 무니를 향한 내 근심은 딱 전시하기 좋은 지점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여년 전 그 구룡마을이 아직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대책 없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 마음은 다시 복잡해졌다. 내가 처음 봤을 때에도 조성된 지 20년쯤 된 마을이었던 구룡마을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돈냄새를 맡은 투기꾼들이 발행한 입주권 ‘딱지’ 때문에 토지주들의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꼬였고, 안 그래도 복잡했던 이해관계는 재개발 방식을 두고 이견이 생기면서 더 격해졌다. 2000년대 중반부터 구룡마을 주민들은 개발방식을 놓고 ‘구룡마을 자치회’와 ‘구룡마을 주민자치회’로 나뉘었고, 구룡마을 자치회 소속 454가구는 SH공사의 토지 매입 후 재개발을 거쳐 2020년 재입주한다는 조건 하에 2017년 구룡마을을 떠났다. 3년만 SH공사 소유의 임대주택에 머무르면 다시 터를 잡고 살았던 구룡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은, 개발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아직까지 제2의 고향인 구룡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대토지주와 토지신탁을 끼고 주택조합이 재개발을 진행하는 환지방식 공영개발을 주장한 구룡마을 주민자치회 소속 주민들 650여명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영화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끝나고, 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나온 관객의 머릿속에서 질문을 던지며 더 오래 지속된다. 하지만 가끔씩 영영 끝나지 않는 영화들도 있다. 누군가에게 영화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일 테니까. 영화를 보고 나온 나 같은 사람들이 제 감상을 정연하게 정리해 그럴싸한 글로 남긴 뒤 다른 영화들을 보며 천천히 잊어가는 동안, 누군가는 그 현실을 계속 살아간다. 빛나는 월트 디즈니 월드 옆 모텔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핼리와 무니가 그렇듯, 밤마다 양재천을 불빛으로 물들이는 고층 건물들 맞은편의 구룡마을이 그렇듯. 어쩌면 영화가 끝난 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