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에서 철거 공사가 시작된다. 내년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는 듯 목련은 유난히 탐스럽고, 주민들은 새 보금자리를 찾아 하나둘씩 떠나간다. <봉명주공>은 어수선하면서도 한적한 분위기가 감도는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는 동시에, 그곳에 찾아온 방문객의 뒤를 조용히 따른다. 카메라를 든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지난 계절을 떠올린다. 주민들과 어울려 살구를 땄던 그날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다행히 기억을 되살려낼 사진이 남아 있다. 삽을 쥔 이들은 꽃과 나무의 뿌리를 캐내느라 분주하다. 아파트 단지를 터전 삼아 살아가던 식물 중 몇몇을 다른 곳에 옮겨 심을 예정이다. 이윽고 공사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영화는 2019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라짐이라는 결과를 먼저 알려준 후, 사라져가는 과정을 담는 셈이다. 현관 앞에 이주 공고문이 붙고, 재건축 조합 사무실에서는 신탁등기 접수를 시작한다. 그러나 ‘봉명주공’이라 부를 곳은 아직 존재하며, 아파트 단지에서는 매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1980년대에 지어진 청주시 흥덕구 봉명동의 1세대 주공아파트, 봉명주공은 풍요롭다. 입구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터주신처럼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오가는 사람들을 굽어보듯 높이 자란 나무는 둘레만큼이나 넉넉한 그늘을 내어준다. 그 곁을 지나면, 여느 아파트 단지와는 다르게 정감 어린 풍경이 펼쳐진다. 2층 내지 5층으로 된 조립식 주택과 단층형 주택이 여러 채 모여 있고, 아파트를 구분하는 동 간격은 여유롭다. 40년에 달하는 긴 세월을 거치며, 봉명주공은 하나의 마을을 이뤘다. 담장 낮은 집들 사이로 이웃간 왕래는 빈번했고, 김장철에는 품앗이가 자연스러웠다. 내 집이자 우리 동네였기에, 주민들은 아파트를 살뜰히 아끼고 또 누렸다. 볕 좋은 날이면 집 앞에 고추를 내다 말렸고, 아이들은 간이 풀장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무엇보다 주민들은 나무의 풍요를 만끽해왔다. 아파트 준공 당시 함께 들어온 조경수도 적지 않았지만, 주민들은 해마다 나무를 비롯한 온갖 식물을 손수 심었다. 덕분에 봉명주공의 사계절은 찬란하게 흘러갔다. 봄에는 사방에 꽃이 폈고, 여름엔 그늘 아래를 거닐며 새 소리를 들었다. 가을에는 열매와 단풍이 주는 기쁨에 취했고, 겨울에는 나뭇가지에 달린 눈꽃을 보며 봄을 기다렸다.

봉명주공이 처음 분양됐던 해에 이사 왔다는 한 주민의 말은 공간에 누적된 시간의 깊이를 실감하게 한다. 그는 이곳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고, 아이를 낳아 길렀다.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날 때도, 결혼한 다음 제 아이를 낳아 데리고 올 때까지도 그는 계속 봉명주공에 살았다. 두 세대의 탄생을 품을 만큼 긴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버드나무는 날이 갈수록 우거졌고, 석류와 포도 또한 알알이 익어갔다. 카메라 앞에 선 주민들은 저마다 봉명주공과의 이별에 씁쓸해한다. 미련이 전혀 없다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미련 따위 없다고 말하는 이조차 단풍나무 아래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낙엽을 맞던 가을을 그리워한다. <봉명주공>은 재개발과 재건축을 쟁점으로 삼거나, 해당 문제를 전면에 부각하지는 않는다. 고발과 폭로 대신, 영화가 선택한 것은 관찰과 경청이다. 봉명주공의 마지막 풍경을 기록하는 태도 그대로, 영화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주민들과 찬찬히 대화를 나눈다. 그때 인터뷰에는 웃음기 어린 작별 인사뿐만 아니라, 주름진 얼굴과 한숨 섞인 목소리도 두루 담긴다.

삶의 터전이었던 땅과 집은 부동산으로 전락했고, 자본주의는 개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과 환경을 고려하는 일에 가치를 우선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주민들은 각자 아쉬움을 토로한다. 늘그막에 접어든 인생이 돌연 소란스러워져서 불편하고, “지들 돈 챙기려고 지랄들이나 하는” 행태를 마주하니 속이 부대낀다. 대도시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지방 도시의 주거 생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개발 논리를 앞세우는 행정 또한 불만이다. 영화는 그러한 고충을 보고 들으며 2019년을 지나 보낸 후, 끝내 2020년의 봄으로 되돌아온다. 이제 봉명주공은 상실의 연속이다. 집이 와르르 무너지고, 나무가 무참히 잘린다. 천장에 붙인 야광별 스티커는 쓰레기가 되고, 술과 춤을 좋아한다는 할머니의 노랫소리도 끊긴다. 그렇게 봉명주공이 뒷받침하던 풍요가 전부 사라진다. 다만, 영화는 엔딩에서 새로운 땅에 나무를 심는 이들을 비춘다. 한 자리에 서 있던 나무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베는 것과 캐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애써 캐기로 한 이들 덕분에, 어떤 나무는 죽지 않고 살아서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린다. 봉명주공의 풍요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의 기억 한 조각으로, 사진과 영화로 남아서 더 나은 길을 고민하도록 오래 부추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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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