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아하는 거에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현장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현장에 있을 때가 그렇게 좋아요. 내 연기와 작품으로 관객 마음을 움직였을 땐 어떤 쾌감까지 느껴요. 저는 아직도 연기에 갈증을 느껴요

배우 이정현 @GETTY

이정현 이름 석 자를 두고 봤을 때 많은 이들이 배우 이정현이 아닌 가수 이정현의 이미지를 떠올릴 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시없을 ‘테크노 전사’로 대중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1집 <Let's Go To My Star> 타이틀곡 ‘와’, 후속곡 ‘바꿔’로 큰 인기를 얻은 그는 2집과 3집에서 ‘너’, ‘줄래’, ‘미쳐’, ‘반’ 등을 연달아 히트 시키며 독보적인 콘셉트를 지닌 가수로 입지를 공고히 다지게 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정현이 가수로 데뷔 후 배우로 직업을 전향한 케이스로 보이겠지만, 여기엔 반전이 숨어있다.

사실 이정현은 1996년 영화 <꽃잎>을 통해 배우로 먼저 데뷔했다. 당시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오디션 현장에서 특유의 당돌한 성미를 가감 없이 보여주며 3000:1의 경쟁률을 뚫고 <꽃잎>의 주연으로 발탁됐다.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 이정현은 해당 작품으로 그해 청룡영화상을 비롯 여러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 대종상의 경우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배우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정현은 <꽃잎> 이후 이렇다 할 대표작을 만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연기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 이정현을 다시 영화판으로 끌어준 이는 바로 박찬욱 감독이다.

이정현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전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가수 이미지가 너무 강했는지 한국에서는 일이 없더라고요. 중국과 일본에서는 드라마를 많이 했어요. 본의 아니게 긴 공백이 생겨버렸죠. 늘 연기에 목마른 상태였는데, 2011년에 우연히 사석에서 박찬욱 감독님을 만나게 됐어요. ‘너무 좋은 배우인데 은퇴한 줄 알았다, 꼭 다시 연기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만남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님의 단편 영화 <파란만장>에 불러주셨어요”라고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아주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2011년 단편 영화 <파란만장> 개봉 이후 11년이 지난 올해, 영화 <헤어질 결심>을 통해 재회했다. 곧 개봉을 앞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포함, 배우 이정현의 필모그래피를 다시금 되짚어본다.


파란만장

<파란만장>

박찬욱, 박찬경 형제가 아이폰 4로 촬영한 단편 <파란만장>(2011)은 이정현과 박찬욱 감독의 인연이 시작된 작품이자 그가 다시금 연기 인생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준 영화다. 이정현은 <파란만장>에서 의문의 소복 차림 여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해당 배역을 맡았던 배우 문소리가 임신으로 하차하게 되며 박찬욱이 급히 이정현에게 연락해 출연을 요청했다고. 당시 가수 활동으로 스크린을 떠나있던 이정현은 흔쾌히 노 개런티 출연을 승낙, 11년 만에 영화배우로 복귀하게 된다. 한 인터뷰에서 이정현은 “박찬욱 감독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와 <군함도>의 출연을 결정지은 것 또한 박찬욱 감독의 영향이 컸다”고 밝힌 바 있다. 이정현이 <파란만장>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범죄소년>의 장효승, <명량>의 정씨 여인,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정수남 등을 연기한 그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파란만장>

<꽃잎>으로 데뷔한 이후 영화가 많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나이와 이미지 때문에 맡을 수 있는 역이 별로 없더라고요. 성인이 되어선 좋은 작품이 안 들어오니 가수로 전향했고요. 굉장히 우울했어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었으니까요. 그때 우연히 사석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에게 '저 연기하고 싶은데 작품이 안 들어와요'라고 솔직하게 말했죠. 깜짝 놀라더라고요. 이후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작품 <파란만장> 출연을 제안했고, 이 영화를 계기로 <명량>, <범죄소년> 등의 출연으로 이어질 수 있었어요


명량

<명량>

<명량> 속 정씨 여인이 절벽에서 붉은 치맛자락을 흔드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명량>을 본 이들이라면 이정현이 연기한 정씨 여인을 뚜렷하게 떠올리겠지만, 사실 그가 등장한 건 3~4 장면에 불과했다. 적은 분량임에도 출연을 결정지은 것에 대해 이정현은 "처음부터 분량이 적은 것을 알고 시작했으니 전혀 문제 될 부분이 아니었죠. 그동안 상업영화보다는 독립영화 쪽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선배 등 정말 좋은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명량>에 합류할 이유는 충분했어요"라고 밝힌 바 있다. <명량>의 김한민 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파란만장> 속 이정현의 연기를 보고 출연을 제안했다고. 이정현은 왜군에게 가족을 잃고 혀가 잘려 말 못 하는 정씨 여인이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해석해 내기 위해 밤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이 많았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제작 초반쯤 3회를 촬영하고 6개월이 흐른 뒤에 남은 씬을 촬영하는 등 일정 또한 극한이었기에 다시 정씨 여인에 몰두하기 위해 애를 먹기도 했다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한국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라고도 불리는 이 영화는 신선한 스토리와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색감, 이와 맞물리는 그로테스크함까지 더해져 여러 방면에서 호평을 얻은 바 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열심히 살수록 나락에 빠지게 되는 정수남 역을 맡은 이정현은 광기와 사랑스러움, 애잔함을 오가는 그야말로 '미친'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2015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암살> 전지현, <차이나타운> 김혜수, <무뢰한> 전도연, <뷰티 인사이드> 한효주 등 그해 유독 쟁쟁했던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정현이 노 개런티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출연했다는 것. 앞서 이정현이 <파란만장>, <범죄소년>과 같은 저예산 독립영화에 계속해서 노 개런티로 출연하자 소속사에서 이를 반대, 출연이 무산될 뻔했으나 시나리오를 읽은 박찬욱 감독이 해당 작품에 출연할 것을 강력 추천했다고 한다. 이정현의 선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립영화 특성상 제작비가 빠듯한 상황임을 눈치챈 이정현은 자신의 사비로 스태프들의 아침밥까지 지원했다고. 이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감독 안국진은 "스태프 밥값 때문에 오전 촬영이 미뤄진 적이 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정현이 스태프들의 밥을 챙겨줬다"고 밝히며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이는 배우 이정현이 영화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2015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임과 동시에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이정현은 해당 작품을 통해 '테크노 전사'의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 완전한 영화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헤어질 결심

<헤어질 결심>

이정현은 오는 6월 29일에 개봉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통해 해준의 아내 정안 역으로 우리 곁에 찾아올 예정이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이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과거 박찬욱이 존경한다고 밝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떠올리게 만드는 설정이기도 하다. 사망자의 아내 사래 역을 탕웨이가, 형사 해준 역을 박해일이 연기하는 가운데 이정현, 고경표, 박용우 등 개성 뚜렷한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 전해지며 기대감을 상승시킨 바 있다.

<헤어질 결심>의 각본은 박찬욱과 그의 오랜 시나리오 파트너 정서경이 함께 작성했으며 <달콤한 인생>, <밀정>, <남한산성> 등을 찍은 김지용이 촬영감독을 맡았다. 2003년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 이후 <박쥐>와 <아가씨>로 경쟁 부문 후보에 오르며 '칸 영화제가 사랑한 감독'이란 수식어를 얻은 박찬욱 감독.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발표하는 신작 <헤어질 결심>으로 다시 한번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영광을 누린다.


씨네플레이 김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