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 여성 청소년이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과 휴지를 썼다는 이른바 ‘깔창 생리대’ 사건, 모두 기억할 것이다. 2016년 당시 ‘가난한 소녀의 눈물’ , ‘보편 복지’, ‘무상 생리대’ 등 다소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정치적 입장을 곁들인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혹자는 미투 폭로만큼이나 한국 여성사나 페미니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할 만큼 생리대를 인권의 영역으로 끌고 와 월경을 터부시하는 사회적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대중적 공감을 샀다. <피의 연대기>가 촬영된 것은 2017년. ‘깔창 생리대’ 공분과 맞물려 다큐멘터리는 많은 화제를 모았다.
‘월경이 어떤 느낌인지 들어볼 기회가 없었고, 탐폰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었다. 생리용품이 이렇게 다양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피의 연대기>를 관람한 한 남성의 고백이다. 하지만 여성 중에도 타인과 월경 경험을 공유하고, 다양한 생리용품을 시도해 본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상당수의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생리’는 가족 및 친구들과 나누기 어려운 개별 경험에 머물러 있으며, 생리용품 경험 또한 일회용 생리대에 집중되어 있다.
5일(생리 1회 지속 기간) X 5개(하루 생리대 사용 개수) X 400회(폐경될 때까지 대략적 생리 횟수)
=10,000(여성이 평생 사용하는 생리대 개수)
평생 만개가 넘는 생리대를 사용하고 일생의 거의 반을 월경과 함께하지만 월경 경험을 긍정하는 여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감독은 경제학적, 사회학적, 노동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월경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부재한 현실을 꼬집으며 ‘기본적 생리현상임에도 배고픔이나 빈곤과 달리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라고 토로한다. 이에 감독은 월경과 생리대의 ‘연대기(chronological)’와,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결정적 ‘연대(solidarity)’의 순간을 담기위해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를 제작한다.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 감독 개인의 생리 용품에 대한 관심이었던 만큼 <피의 연대기>는 생리 용품의 제작, 유통, 소비 과정을 통해 사회가 생리를 다루는 방식을 보여준다. '생리컵' 개발자 리오나 차머스의 생리컵 생산 노력은 전쟁으로 좌절됐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여성들에게 중요한 대안이 됐으며, 과거 똑딱이 단추에 특수 벨트까지 개발하며 '생리대 고정'에 공들인 역사는 오늘날 생리대를 구성한다. 목화솜을 넣고 손바느질한 생리대를 착용한 할머니, 휴지를 패드 대신 사용한 엄마, 다양한 형태의 생리 용품을 사용하는 친구들의 내러티브까지 더해지면서 다큐는 생리라는 키워드로 교차하는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피의 연대기>는 또한 오랜 가부장제의 역사와 남성 중심적 사회가 월경을 둘러싼 담론을 구성하는 과정과 그것이 여성의 몸에 남긴 낙인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경, 역사적 사료 속에 등장하는 생리는 ‘타락의 지표이자 원죄의 결과(중세 기독교의 해석)’이며, '강을 오염시킨 주범(동아시아 불교의 해석)'으로 여성은 <혈분경>을 읊고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이다.
오늘날 월경에 대한 중세적 미신은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혐오는 남았다. ‘폐경’이나 ‘월경전증후군PMS’ 같이 근대 의학에 의해 발명된 용어들은 과학의 탈을 쓰고 '여성을 감정적, 지적으로 문제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레임은 여성비하 발언을 지적한 폭스뉴스의 앵커 매긴 켈리를 향한 트럼프의 월경 비하 발언으로 발현되고, '여자는 기저귀를 차서 목사가 될 수 없다'라는 한국 목사의 혐오 발언이 된다. 김보람 감독은 기사 댓글에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이 '생리충'이라고 말하며, '생리'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단어에 충격을 받았다 고백한다.
하지만 다큐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남녀 청소년들이 월경에 대해 진지하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 나누는 교실 장면은 정말 반갑다. 10대 때 이미 생리컵 사용법을 숙지하지만, 처녀막이 순결을 의미한다는 오래된 거짓 정보 또한 동시에 접하는 다큐 속 청소년들. 감독이 <피의 연대기>의 '12세 관람가 상영 등급'을 받기 위해 애쓴 이유다.
월경에 대한 인식은 실로 많이 변했다. 생리대는 혐오감을 줄 수 있는 품목이라며 관련 방송광고가 금지되었던 1990년대 초반과 '생리는 파란색이 아니다.'라며 붉은색 생리혈을 노출시킨 생리대 광고가 나오는 2022년의 시간 간극만큼이나 그 논의는 진일보했다. 저소득층 여학생들을 위한 생리대 무상공급이나 가격 인하, 세금 감면 등 생리를 둘러싼 공공의 논의도 더 활발해졌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생리'가 무슨 벼슬이냐, 무상 생리대로 세금 축낸다, 일회용 쓰지 말고 면 생리대 쓰면 되지 등 월경의 본질이나 생리대 사용의 부담을 과소평가하는 이도 여전히 많다.
월경의 고통이나 불편함의 정도, 어떤 생리용품이 좋은 것인지, 정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월경을 ‘모성 보호’와 연결해 특별히 신성시하지도, ‘중세적’ 세계관을 가지고 터부시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월경'은 신화도 괴담도 아니다. '월경'은 두꺼워졌던 자궁점막이 떨어져 나가면서 출혈과 함께 질을 통해 배출되는 것으로 가임기의 여성이라면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생리적인 현상임을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감독은 자신의 몸을 긍정하게 됐다 말한다. <피의 연대기>를 통해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도 ‘맺혀 있던 게 풀리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생리는 생리고 피는 피일뿐'이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풀어 헤칠 때 감춰져있던 다양한 몸들이 보이고, 비로소 내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키워진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