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숱 많고 검은 더벅머리, 굳게 다물어진 입술, 모든 감정을 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한 눈빛과 무심하게 구부린 어깨. 애덤 드라이버가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입은 캐릭터들의 외형은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소규모 예산의 독립 영화부터 MCU 등장 이전엔 우주 최강 프랜차이즈였던 <스타워즈> 시퀄 트릴로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한결같았다. 잘 웃지 않고, 잘 울지 않는다. 대신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캐릭터를 표현했다. 대개 배우들은 카메라 너머의 관객에게 과잉된 형태의 감정을 내던지게 된다. 그건 어쩌면 '카메라'라는 매개에 희석될 캐릭터의 원래 감정을 보는 이들에게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기술일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애덤 드라이버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스크린 안에 존재했다.
2. 애덤 드라이버의 '덤덤함'이라는 항상성은 그 자신을 순백의 도화지가 아닌 회색지대로 만든다. 어떤 원색의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언제나 회색의 평범이 그를 감도는 식이다. 영화 속의 애덤 드라이버는 선악(善惡)이 선명히 구분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필모그래피는 '애덤 드라이버'라는 하나의 주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군상극(群像劇)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특징에 거의 모든 장르의 감독들이 끌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화 데뷔작인 <J. 에드가>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시작으로, 애덤 드라이버를 페르소나로 삼은 듯한 노아 바움백, 짐 자무시와 테리 길리엄을 거쳐 리들리 스콧까지 세계관 분명한 거장들의 작품으로 필모그래피를 꽉 채워 온 그다.
3. 당연한 얘기지만, 그와 함께 한 감독들만큼 애덤 드라이버는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재미있는 건 늘 덤덤한 그가 결코 덤덤할 수 없는 가족 이야기에 많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시퀄 트릴로지의 카일로 렌도, 의 클라이드 로건도 누군가의 가족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다. 특히 '결혼'이라는 테마로 접근한다면 그가 어떤 배우인지 더욱 알기 쉬워진다. 단 한 톤의 회색으로 일상을 빚어낸 <패터슨>부터 총천연색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하우스 오브 구찌>까지, 애덤 드라이버는 항상 같고 또 다른 남편이었다. 때로는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4. 애덤 드라이버에게 제71회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긴 사베리오 코스탄조 감독의 <헝그리 하트>에서 그는 미국 남자 주드를 연기했다. 원테이크로 촬영된 영화의 첫 장면 배경은 차이나 레스토랑의 좁은 남자 화장실. 주드와 이탈리아 여자 미나(알바 로르와처)는 문 고장 탓에 이곳에 갇힌 채 6분 동안의 실랑이를 벌인다. 이 6분은 온전히, 멋대로 남자 화장실에 들어와서는 초면인 사람의 똥 냄새를 타박하는 미나와 창피함을 참아가며 미나와 함께 어떻게든 화장실을 탈출하려는 주드의 대화다. 또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미나라는 우연을 주드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인생 안에 녹여 나갈지 예고한 대목이기도 하다.
오로지 장면과 대화로 유추해야 하는 극 전개 방식과 마찬가지로, 미나를 향한 주드의 당황과 분노 역시 한 꺼풀의 모호함을 입었다. 화장실 소동을 계기로 동거를 시작한 주드와 미나. 미나가 전근을 통보받아 뉴욕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자 주드는 일부러 피임하지 않고, 미나는 결국 임신한다. 주드가 원한 것이 미나였는지, 아이였는지, 가족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의 얼굴에 감도는 감정이라곤 약간의 신경질 뿐인 탓이다.
원래 가족과 깊은 유대가 없는 데다가 연고 없는 뉴욕에서 아이까지 낳게 된 미나는 우연히 형성된 가족에 비정상적 집착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주드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위치에 서게 되는데,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는 주드의 얼굴은 이야기에 서스펜스를 덧칠한다.
5. <패터슨>에서 보이는 애덤 드라이버의 감정 절제는 <헝그리 하트>와는 별개다. 그는 영화에서 패터슨이라는 마을의 패터슨이라는 버스 운전사를 연기한다. 독특한 설정이다. 만약 다른 감독과 배우가 이 설정을 썼다면 영화는 시(詩)가 되지 못했을 터다. <패터슨>은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일주일' 이상의 것을 무리하게 끌어오지 않으면서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관객에게 전부 다른 모양의 영감을 선사한다. 버스 운전사이자 누군가의 남편, 반려견의 주인, 동네 바의 단골 손님처럼 모두가 갖고 있을 다양한 사회적 이름들을 시어(詩語)처럼 툭 던져 놓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패터슨의 브이로그' 격인 이 영화에서 애덤 드라이버가 표현한 건 인물이 아닌 일상이다. 덤덤하게, 그저 존재할 뿐인 <패터슨>이란 시어는 애덤 드라이버 자체와도 닮은 모습이다.
6. <결혼 이야기>와 <아네트>에서 애덤 드라이버는 정반대의 부성을 말한다. 갓 태어난 아들을 아내의 집착에서 지키려던 <헝그리 하트> 주드의 행동과, 아들을 이용해 이혼 소송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찰리의 행동은 비슷하다. 으레 숭고하게 여겨지곤 하는 부성에서 나온 것인지, 막연한 사회적 당위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반면 <아네트>의 헨리는 아버지이지만, 응당 가져야 할 얼마간의 부성도 없는 인물이다.
다만 남편으로서 <결혼 이야기>의 찰리와 <아네트>의 헨리는 아주 말끔한 얼굴로 이기심을 꺼내 놓는다는 점이 유사하다. 배우인 아내 덕에 이전보다 더한 성공의 맛을 보지만, 결국엔 찰나의 못난 자아를 억누르지 못하고 아내를 배신한다. 애덤 드라이버가 같은 듯 다른 이 두 캐릭터를 연기하며 드러낸 욕망의 표정들은 덤덤해서 더 일상적이다. 그건 마치 나의 욕망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부르짖는 내적 외침이다. 애덤 드라이버의 쉬이 동요하지 않는 눈동자는 흥건한 아내의 피 위에서 자신의 작은 상처를 핥을 뿐인 남편들을 더 극적으로 드러냈다.
7. 최근 작품인 <하우스 오브 구찌>의 애덤 드라이버는 구찌 가문의 젊은 후계자이자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의 남편 마우리치오 구찌였다. 영화는 파트리치아의 남편 청부 살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터라 파트리치아의 폭주가 어지럽도록 시선을 뺏는다. 이 때문에 마우리치오는 그저 가스라이팅의 피해자 혹은 파트리치아를 상류층으로 옮겨 놓는 계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은 모든 순간의 선택권이 마우리치오에게 있었는데도 말이다.
파트리치아에게 업혀 내달리던 영화가 급히 차가워진 변곡점에는 애덤 드라이버의 마우리치오가 있다. 처음에는 타인을 무장해제하게 하는 허술함과 순수함을 쓰고 있던 마우리치오는 갑자기 '원래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어'라고 말하듯 파트리치아라는 말을 체스판에서 치워 버린다. 그리고 최후까지 그 냉정한 덤덤함으로 극이 더 이상 끓는점을 넘지 않도록 유지한다. <하우스 오브 구찌>는 애덤 드라이버가 회색지대의 남편으로 등장한 작품 가운데 그의 극 중 존재감이 크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기능적으로 가장 옳은 연기를 보여 준 영화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테다.
라효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