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2017)에서 한가지 흥미로웠던 설정은,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이며 국가폭력의 화신인 리처드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가 고아 출신의 언어장애인 여성인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를 보며 욕정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스트릭랜드의 억눌린 인정욕과 권력욕이 이상하게 분출되는 것일 뿐, 그 어떤 종류의 사랑도 아니다. 스트릭랜드는 볼티모어 촌구석에 처박혀 있는 것도 달갑지 않고, 상사가 자신을 썩 믿는 눈치가 아닌 것도 불안하다. 남미 강바닥에서 건져 올린 저 정체불명의 어인(더그 존스)을 연구해 소련 빨갱이들을 이길 방법을 윗선에 보고하면, 제 능력을 인정받고 국방부의 중요한 요직으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흰색 연구복 입고 돌아다니는 저 과학자 샌님들은 일을 일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빌빌거린다.

스트릭랜드는 이 모든 스트레스를 다른 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푼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난 뒤 손을 닦는 사람들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무시하고, 자신보다 더 전문가인 과학자들을 계급이 아래라고 무시하고, 흑인은 피부가 검다고 무시하고, 저 정체불명의 어인은, 매번 연구실 바닥이 피범벅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것으로 무시하고….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욕구불만은 그처럼 아래를 향한 폭력으로 분출된다. 자신이 얼마나 강력한 남성인지 증명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제 멋대로 휘두르는 것이다.

그런 스트릭랜드에게 엘라이자는 궁극의 판타지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내 눈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존재, 하지만 내가 시키는 건 묵묵히 해야 하는 순종적인 존재.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래서 스트릭랜드는 아내와 몸을 섞으면서도 엘라이자를 상상한다. 자신이 파고드는데 자꾸 아내가 뭘 말하려 들자, 스트릭랜드는 한 손으로 아내의 입을 막는다. 제발 좀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냥 내가 하는 대로 묵묵히 받아들여. 그 청소부처럼.

물론 스트릭랜드는 몰랐을 것이다. 그 순종적인 청소부가 사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어인과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고, 어인을 빼돌릴 만큼 대담한 사람이라는 걸. 연구소에서 어인이 사라지자, 스트릭랜드는 연구소 직원들을 불러 아는 것이 없는지 캐묻기 시작한다. 어인을 빼돌린 장본인인 엘라이자와 그의 친구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는, 스트릭랜드의 질문에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다.

“호프스테들러 박사가 연구실 출입하는 거 본 적 있나?”

“박사님 원래 거기서 일하시잖아요.”

“아니, 평소랑 뭐 다른 거 본 거 있냐고.”

“뭔가 ‘사소한 거’요? 본 적 없습니다.”

청소부들이 ‘사소한 것’(something trivial)이란 말 뜻을 모를까 싶어 풀어서 설명해 준 스트릭랜드의 말을, 엘라이자와 젤다는 비아냥대듯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래, 당신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함부로 무시했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줄게. 우리는 그 어떤 사소한 것도 보지 못했어.

말대꾸를 못해서 좋았던 엘라이자가 자신의 말을 가지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기미를 눈치채자, 기분이 나빠진 스트릭랜드는 분개하며 으르렁거린다. “청소부들 데리고 뭘 하겠다고. 똥이나 닦고 오줌이나 닦는 것들. 이제 나가 봐.” 노골적인 모욕을 언제나처럼 참고 돌아가려는 젤다와 달리, 엘라이자는 희미하게 조소하는 표정으로 스트릭랜드를 똑바로 바라본다. 시선을 느낀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를 돌아보자, 엘라이자는 웃는 낯으로 천천히, 정성스럽게 철자를 한자 한자 풀어 수어로 말한다. F. U. C. K. Y. O. U. 엘라이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스트릭랜드는 엘라이자가 뭔가 묻지 않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당혹과 분노를 느낀다.

스트릭랜드가 엘라이자를 욕망했던 건 엘라이자가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기 의견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 토 달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사람. 그 권력의 비대칭성이야말로 스트릭랜드의 욕정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연구소의 주요 자산인 어인을 탈취당하고 커리어가 나락으로 떨어질 마당에, 그 말 못하는 여자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심지어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자신을 비웃고 있다. 상대는 언어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고스란히 알아듣는 동시에 자신은 알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이중언어 생활자였다. 그 순간 스트릭랜드가 믿고 있었던 권력의 천칭이 뒤집힌다. 자신이 가장 만만하게 여겼던, 그래서 쉽게 지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상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보다 정보의 우위에 있다. 스트릭랜드는 분노하지만 달리 대응할 방도를 찾지 못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스트릭랜드는 영웅이 될 법한 캐릭터다. 그는 금발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건장한 비장애인 백인 남성이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정부에서 일하는 엘리트다.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나오는 50년대 SF 영화에서라면, 이런 캐릭터는 높은 확률로 사악한 괴물을 무찌르고 가련한 여성을 지켜내는 멋진 박사로 나올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에게 영감을 줬던 1954년 영화 <검은 산호초의 괴물>(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에서도, 사람들을 죽이는 괴물은 아가미 인간이었고 괴물에게 끌려간 여자를 구출하는 영웅은 과학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는 사뭇 다르다. 스트릭랜드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제 자존감을 세우려는 쇼비니스트인데, 그 비대한 자아는 엘라이자의 수어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날 만큼 연약하기 짝이 없다. 그는 자신과 다른 존재 앞에서 겁에 질리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 앞에서 패닉한다. 폭력이 저열할수록, 그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우습고 나약하다는 비밀만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람에게 희망을 찾기 어려울 때,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향한 폭력과 단절이 나를 주저앉힐 때, 나는 종종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속 엘라이자의 수어를 생각한다. 당혹감에 일그러지던 스트릭랜드의 얼굴을 떠올린다. 영화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을 틀어막고 복종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약함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사랑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우던 이들은 끝끝내 그 자리에 서서 복종을 요구하는 이들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목소리를 낼 거라고 믿으며. 그러면 조금은 다시 견딜 만해진다. 그래,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이길 것이다. 엘라이자처럼.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