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찍어달라며 준 카메라를 당신이 건네받았다. 반대로, 관광지에서 아주 낯선 사람으로부터 촬영을 부탁받았다. 두 가지 경우 당신이 찍어 내놓을 결과물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본다. 거의 눕다시피 하고는 배 힘으로 악착같이 버티고 부들부들 떨면서 조금이라도 상대의 다리가 길어 보이도록 찍으려 애쓴다면 전자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보통 적당한 거리를 두고 하나 둘 셋 정도의 신호를 준 뒤 한 번에서 두 번 정도 무심히 셔터를 누르고 끝날 작업이니 약 5초에서 10초 정도면 충분한 촬영이다. 예술이 ‘기술 이전에 태도의 문제’라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 공들여 촬영한 이미지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피사체에 대한 촬영자의 애정이 사진 한 장에도 잔뜩 묻게 돼 있다. 너무 긴장돼 덜덜 떨면서 찍은 사진이더라도, 그 설렘과 떨림만큼은 느껴질 수밖에 없다. <폴라로이드 작동법>(김종관, 2004)을 몰랐던 정유미만 보더라도 말이다.
누군가 ‘한국과 스웨덴 영화의 축제’였다고 요약한 올해 칸 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는 세계 영화사에서도 거장으로 손꼽히는 영화감독들의 수작들이 초청받았다. 마틴 스콜세지가 1978년에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도 그중 한 편이다. 워낙 알려진 영화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음악 다큐멘터리라는 차별성이 있어 이 작품을 본 영화 팬들도 많지만, 스콜세지를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1976) <좋은 친구들 Good Friends>(1991)이나 근작에 속하는 <아이리시 맨 The Irishman>(2019) 등으로만 만나는 바람에 갱스터 혹은 누아르 장르 감독으로만 알고 있는 분들도 적지 않다. 뉴욕에서도 우범지역이라고 하는 리틀 이탈리아에서 마피아와 함께 자란 감독의 유년 시절을 스콜세지의 누아르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이 의미 없거나 잘못된 접근법은 물론 아니다. 다만 그의 초기작들을 편견 없이 올바르게 바라보려면 다른 시각도 필요하다.
스콜세지는 그의 필모그래피 초기작들을 통해 본인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를 문화인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드 스탁 : 사랑과 평화의 3일 Woodstock – 3 Days of Peace & Music>(마이클 워들리, 1970)에서 100시간 남짓 촬영분에서 97시간을 덜어내고 3시간 남짓으로 압축해낸 편집에 참여해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그의 첫 영화 작업만 해도 그렇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분할 화면으로 보여주며 당대 분위기를 압축해 경제적으로 보여준 스콜세지의 편집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을 통해 스콜세지가 감독 워들리보다 더 큰 명성을 얻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후 스콜세지는 <라스트 왈츠>에서 <우드 스탁>과는 차별화된 시도를 선보이며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많은 관중을 보여주기로는 <몬터레이 팝 Monterey Pop>(D.A. 페네베이커, 1968)과 <우드스탁>에서 이미 끝장을 봤잖아?” 스콜세지는 영화 <라스트 왈츠>를 보는 관객들을 곧 콘서트의 관중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철저히 무대와 아티스트만 집중해 촬영한다. <라스트 왈츠>를 <우드 스탁>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로 만든 것이다. 풀샷에서 어쩌다 카메라에 잡힌 관객 외에, <라스트 왈츠>에서 관객을 의도적으로 촬영한 장면은 엔딩 뿐이다. <라스트 왈츠>에서 스콜세지는 카메라 렌즈를 무대 밖으로 돌리지 않고, 공연 하나가 온전히 끝날 때까지는 각각의 무대들에도 함부로 편집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라스트 왈츠>를 본 관객들이 영화 한 편을 본 수준의 감상을 넘어 공연 한 편을 압축해서 본 느낌에까지 닿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이미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스콜세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찍어달라며 준 카메라를 쓸 줄 알았던 감독이다.
<라스트 왈츠>를 만들던 당시 마티는 <뉴욕, 뉴욕>에 집중하고 있었다. 동시에 두 작품을 만드는 작업은 드물지 않지만 그렇다고 절대 간단하지 않다. 스콜세지는 ‘더 밴드’의 마지막 콘서트를 단지 16mm 필름 카메라로 찍어 기록하려 했다. 16mm 카메라는 35mm 카메라에 비해 무게도 가볍고 크기도 작아 다큐멘터리 촬영에 편리하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스콜세지는 기록용으로만 촬영하려던 기존의 기획을 발전시켰다. 카메라의 기동력보다 화면 비율을 선택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라스트 왈츠>는 전례 없이 3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공연 영화로 기록됐다. 앞서 언급한 바, 스콜세지가 <뉴욕, 뉴욕>을 마무리하던 바쁜 틈이었다.
게다가 명색이 음악 다큐멘터리인데 그렇게 음악을 사랑한다는 감독이 사운드는 대충 작업했겠는가. 스콜세지는 <라스트 왈츠>에서 7명의 동시 녹음 기사를 통해 얻은 사운드를 다시 재녹음(rerecording)하는, 말하자면 리노베이션(renovation) 과정을 거쳤다. <라스트 왈츠>는 OTT 플랫폼왓챠에서 현재 서비스 중인 작품인데 사운드가 정말 깔끔하다. ‘반드시 소리를 크게 들으라’는 감독의 주문에 토를 달 수 없다. 스콜세지의 예술혼 덕분에 <라스트 왈츠>의 주인공인 ‘더 밴드’가 설사 낯설더라도, 그들이 이룬 경지와 열정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정립된 영화 이론에 따라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재료로 감독이 재편집한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술이라면, <라스트 왈츠 The Last Waltz>는 스콜세지가 사랑한 당대의 음악을 가감없이 보여주려는 탁월한 시도가 돋보이는 예술이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완성도 높고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라면? <라스트 왈츠>를 어떻게 빼겠는가.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 영화 칼럼니스트 신동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