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부지 모 하시노?"
영화 <친구>의 야비한 선생(김광규)-실제로 극 중 이름이 없다-은 수업 중에 학생 몇 명을 칠판 앞으로 불러낸다. 성적이 형편 없어서다. 선생은 학생들의 볼을 잡고 흔들며 아버지가 뭘 하냐고 묻는다. 정말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서일 리가 없다. 아들 공부 시키려고 바깥에서 열심히 일하는 '느그 아부지'의 고통을 알라는 표현이다. '느그 아부지', 혹은 '느그 어머니'는 뭐하고 있기에 자식이 이 꼴이냐는 모욕도 내포한다.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라는 말이 부모와 자식에게 동시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배경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말이 존재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이 말이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 아닌 '자식은 부모의 거울'인 이유는 매우 단순명료하다. 부모가 먼저 태어난 탓이다. 정확히는, 부모가 먼저 세상에 나와서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가장 처음 접하는 환경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가족'이라 호명된 관계를 지워도 부모가 자식보다 어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른은 어린이를 돕고, 보호하고, 지도해야 한다. 착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지만 그러기 힘들다면 나쁜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일러줘야 한다. 낯 간지럽더라도 최소한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건 분명히 전해야 한다.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채 어른이 되기 전에 부모가 돼 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단적 상황에서 보여 주는 뻔뻔함과 이기주의를 다룬다. 소재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 현실에선 어른들이 전력을 다해 덮어 뉴스조차 되지 못한 학교 폭력 사건들이 적지 않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역시 원작인 동명의 희곡 말고도 2011년 벌어진 '대구 중학생 집단 괴롭힘 자살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 상습적 학폭에 시달리던 중2 학생이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사건은 학폭 유관기관들의 각성을 부르기도 했다.
다만 영화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인간수업>, <소년심판>처럼 성악설을 신봉하게 만드는 소년범들의 심리를 쫓지 않는다. 대신 학교 폭력 사건을 은폐하려는 가해자 부모들의 행동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실질적으로 학교 폭력의 사적 재판을 맡는 건 '힘 있는' 어른임을 재차 폭로한다.
이야기는 변호사 강호창(설경구)의 고단한 하루에서 출발한다. 그는 법정에서 의뢰인을 변호하는 대신 수감 중인 재벌의 접견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다. 아들이 다니는 국제중학교로부터 호출을 받은 그는 또 다른 세 명의 부모들과 마주한다. 병원 이사장 도지열(오달수), 국제중 학생주임 정 선생(고창석), 전직 경찰청장이자 현 치안감 박무택(김홍파) 등은 각자 한 끗발 날리는 '느그 아부지'들이다. 언뜻 선량해 보이기까지 하는 평범한 얼굴의 이들을 교장실에 모은 건 한 통의 편지였다. 학폭에 시달려 왔다는 말과 동급생 네 명의 이름을 적어 담임 송정욱(천우희)에게 보낸 채 호수에 몸을 던진 김건우(유재상)의 편지다. 편지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이 네 부모의 자식들이었다.
자식이 한 학생을 자살로 몰고 갈 정도의 학폭을 저지른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부모들은 놀랍도록 냉정하다. 강호창은 아직 작성자 김건우가 죽지 않았으니 송정욱이 받은 건 '유서'가 아니라 '편지'라고 말하고, 도지열은 혼수 상태인 김건우가 물에서 빨리 구조된 것이 다행이라며 웃는다. 그나마 경찰 출신인 박무택만이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며 이들과 선을 그을 뿐이었다. 정 선생은 교장(강신일)의 급식비 횡령을 들먹이며 사건 축소를 종용하고, 교장은 기간제 교사인 송정욱에게 정교사 채용을 약속하며 김건우의 편지를 빼앗는다.
박무택마저 경찰 연줄을 이용해 학폭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이 단순 자살로 마무리되려는 찰나, 김건우의 편지는 진짜 유서가 돼 버린다. 혼수 상태이던 김건우의 사망이 담임 송정욱의 양심선언을 부르고, 갖은 학폭 증거들이 나오며 사건은 법정으로 간다. 억지로 급히 덮은 것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제는 네 명의 학생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혐오스러운 폭탄 돌리기 끝에, 부모 뒤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가해자 한 명이 수갑을 차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한 순간에 뒤집히는 긴박함 속에서도 부모들이 지키려는 것이 자식인지 자신인지 분명치 않은 상황을 만든 건 영화의 빈약한 심리 묘사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선 작품이 늘 연출의 균열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것은 아니지만,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는 그렇게 한다. 부모들이 사건 은폐를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의 동기를 납작하게 눙치고 지나가며 영화를 도식적으로 만들고 만다. 끔찍한 내리 사랑도, 사회적 지위 박탈에 대한 우려도 읽히지 않는다. 때문에 관객들은 이들이 단지 부모라서, 자식을 위해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애써 짐작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콘텐츠가 폭력 가해자의 부모들을 다루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자식을 다그치고 반성하는 부모를 빼고는 '내 아이는 그럴 리가 없다'와 '내 아이가 그럴 수도 있다'라는 명제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자기합리화의 늪에 빠진다. 이건 굉장히 단순하고 흔해 빠진 갈등이지만 '부모로서' 하는 비상식적 행위의 동기로서는 매우 타당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의 도준 모(김혜자)가 완벽한 악인이라고 선뜻 단정 짓기 어려운 건 이 타당성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의 가해자 부모들에게선 이 같은 괴로운 인지부조화조차 목격되지 않는다. 괴물을 낳은 부모라서 악마가 된 게 아니라, 원래 악마였던 것처럼 표현됐다는 소리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학교 폭력의 끔찍함을 그저 스펙터클로 소비하기에 그친다. 시작은 멀쩡하게 사회 생활하는 '느그 아부지'들이 보여 주는 '악의 평범성'을 부각했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등장인물들의 악마적 면모만이 두드러져 불쾌감을 준다. 다만 악인들만이 미소 짓는 이 엉망진창 수라장의 압박은 보는 이들에게 어떤 사실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나라고 언제나 선한 피해자일 수는 없으며, 가해자가 됐을 때 악마로 변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 말이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