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70주년을 기념하는 공식 파티 영상에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티타임을 같이 할 상대로 패딩턴을 선택했다.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좋아하는 모자 쓴 꼬마곰을 떠올렸다면, 당신이 맞다. 영화판 <패딩턴>에 나온 CG 디자인과 배우 벤 휘쇼의 목소리를 입은 패딩턴은, 여왕과 단 둘이 나누는 즉위 70주년 기념 티타임을 엉망진창으로 망친다. 패딩턴은 두 사람이 함께 나눠 마셔야 하는 찻주전자를 주둥이채 물고 차를 마시고, 실수로 클로티드 크림을 올린 스콘을 짓이겨버린다.
그럼에도 여왕은 딱히 패딩턴을 나무라지 않는다. 패딩턴이 선량하고 정중한 속마음을 지닌 의젓한 곰이라는 걸 여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궁중 예법도 모르고 티타임 예절도 몰랐지만, 그럴 수 있지 않나. 영국에서 나고 자란 것도 아닌 이주곰인데 말이다. 그러니 영국과 영연방의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조차 패딩턴 앞에서는 화를 누그러뜨릴 수 밖에 없다. 하긴, 누가 감히 지위를 앞세워 패딩턴을 나무라겠는가. 저렇게 상냥하고 순박한 곰인데.
영국 여왕조차 눈치를 보는 존재. 패딩턴은 영국 작가 마이클 본드가 창조한 캐릭터다. 1956년 패딩턴 철도역에서 곰인형을 보고 생각에 잠긴 마이클 본드는, 2년 뒤 ‘패딩턴 역에서 인간 가족인 브라운 일가를 만나 패딩턴이라는 인간 이름을 얻게 된 꼬마곰’ 캐릭터 패딩턴을 선보였다. 곰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영국식 영어에 능숙하고, 오렌지 마말레이드에 집착적인 애정을 보이며, 모두에게서 선의와 행복을 이끌어내는 재주가 있는 공손하고 상냥한 사고뭉치 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영국을 대표하는 곰 캐릭터 패딩턴이 사실 영국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이클 본드는 패딩턴을 페루의 깊은 숲 속에서 온 안경곰으로 설정했다. 안경곰 패스투조(마이클 갬본)와 루시(이멜다 스턴튼)는 영국 출신 인간 탐험가로부터 마말레이드부터 런던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는 각종 문명을 전파받고는 영국행을 꿈꾸는데, 우연히 부모를 잃고 혼자 남겨진 새끼곰 패딩턴(벤 휘쇼)를 발견해 입양하면서 영국행을 포기하게 된다. 패스투조와 루시를 삼촌과 숙모로 모시며 자란 패딩턴은,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로 인해 가족을 잃고 혼자 영국으로 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왜 이런 설정이었을까. <패딩턴>은 20세기 세계대전을 겪던 당시의 런던을 이유로 든다. 그 때, 부모를 잃거나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 혹은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유럽 대륙에서 급하게 피난을 온 난민 꼬마들은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은 팻말을 목에 걸고 런던의 기차역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역을 지나가던 시민들 중 어린 아이 하나 정도 먹이고 입힐 여력이 되는 이들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 돌봤다고 한다. 패딩턴은 전쟁의 상처를 연대로 이겨내던 시절의 런던에 대해 들으며 자란 곰이고, 그래서 무턱대고 패딩턴 역에서 누군지도 모를 인간 가족을 기다린다.
1926년생인 마이클 본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남기고 간 흉터를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런더너들이 생면부지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가족처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걸 보며 자란 마이클 본드는, 런던이 가장 위태롭고 가난하던 시기에 오히려 평소보다 더 용감하고 풍요롭게 나누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타자를 향한 환대와 나눔의 마음, 그것이야말로 소설판과 애니메이션, 영화판에 이르는 동안 유지되어 온 <패딩턴>의 정신이다. 멀리 페루에서 와서 런던의 일상이나 관습에 무지한 존재, 인간 세계에 섞여 살아가는 곰인 탓에 자연스레 어울리는 게 때로는 어려운 존재, 그래서 매번 본의 아니게 사고를 치지만, 모두를 따뜻하게 대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존재.
그러니 패딩턴은, 영국인들이 “우리는 타자를 환대하고 이해하고 용인하는 사람들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꺼내어보는 마스코트인 셈이다. 우리들은 무뚝뚝하고 냉랭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리에게도 생면부지의 남을 챙기는 용감한 선의로 가득한 역사라는 게 있다고 말하고 싶을 때 패딩턴을 호명하는 것이다. 먼 페루에서 왔지만, 이제 명실공히 영국을 대표하는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꼬마곰 패딩턴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엘리자베스 2세가 자신의 즉위 70주년 기념 영상에서 하필이면 패딩턴과 티타임을 가지는 장면을 연출했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갈수록 보수화되어가는 영국 사회는 유럽 때문에 난민과 동유럽 이민자들을 받아야 되게 생겼다며 볼멘 소리를 하다가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다. 브렉시트 정국으로 지지를 모은 보리스 존슨 총리는, 떨어져가는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이제는 ‘나폴레옹이 정한 미터법 대신 임페리얼 단위계(영국식 야드-파운드 체계)로 돌아가자. 물건의 크기와 무게, 거리를 재는 통제권을 되찾아오자.’는 선동에 나섰다. 비영국적인 것들을 모두 내쫓고 다시 위대한 영국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선동은, 엘리자베스 2세 즉위 70주년을 앞두고 벌어졌다. 여왕이라는 거대한 상징을 향해 국민들의 애정이 모이는 시기를 노려 ‘임페리얼(제국)’이란 단어로 설득을 하겠다는 심산이었으리라.
엘리자베스 2세가 이런 영국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현실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그는 공개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밝힌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냥 짐작해보는 것이다. 하필이면 영국이 미터법에서 임페리얼 단위계로 돌아간다는 시대착오적인 결정을 내린 직후에, 그 수많은 영국산 대중문화 캐릭터 중 하필이면 페루에서 온 이민자이자 인간 사회 속 비인간 개체인 패딩턴과 티타임을 가진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진실은 영국 왕실만 알겠지만, 난 그런 이유일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어차피 영국 왕실은 정치적 코멘트를 할 수 없으니, 그런 거라면 내가 믿고 싶은대로 믿어도 좋지 않은가.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