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이 최초로 공개됐을 때, 박찬욱 감독에게 영화의 수위에 관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전작들과 달리 이번 영화에 강도 높은 폭력과 성적 묘사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이었다. 감독은 왜 유독 본인에게만 그런 질문을 하냐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헤어질 결심>을 두고 어른들을 위한, 어른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엄청난 섹스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성숙한 인물들의 복잡한 심경을 다루는 감정의 영화라는 뜻이다.

<헤어질 결심>은 자극적이고 강렬한 표현이 아니라 은근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차곡차곡 쌓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주인공은 복수심에 사로잡혀 흉기를 집어 들거나 질병 때문에 고통받는 대신, 켜켜이 교차하며 격자무늬를 짓는 시선과 말을 통해 마음을 드러내고 또 짐작한다. 그렇게 완성되는 이야기가 가리키는 곳엔 사랑이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누아르와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는데, 박찬욱 특유의 유머와 리듬을 타고 순항하다가 이내 비틀려버리고 만다.

줄거리는 용의자를 사랑한 형사 이야기로까지 축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형사인 해준(박해일)은 한 남자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을 수사하다가 변사자의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난다. 서래를 의심하고 취조하며 미행하던 해준은 “물에 잉크가 번지듯” 그녀에게 빠져든다. 서래 쪽에서도 해준에게 자연스레 호감을 품는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 좋았다는 여자와, 당신의 “몸이 꼿꼿”해서 좋았다는 남자.

해준의 말처럼 이들은 같은 종족이다.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서 이 사랑은 무럭무럭 자라나지 못한다. 감정의 파도에 몸을 내맡기기에는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해준에게는 가정이 있으며, 서래는 여전히 살인 사건의 의혹 속에 있다. 어쨌거나 이들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역설적이다. 떠나기 위해 결심까지 해야 할 정도라면, 실은 얼마나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일까. 그러한 마음에 응답하듯 은근슬쩍 운명이 개입해 방해물을 거둬드리기라도 할까? 안타깝게도 둘을 위한 우연은 여기 없다. 사랑은 미결로 남는다.

간결한 이야기를 결코 단순하지 않게 만드는 건 인물의 면면이다. <헤어질 결심>은 주인공의 성정과 특징을 묘사해야만 제대로 소개할 수 있는 영화다. 도망치고 추적하는 수사물 속 형사와 팜므파탈, 혹은 어긋난 사랑에 괴로워하는 로맨스물 속 남녀라고만 설명하기엔 해준과 서래는 독특하게 구체적이다.

말끔한 정장 차림을 한 예의 바르고 섬세한 형사. 해준은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던 인물 유형이다. 그는 취조할 때 폭력은 절대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스마트 워치를 이용해 음성 메모를 한다. 반듯한 분위기에 살짝 가려져 있지만, 해준은 아내의 말처럼 “폭력과 살인이 있어야 기쁜” 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오래된 불면증 탓에 늘 잠복 수사를 한다. 때로 졸음운전은 그의 벗이다. 요리를 즐기고, 아내와는 공무를 집행하는 것처럼 섹스한다.

한국어가 서툰 서래는 사극 드라마로 말을 익혀 사용하는 단어가 고풍스럽다. 어려운 말을 실제로 써본 다음엔 어색해서 웃어버리고 마는데, 취조받을 때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인이지만 외조부가 항일 투쟁을 했던 한국인이고, 불법 입국 후 출입국 사무소에서 일하는 남자와 결혼해 폭력에 시달리며 살았다.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담배를 한 대 피우는 여자. 얼핏 미지의 타자 혹은 남성적 로망이 투사된 대상처럼 보이지만, 서래는 욕망하고 행동하는 능동적 인물이다.

해준과 서래의 특징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사랑의 조건을 만든다. 여기서 애정을 촉발하는 건 특히나 시선이다. 훔쳐보는 자가 시선의 대상에게 예기치 못한 심리적 유대를 느낀다는 전개는 그리 새로운 게 아니다. 해준은 밤낮으로 잠복하며 서래를 관찰하는데, 때로 그의 시선은 둘 사이의 거리를 상상적으로 당겨버릴 만큼 집요하다. 그런데 영화가 전개되면서 흥미로운 일이 발생한다. 서래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는 자’의 위치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취조보다는 친밀한 사람들의 식사에 더 가까워 보였던 대화가 지나간 뒤, 해준은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다른 살인사건의 주요 용의자를 체포하러 떠난다. 그리고 서래가 그 뒤를 몰래 따라간다.

이윽고 해준이 칼을 든 용의자와 육탄전을 벌이는데, 어느새 그곳에 도착한 서래가 해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나를 보는 당신의 시선을 알고 있어. 이제 나도 당신을 볼 거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반복되는 시선의 작동은 정서의 농도를 점차 짙게 한다. 시선과 함께 말 또한 중요하다. 친절한 형사는 어떻게든 수사 용어를 쉽게 설명하려 하고, 여자는 때로 엉뚱하게 들리는 한국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한다. 자연스레 대화는 엉키고, 답변은 미뤄진다.

서래는 때로 중국어로 말하기에, 입에서 떠난 말은 즉각적으로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다. 그 말은 번역기를 통과해 기계음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그 시차 안에 놀랍고 애틋한 감정이 담긴다. 해준은 서래의 말이 때로 얼마나 적확해질 수 있는지 알아차리며 감탄한다. <헤어질 결심>은 눈짓과 목소리를 쌓아 감정의 부피를 키운다.

<헤어질 결심>은 안개의 로맨스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따옴표 쳐서 말하지 않는 영화를 보며, 관객은 용의자를 관찰하는 형사처럼 조각난 단서를 모아 사랑의 그림을 완성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했는가?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행동했는가?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파편을 모아 그려내야 하는 게 결국 영화 전체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것은 박찬욱의 영화이기에 그림은 완성되지 않는다. 멜로의 기운이 커질 때조차 사건의 그림자가 가려지지 않고,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 자꾸만 뜻하지 않게 꼬여가는 영화에서, 인물의 의도와 실수와 빈틈은 정확히 분류되지 않고 마구 뒤섞인다. 해준의 말처럼 “참 공교롭다.”

극 중 안개는 곰팡이를 만들어내는 물리적 실체이기도 하다. 영화의 후반부, 흩어졌던 인물들이 다시 모이는 이포는 안개로 자욱하게 뒤덮인 도시다. 영화 속에서 안개가 결정적 역할을 하는 대목은 없지만, ‘햇빛을 가리는’ 안개는 해준에게 불면과 우울을 심었다. 그러고 보면, 깊은 허무와 무거운 피로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해준과 서래는 박찬욱의 다른 인물들과 충분히 겹쳐두고 볼 만하다. 후자의 그들이 무섭게 폭발하고 뜨겁게 분출하며 다른 시공간으로의 과격한 이동을 꿈꿨다면, 해준과 서래는 안으로 삭이다가 말 그대로 구덩이를 판다. 감독의 변화를 탐색하기 위해서 들여다봐야 할 지점은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바로 이곳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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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