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모든 아이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이 질문은, 아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성숙의 초입 단계인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진화한다. “나는 엄마를 더 닮은 걸까, 아빠를 더 닮은 걸까?”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이 동이가 왼손잡이인 것을 확인한 후 아들임을 직감했던 것처럼, 이 질문은 모든 부모에게도 되돌아온다. “첫째는 확실히 날 쏙 뺐는데, 둘째는 지 엄마랑 똑같구먼”이라는 흔한 탄식처럼 말이다.
넷플릭스 실화 다큐멘터리 <우리의 아버지>(감독 루시 조던)의 중심에서 영화를 끌고 가는 저코바 밸러드의 첫 질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외모는 금발에 파란 눈인데 가족들은 모두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자신은 왜 엄마와 아빠 모두를 닮지 않은 것일까? 결국 엄마는 저코바가 10살이 되던 해에, 아빠의 불임 문제로 정자를 기증받아 태어났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정자 기증자의 정보는 유출되지 않는 시기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업적으로 DNA 검사를 해주는 회사들이 생겨났다. 2007년에 가정에서 개인용 DNA 검사 키트를 제공하는 가장 유명한 회사인 ‘23andMe’가 문을 열었고, 2017년과 2018년 연휴 기간에 매출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202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3천만 명이 DNA 검사를 받았다.
외동딸이었던 저코바 역시 어디엔가 자신의 이복형제가 있을 거란 호기심으로 2014년 ‘23andMe’에 접속해 DNA 검사를 했다. 당시 기증자의 정자 기증은 3회를 초과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에, 운이 좋다면 이복형제 한두 명을 찾을 수도 있을 거란 기대와 함께. 결과는? 무려 7명의 이복형제가 사이트에서 검색됐다.
“처음에는 신이 나면서도, 걱정이 됐어요. 형제자매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저를 포함해서 여덟 명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가 했죠. 누군가 세 번을 초과해 정자를 사용했구나. 설마 기증자가 의사는 아니겠지 하는 농담을 하면서 가계도를 그려 조사를 시작했죠.”
계속되는 조사에서 저코바는 이복형제 수가 15명, 30명을 넘어서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그들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바로 1970~80년대 불임 치료 의사로 이름을 날린 도널드 클라인 박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서른 명이 넘는 이복형제들은 수없는 망설임 끝에 클라인 박사에게 DNA 검사를 요청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저코바는 지역의 언론사에 거미줄처럼 엉킨, 어두운 기만의 매듭을 푸는 사건의 증거들을 제보한다. 지역 검찰청에도 조사를 촉구한다. 클라인 박사가 불임 의학계 관례를 깨고 3회 이상 정자를 기증했다는 점과 이복형제들의 어머니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정자를 사용했다는 점을 고발한 것이다.
하지만 레이저로 나팔관을 접합해 수많은 불임 여성들에게 희망을 준 의학계의 전설이자,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교회 장로로도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클라인 박사에 대한 소름 끼치는 진실에 대해 지역사회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요즘은 정자기증자를 구하기가 쉬운 시대다.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조건을 설정하고 엔터를 치면 수백 명의 정자기증자 정보를 볼 수 있다. 클라인 박사의 문제는 정자 기증을 3회 이상 했다는 점이다. 이는 혈족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형제나 자매가 특정 지역에 너무 많다면, 남매가 결혼하게 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저코바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그의 형제자매들은 인디애나주의 한 도시 반경 25km 내에 살고 있다. 진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동네 길을 걷다가 자신을 닮은 사람을 만나면 혹시 이복형제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고, 혹시 지난날 자신이 데이트했던 상대 중에 이복형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그들의 일상을 좀먹게 된 것.
도대체 클라인 박사는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의대생 레지던트들 중에 기증자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성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젊은 시절 관심을 뒀던 사이비 종교 때문일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다”(예레미야 1장 5절)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편 127편 3절)
마치 은밀한 성처럼 보이는 그의 병원 벽면은 성경 구절로 가득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병원 내부에서 클라인 박사의 방으로 이동한다. 거기서 박사는 사정한 자신의 정자를 용기에 옮겨 담는다.
이 시퀀스는 영화 후반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불임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은 정자가 교체됐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사정 후 1시간 이내 정자여야 임신 확률이 높기에, 아내들은 남편의 정자를 체온에 맞게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속옷 안에 넣고 당대의 명의 클라인 박사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 여성들의 몸에는 남편 정자가 아닌 클라인 박사의 정자가 주입됐다. 여성들이 수술대에 누워있는 사이 클라인 박사는 옆방으로 이동해 마스터베이션 후 자신의 정자로 바꿔치기해 주입했던 것이다. 저코바는 이를 강간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마침내 <FOX59>의 안젤라 가노트 기자가 2015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사건은 공론화됐다. 한때 지역사회의 존경받던 일원이었던 클라인 박사는 2009년 은퇴했지만, 조사의 중심에 섰다. 물론 클라인 박사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라인 박사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1970~80년대 인디애나주에는 의사가 자신의 정자를 환자에게 이식하는 관행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다. 강간에 준하는 클라인 박사의 범죄 행위는 기소조차 할 수 없는 상황. 2016년 법원이 그에게 내린 처벌은 두 건의 공무집행방해죄에 대해 벌금 500불과 집행유예 1년이었다. 심지어 판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피고석에 앉은 클라인 박사에게 말한다. 오늘 어떤 판결이 내려지든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계속해서 당신을 사랑할 거라고.
환자의 동의 없이 자신의 정자 샘플을 사용한 사실을 시인했고, DNA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혐의로도 기소되지 않은 클라인 박사. 범죄가 발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유형의 피해를 다루는 법령, 법률의 부재로 의사를 범죄로 기소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현실.
하지만 진실은 힘이 세다. 매년 아버지의 날을 함께 보내며 우애를 다지던 이복형제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힘을 모았다. 2018년 어머니와 이복형제들은 불법 정자 수정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2019년 5월 인디애나주는 환자 동의 없이 자신의 정자를 사용한 불임 의사를 수사할 수 있는 최초의 주가 됐다.
가정용 DNA 검사 덕분에 불임 환자에게 자신의 정자를 주입한 의사 44명이 추가로 발견됐다. 그중에서도 현재까지는 클라인 박사의 자녀가 가장 많은 것으로 확인됐다. 영화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 클라인 박사의 이복형제는 94명으로 확인됐고, 앞으로도 그 수는 더 늘어날지 모른다. 정보 공유의 시대, 집단 지성의 시대의 효용이 즉각 발휘된 결과다. 넷플릭스 실화 다큐 <우리의 아버지>는 질문을 바꾸라고 제안한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에서 “진정한 자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로.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