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글로 오래 풀어 설명할수록 그 맛이 사라지는 영화들이 있다. 대니얼스(대니얼 콴, 대니얼 셰이너트)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로 A24 배급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 중인 이 콤비의 영화는, 글이나 말로 풀어서 설명하려 드는 순간 그 매력을 잃는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그렇다. “가족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중국계 이민자 에블린(양자경)이, 자신이 운영하는 세탁소의 세무조사를 받던 중 얼떨결에 멀티버스를 구원하는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라는 줄거리만 봐서는 도대체 어떤 영화일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영화의 한국 개봉을 기다리는 내 심정은, 갑갑하기 짝이 없다. 이 영화의 한국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도, 주변에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도 말로 풀어 설명하기 어려우니, 혼자서 끙끙 앓는 수밖에.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2022) 같은 MCU 영화들로 ‘멀티버스’라는 키워드가 대중화된 이후에 개봉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상황이 나은 편일 것이다. 대니얼스 콤비의 전작인 <스위스 아미 맨>(2016)은, 주연 배우 이름 말고는 대중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스포일러를 피해서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스위스 아미 맨>은 이런 영화다. “무인도에 홀로 표류 중이던 행크(폴 다노)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중 해변가에 쓸려온 한 남자의 시체(대니얼 래드클리프)를 발견한다. 행크는 몸 안에서 부패한 가스를 끊임없이 뿜어 대는 이 시체에 ‘매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니를 동료 삼아 의지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건조한 줄거리 서술만 가지고 <스위스 아미 맨>이 지닌 매력을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행크가 매니 위에 제트스키처럼 올라탄 뒤 매니의 엉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의 힘으로 망망대해를 가르는 예고편 영상을 가지고 설득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디서부터 딴지를 걸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이 영화를 대체 어떻게 영업할 것인가. 이 영화는 시체가 말을 하고 방귀를 뀌고 입에서 물을 뿜어 대는데, 그런 시체를 친구 삼아 위안을 받고 생존을 도모하는 남자가 나오는데, 더럽고 우스꽝스럽겠지만 그래도 계속 보다 보면 인생에 관한 놀랄 만큼 서정적인 깨달음으로 이어지니까 꾹 참고 한번 보시라고?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세상 기괴한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상영되었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내 5천원 (VOD 가격) 돌려내”라는 반응이 나올 만큼 반응이 극과 극인 작품이다.

영화의 매력을 담아내는데 필연적으로 실패할 걸 알면서도,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만큼이나 싫어할 사람도 많은 걸 알면서도 굳이 <스위스 아미 맨>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이 영화가, 삶을 포기하려던 남자와 이미 삶에서 밀려난 시체가 들려주는 인생 찬가라서 그렇다. 궁지에 몰린 행크의 환상인 건지는 몰라도, 매니는 행크의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시체다. 행크가 목이 마를 때엔 입에서 물을 토해주고, 자갈을 입안에 넣어주면 기관총처럼 자갈을 뱉어 내 사냥을 도와주고, 발기한 성기는 나침반 바늘처럼 집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단, 이 모든 기능은 행크가 매니에게 집으로 돌아갈 이유를 설득했을 때에만 작동한다. 어차피 시체인 매니는 살아야 할 이유도, 삶의 의미도 공감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분명 방금 전까지 생을 낙담하고 목 매달아 죽으려고 했던 행크는, 매니에게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명하

려 발버둥친다. 버스에서 마주친 여자 새라(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테드)를 봤을 때 행크의 심장이 얼마나 뛰었는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지, 영화 <쥬라기 공원>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었는지, 행크는 매니에게 기를 쓰고 설명한다. 물론 행크도 안다. 매니가 정말로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오랜 고립과 굶주림 탓에 헛것을 보는 건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걸. 그래도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그게 행크를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게 만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래서 행크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믿지 않는 삶의 찬가를 매니에게 들려준다. 매니가 삶을 욕망하고 동경해야 비로소 자신도 살 수 있으므로.

살아있는 행크가 죽은 매니에게 삶을 설명한다면, 썩어가는 중인 매니는 행크에게 ‘방귀를 인정하는 법’을 알려준다. 몸이 부패하는 중이라 시도때도 없이 가스를 분출하는 매니는, 행크가 아무 곳에서나 방귀를 뀌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방귀는 누구나 뀌는 거라면서, 왜 숨기는 거지?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나에게 방귀 같은 자연스러운 생리현상마저 숨긴다면, 다른 것도 숨기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품지 않을 의문 끝에 매니는 행크에게 말한다. “누구나 조금은 추할지도 몰라. 모두 추하게 죽어가는 존재인지도 모르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도 말고 딱 한 명만 있다면, 온 세상이 노래하고 춤추고 방귀를 뀔 거야. 다들 조금씩 덜 외로워질 거라고.” 내내 외로웠던 행크는, 매니의 말을 듣고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할지도 모른다. 자기 삶이 너무 고단해서 다 포기하고 싶은 사람도, 다른 이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걸 보면 없던 힘을 쥐어짜내어 그래도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고 설득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설득하는 과정에서, 정말로 위로받는 건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제 삶일 때에는 너무 지친 탓에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삶의 자잘한 기쁨과 환희들을, 상대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시 깨닫게 될 테니까. 그러다 보면, 사실 우리 모두 조금씩 우스꽝스럽고 지저분하고 추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못나고 추한 구석을 선선히 인정하고 기꺼이 끌어안아 준다면, 우리는 비로소 좀 덜 외로워질지도 모른다.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존재들이 삶을 찬미하고, 더럽고 추잡스러운 배설을 통해 아름다움을 깨닫는 영화. <스위스 아미 맨>은 그런 영화다. 물론 이 글로 영화의 매력을 다 가늠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