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헤어질 결심>(2022)과 <달콤, 살벌한 연인>(2006)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

“주식 애널리스트입니다. 항문 좋아하는 애널리스트가 아니고요.” 혼자 경박한 농담을 던진 뒤, 임호신(박용우)은 흡족한 표정으로 히스테리컬하게 웃어댄다. 그러나 그의 농담에 웃는 건 그 자신뿐, 같은 자리에 있던 해준(박해일)도, 서래(탕웨이)도, 정안(이정현)도 아무도 그 농담에 웃지 않는다. 극장에서 <헤어질 결심>(2022)을 보던 나는 호신의 경박한 웃음 속에서 뭔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아무도 따라 웃지 않는데도 이상한 말장난을 농담이랍시고 던지고는 혼자 웃는 남자를, 박용우가 전에도 연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작품이었더라. 이런 대사가 있었던 것도 같다. “내가 원래 유치한 걸로는 아시아 최강입니다. 유치해서 유치원 다니고 유치하다고 유치장 갈 뻔 했습니다. 좋아하는 시인 청마 유치환, 좋아하는 극작가 유치진, 좋아하는 꽃 유채꽃. 그밖에 다양하게 있지요.” 게다가 생각해보면 그 작품도 <헤어질 결심>이 그렇듯 너무도 사랑하는 연인이 혹시 사람을 죽인 범죄자가 아닐까 의심하고 걱정하는 남자의 불안한 내면을 들여다 본 스릴러였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여자 주인공은 함께 살던 남편을 비롯한 남자들을 연쇄로…. 맙소사. 내가 생각하고 있던 영화의 정체는 다름 아닌 최강희, 박용우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스릴러 <달콤, 살벌한 연인>(2006)이었다.

<달콤, 살벌한 연인>

얼핏 너무 다른 영화 같지만,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은 의외로 풍성하다. <달콤, 살벌한 연인>이 박찬욱의 전작인 <친절한 금자씨>를 패러디한 포스터를 홍보용으로 사용한 바 있다는 건 그냥 가벼운 농담거리겠지만, 장르로 보나 캐릭터로 보나 미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이다. 일단 두 작품 모두 공히 스릴러의 문법을 차용한 로맨틱 코미디 - 박찬욱의 주장에 따르면! - 인데다가, 주인공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지극히 비슷하다. 두 작품 모두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남자가, 신비한 여자에게 홀려 연애를 시작했다가 상대가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삶이 뒤흔들린다는 내용 아닌가?

보라. <달콤, 살벌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 대우(박용우)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다소 고지식한 지식노동자인데, 최근에는 사는 게 헛헛해서 좀처럼 잠도 잘 이루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우는 신비로운 여자 주인공 미나(최강희)를 만나게 되고, 살면서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연애의 환희를 가득 느낀다. <헤어질 결심>의 남자 주인공 해준은 매사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원칙주의자 형사인데, 최근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 잠복근무를 자꾸 선다. 그러던 어느 날 해준은 신비로운 여자 주인공 서래를 만나게 되고, 살면서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강한 끌림을…. 봐봐, 사실상 같은 영화라니깐?

생각해보면 대우도 해준도, 모두 연인의 범죄 사실을 알고 난 뒤 고뇌 끝에 이를 묻어버린다. 인생의 원칙과 자긍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해준은 서래에게 범죄의 증거가 담긴 휴대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말한다. 대우 또한 미나의 살인을 알고 난 뒤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신고하느냐”며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비록 둘 다 더는 상대와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돌아서지만 – 대우의 이 처절한 단념을 보라. “한명만 죽였으면 내가 이해해보려고 그랬는데! 어떻게, 아이 미치겠네 진짜!!” – 여자에 미쳐서 원칙을 져 버린 것은 매한가지다.

<헤어질 결심>

심지어 두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망설임이 없다. 서래와 함께 호미산에 오른 해준은, 서래의 부탁으로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서래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유해를 뿌린다. 그러다가 서래가 언제든 자신을 밀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해준은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고 조용히 겁에 질린다. 등 뒤로 다가온 서래가 백허그를 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른 건 그 때문이었다. 해준도 이런데, 심약하기 짝이 없는 대우라고 다를 리가 없다. 도피 중인 미나를 만나러 간 자리, 대우는 상의 안에 꾸역꾸역 검도 보호구를 착용하고 간다. 미나가 언제든 칼로 찌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상대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도 흥미롭지만, 더 흥미로운 건 그 공포를 견디면서도 상대를 만나러 갔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상대를 향한 사랑을 차마 끊어내지 못해, 인생의 원칙이 다 망가지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까지 상대를 향해 달려간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달콤, 살벌한 연인>의 대우와 <헤어질 결심>의 해준은 16년의 시차를 두고 마주보고 선 서로의 거울상에 가깝다.

<달콤, 살벌한 연인>

<달콤, 살벌한 연인>의 말미, 싱가포르에 학술대회 출장을 왔던 대우는 우연히 해외 도피 중인 미나를 만난다. 그리고는 언젠가 공소시효가 다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옥의 티이거나, 대우와 미나가 한국의 형법을 잘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범인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도주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미나는 영원히 한국에 돌아올 수 없고, 미나가 저지른 모든 살인은 영원히 미결로 남을 것이다.

그래. 미결사건. 해준이 미결사건 벽에다가 서래의 사진을 붙이고는 잠도 못 자고 내내 들여다 보는 것처럼, 서래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결사건이 되는 것처럼. 미나 또한 대우에게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존재가 될 것이다. 사자바위 해변에서 유골이나 주인 잃은 신발 같은 게 발견될 때마다 해준이 서래를 떠올릴 것처럼, 대우 또한 야산에서 토막시체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미나를 떠올리겠지. 해준과 대우가 사랑한 박복한 팔자의 치명적인 여자들은, 그렇게 각각 해변과 야산 깊은 곳에 아무도 찾지 못할 무언가를 묻어둠으로써 두 남자에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신화적인 사랑이 되었다. 내 말이 농담 같다고? 지금 바로 다시 <달콤, 살벌한 연인>을 보시라. 거기에, 탕웨이와 박해일 못지 않은 최강희와 박용우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으니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