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면 녹색 타이틀이 화면을 한가득 채운다. 강렬한 오프닝 이후, 영화는 곧장 비우기를 택한다. 거대한 글자가 사라진 화면에서 즉각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와 가로등이 빚어내는 기묘한 초록빛이다. 아마도 여름을 지나 가을로 접어들 무렵인 듯하다.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맞대며 우거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초록빛만 조용히 새어 나오는 늦은 밤, 아파트 단지를 배회하며 순찰하던 중년 남자(이태훈)는 놀이터에서 목이 매달려 죽은 고양이 사체를 발견한다. 그는 말없이 땅을 파서 고양이를 묻고,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계절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이제 저물어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 “주인이 집 내놨대요.” 아내(김민경)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들 가족에게 닥친 위기를 덤덤히 알린다. 남자는 아무런 대꾸 없이 식사를 마저 한다. 그리고는 안식처가 아닌 임시 거처가 되어버린 집에서,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외면한 채 잠을 청한다.
그의 아들도 제때 잠을 못 잔다. 장애인 심부름센터에서 일하는 원형(강길우)은 차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 언젠가부터 원형의 삶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애인 은혜(김국희)와 결혼 이야기를 나눈 지 꽤 오래됐지만, 매번 곤궁한 현실에 부딪힌다. 원형은 그동안 모텔비로 쓴 돈만 아꼈어도 벤츠를 샀을 거라고, 남의 결혼식에 낸 축의금만 합해도 진작 목돈을 굴렸을 거라고 투덜댄다. 하지만 은혜가 지적한 대로 원형의 지갑에서 나온 돈은 그만그만하고, 그들에게는 현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겹게 반복되는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원형은 한 차례 피했던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채 퉁명스레 답하다가, 원형은 문득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할아버지의 부고, <초록밤>에 등장하는 두 번째 죽음이다.
영화는 생명, 건강, 활기 등 흔히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초록을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이미지로 흡수한다. ‘초록밤’에는 짐승과 사람이 잇따라 죽음을 맞이하고, 인물들은 대개 무기력하거나 불만에 차 있다. 롱테이크와 풀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촬영은 끊임없이 여백을 제공하며 영화의 속도를 늦춘다. 그 안에서 초록은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밤의 빛으로, 눈부시게 흔들리는 낮의 색으로 화면을 장악한다. 반면에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인물에게는 그만한 몫이 주어지지 않는다. 화면 중심을 차지하기보다는 화면 구석에 위치하기를 택하며, 말보다는 침묵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자연스레 대사는 적고, 배우들은 에너지를 분출하는 대신 은근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인물과 서사가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빈 공간을 채워 넣는 것은, 미술과 음악을 비롯한 또 다른 영화적 물질이다.
풍경을 조망하는 널찍한 화면에서, 현악기 특유의 음색을 강조하며 자못 비장하게 흐르거나 가파르게 치닫는 음악 속에서 사람은 유난히 초라해 보인다. 아버지는 사방에 도사린 불행을 외면한 채 담배를 피울 뿐이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도 점차 닮아 간다. <초록밤>은 그렇게 인물 개개인의 남루하고 가여운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가족이라는 관계에 얽혀 있는 친밀감과 거리감을 포착한다. 길에서 마주친 부부는 행인 1과 행인 2처럼 서로 지나쳐 걷지만, 집에 와서는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볼일을 본다. 아들은 어머니의 부름에 한숨을 쉬다가도 눈치껏 곁을 지키고, 아버지는 아들의 무릎을 툭툭 치는 행위로 의사를 표현한다. 큰고모(변은영)와 작은 고모(오민애)는 장례식장에서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데,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에는 여관방에 함께 둘러앉아 돈을 센다. 그들은 가깝고도 멀며, 가장 경건해야 할 순간조차 속물처럼 욕망을 앞다투는 사이다.
장례를 마친 원형의 가족은 할아버지가 살던 집을 정리하기 위해 시골로 떠난다. 살뜰히 정리해놓은 집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노인이 누워 있다. 영화는 이때 느슨하고도 모순적인 수미상관 구조를 만들어낸다. 집에서 쫓겨날 형편에 처한 이들이 반대로 누군가를 쫓아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다. 평생 집안의 크고 작은 문제를 도맡은 어머니는 이번에도 악역을 떠안는다. 기이한 폭력에 노출된 후, 영화에는 다시 한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감당하기는커녕 의미를 이해하기도 벅찬 사건이 연속하지만, 가족은 끝내 원점으로 돌아온다. 원형은 애인을 따라 결혼식에 가고, 모텔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어머니는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고, 아버지는 늘 그렇듯 새벽에 출근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날 밤,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영화는 화면 가득 그의 얼굴을 비추며, 영영 그 혼자서만 간직할 시간을 기록한다. 예상치 못한 일이 종종 발생하면서도 언제나 일정한 궤도에 머무르는 현실, 영화는 이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듯 저만의 방식으로 막을 내린다.
<초록밤>은 윤서진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자, 고 김민경 배우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김민경이 연기한 어머니, 아내, 며느리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강력한 힘을 상징한다. 그는 싸움을 말리고 비위를 맞추며, 동력을 상실한 채 주저앉은 이들을 뒤치다꺼리하며 현실에 산재한 어려움을 돌파한다. 고추를 말려서 가루를 빻고, 김치를 담가서 식구들의 입 안에 넣어준다. 말 그대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주체로서, 김민경은 영화 속 인물들을 이끌고 연결하는 데 커다란 존재감을 발휘한다. 한편, <초록밤>은 팬데믹으로 촉발된 위기와 변화에 대응하는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 등장하고, 뉴스에서 앵커는 코로나19 4차 대유행을 알린다. 더불어 “정말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는 감독의 말은, 영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하면서도 직관적인 불안 속에서 <초록밤>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영화는 내러티브, 연기, 사운드, 촬영 등 어느 하나에만 몰두하기보다는, 각 요소가 n분의 1로 책임을 나눠 갖는 형태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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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