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치솟고 기름이 끓는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외친다. “정신 차리고 집중해라.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움직여라.” “예, 셰프!” 명령이 끝나자마자 뒤따르는 대답에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다. 주방은 전쟁터라고 불릴만한 곳이다. 타들어갈 듯한 열기와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주문 완수를 위해 나아간다. 헤드 셰프는 부대를 통솔하는 총사령관으로서 그들을 독려하고 재촉하기를 반복한다.
주방을 무대로 한 영화에서 셰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더 셰프>(존 웰스, 2015)의 주인공 아담 존스는 전형적인 ‘주방의 폭군’이다. 미슐랭 3스타에 도전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췄으나, 오만한 성격 탓에 어딜 가든 고집불통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 <헬스 키친>을 이끌며 특유의 완고한 태도와 독설로 유명해진 고든 램지와 겹쳐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줄리 앤 줄리아>(노라 애프론, 2009) <바베트의 만찬>(가브리엘 엑셀, 1987) 등처럼 셰프를 ‘치유자’로 그려내는 작품도 여럿이다. 전설의 셰프 줄리아와 요리 블로거 줄리는 요리를 매개로 4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덴마크 시골에서 평생을 보낸 자매와 이방인 바베트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만찬을 베푼다. 그들은 음식을 만들고 나누면서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상처를 회복하도록 돕는다.
<보일링 포인트>를 이끄는 헤드 셰프 앤디(스티븐 그레이엄)는 어느 쪽일까. 그는 일상에 발생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문제를 떠안은 채 등장한다.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두 달간 집 없이 떠돌아 다녔다. 어린 아들에게 경기를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다. 앤디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신 물통을 움켜쥔다. 동료들은 그 안에 물이 아니라 술이 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지 오래다. 오늘은 1년 중 가장 바쁜 날, 크리스마스를 앞둔 금요일이다. 수석 셰프 칼리(비넷 로빈슨)가 빈자리를 채워준 덕분에, 앤디의 지각은 유야무야 넘어간다. 다만, 예고 없이 들이닥친 환경위생과 직원의 점검까지 피할 수는 없다. 앤디가 서류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은 탓에, 위생 점수는 이전보다 두 단계나 하락한다.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레스토랑 매니저는 얼굴을 붉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젯밤 앤디가 관리한 식자재에도 문제가 생긴다. 사과해도 모자랄 판인데, 앤디는 괜히 직원들에게 호통치며 트집을 잡는다.
여기까지 보면, 그는 또 다른 ‘주방의 폭군’이다. 그러나 영화는 안하무인 셰프의 성장담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음 깊이 반성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기엔, 시간도 공간도 극도로 제한적이다. 고급 레스토랑 존스 앤 선즈는 이제 막 문을 열었고, 카메라는 러닝타임 내내 멈추지 않는다. 이미 온갖 스트레스로 숨 막히는 이곳, 과연 앤디는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보일링 포인트>라는 제목대로, 영화는 비등점을 향해 온도를 높여 간다. 주방과 레스토랑은 일하고 돈을 버는 공적 공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욕구와 불만이 넘실대는 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저마다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른다. 우선 손님이 만족할만한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그때 지쳐 무너지지 않도록 자신과 싸워야 한다. 카메라는 노출형 부엌, 부엌 뒤편, 홀, 화장실, 직원 휴게실, 레스토랑 후문 등으로 쉴 새 없이 자리를 옮겨 가며, 인물들의 표정이 어떻게 뒤바뀌는지 지켜본다.
공적 공간에서 그들은 대부분 손님을 의식한 채 정다운 미소를 짓거나 평정을 가장하지만, 사적 공간에 입장했을 때는 미간을 찡그리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거나 심지어 눈물을 쏟기도 한다. 완벽하게 계획된 동선을 바탕으로 막힘없이 유영하는 카메라와 달리, 인물들은 골치 아프고 불쾌한 상황에 연신 가로막힌다. 홀 직원은 흑인 여성을 차별하는 노골적 시선에 시달린다. 칼리는 매니저의 독단과 몇 해째 임금 인상이 좌절된 현실로 인해,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다. 앤디는 오늘 저녁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비등점에 도달하지 않도록 감정을 애써 누른다. 하지만 그의 옛 동료이자 오랜 라이벌 알리스터(제이슨 플레밍)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평론가와 갑작스레 방문하면서 눈에 띄게 긴장한다.
위기를 거듭하며 아찔하게 내달린다는 점에서 <보일링 포인트>는 ‘키친 서스펜스’라는 수식에 걸맞다. 인물과 상황은 개별적이면서도 퍼즐 조각처럼 연결되어 있다. 자극하고 반응하면서 그들은 서로 도화선 역할을 하고, 크리스마스 저녁은 끝내 최악의 하루로 치닫는다. 감독 필립 바랜티니는 2019년에 동명 단편을 연출한 후, 장편으로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 주연을 맡은 스티븐 그레이엄의 캐스팅뿐만 아니라, 단편에서 도전했던 원테이크 촬영 원칙 역시 그대로 고수했다. 허술한 데 없이 치밀하게 설계한 카메라워크와 이야기 전개 방식이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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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