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포문을 열었던 <아이언맨> 1편의 개봉이 2008년 4월이었으니 이 프랜차이즈의 여정도 올해로 벌써 햇수로 15년째다. 이제 4페이즈는 종반부에 다달아 있으며 최근 5페이즈를 발표하며 다음 여정에 대한 아젠다를 내놓은 상태인데, 마블 스튜디오의 상황도 캐릭터들의 이야기도 그동안 정말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페이즈 4와 5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아무래도,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기존의 여정을 함께 했던 개국공신 캐릭터들이 은퇴 혹은 하차하게 되면서 이들의 자리를 새로운 캐릭터들로 채워가는 작업이었다. '쉬헐크'와 '문나이트', '미즈 마블'처럼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기존에는 메인 캐릭터들을 보조하는 사이드킥 역할을 했던 캐릭터들이 전면으로 나와 주역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페이즈 4의 작품과 최근 발표된 페이즈 5의 라인업들을 중심으로, 기존 MCU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 왔던 사이드킥 캐릭터들이 어떤 이야기를 새롭게 해 나갈 예정인지를 짚어 본다.
1) 로키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왕위계승자였던 토르의 배다른 동생으로 등장해 빌런과 히어로 양지에서 고루 활약한 독특한 캐릭터였다. 하지만 로키가 늘 갖고 있던 문제를 드디어 해결한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 순간에 최후를 맞았으며 '핑거 스냅'으로 사라진 것도 아니었기에 영영 복귀는 어려워 보였다. 덕분에 팬들의 아쉬움은 한층 더 컸지만, 페이즈 4부터 멀티버스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이야기는 확장된다.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기대치가 컸던 작품인 <로키>는 MCU 관객들이 익히 보아 왔던 그 로키는 아니며 멀티버스의 로키다. 즉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태서랙트를 훔쳐 들고 사라진 로키였다. 인피니티 사가 후반부에서 보여준 로키의 성장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래서 더 매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빌런인 듯 빌런 아닌, 그럼에도 빌런스러운 요망한 캐릭터성을 다시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멀티버스라는 개념에 대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영화팬들에게 드라마 <로키> 시즌 1은 다중우주에 얼마나 많은 로키가 존재할 수 있는지(심지어는 동물도 있을 정도니..)를 보여주는 역할과 더불어, 다음 멀티버스 콘텐츠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더불어 인피니티 사가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캐릭터 중 하나인 로키의 복귀도 이루어냈다. 작중의 로키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기존의 체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새로운 모험을 시작해야 할 로키는 내년 여름 시즌 2로 돌아올 예정이다.
2) 팔콘과 윈터 솔져
캡틴 아메리카의 은퇴는 히어로로서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스티브 로저스의 개인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티브는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숭고한 선택을 한 결과로 70년이라는 시간 동안을 북극의 빙하 속에 잠들어 있었다. 페기 카터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와중에 맞은 비극이었으므로 이미 고령의 노인이 되어 버린 페기와 다른 세상처럼 바뀌어 버린 현실에 적응해야만 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종장에서 스티브는 페기 카터와의 로맨스를 이어가는 선택을 했고, 노인이 된 모습으로 나타나 '팔콘' 샘 윌슨에게 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비브라늄 방패를 넘겨준다.
초대 캡틴 아메리카인 스티브 로저스가 이렇게 은퇴하게 되자 방패를 이어받은 샘 윌슨이 다음 캡틴 아메리카 자리를 이어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된 <팔콘과 윈터 솔져>에서 샘은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에 따르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던 것인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방패를 기증한다. 하지만 미 정부는 캡틴 아메리카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미군 중 선별한 존 워커라는 인물을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로 내세웠다.
<팔콘과 윈터 솔져>는 샘 윌슨에게 있어선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로 자리 잡기 위한 과정이었고, 버키 반즈에게 있어서는 윈터 솔져 시절의 과거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즉 스티브 로저스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위한 기원이 <퍼스트 어벤져>였다면 샘 윌슨이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위한 과정이 <팔콘과 윈터 솔져>였던 셈.
시리즈의 마지막 화에서 샘 윌슨은 진정한 캡틴 아메리카로서 인정받았고, 샘 자신도 더 이상 캡틴의 조력자 사이드킥이 아닌 히어로로서 거듭났다. 이제 팔콘에서 캡틴 아메리카로 새롭게 태어난 샘 윌슨의 여정은 이제 스크린을 통해 2024년에 공개될 예정이다.
3) 슈리
블랙 팬서 역할을 맡아 호연을 선보였던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면서 기존 <블랙 팬서> 시리즈에는 상당한 차질이 빚어졌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인상적인 첫 등장을 보여준 이래 독특한 스타일과 더불어 와칸다라는 미지의 왕국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져 있는 상태였고, 솔로 무비 <블랙 팬서>를 통해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이제 블랙 팬서의 모험은 막 시작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드윅 보스만이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해 왔고 그 와중에도 영화 촬영에 성실하게 임했으며, 마블 스튜디오 관계자들까지 임종 직전에야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를 향한 추모의 물길이 이어지기도 했다. 단일 무비가 아니라 커다란 세계관을 공유하는 거대 프랜차이즈인 마블 스튜디오 입장에서도 난감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블은 채드윅 보스만의 빈자리를 다른 배우로 교체하지 않는 대신 기존 캐릭터로 그의 빈자리를 채우는 선택을 했다. 그게 바로 '블랙 팬서' 트찰라의 동생 슈리, 그리고 오코예와 나키아였다.
개중 슈리는 아이언맨이 최후를 맞이하면서 토니 스타크의 빈자리를 메워 줄 캐릭터가 될 것이라는 루머도 심심찮게 있어 왔던 캐릭터였다. 와칸다의 공주이자 국제구호센터 과학정보부장으로서 활약하며 눈부신 수준의 과학 기술과 비브라늄을 활용해 블랙 팬서의 수트는 물론이고 다양한 장비를 개발, 지원하면서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더불어 양손에 핸드건을 장착하고 나와 전투원으로서도 가능성을 보여주었기에 기대감은 충분히 있었다.
물론 슈리 역 배우인 러티샤 라이트가 코로나 백신과 관련된 추문에 휩싸이면서 이슈가 있었고 이 때문에 영화 촬영이 지연되고 있다는 소식이 있기는 했으나, 현실적인 문제를 배제하고 캐릭터 자체만 봤을 때 와칸다의 다음 히어로로서 슈리의 역할은 꽤 유의미할 수 있다. 여기에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를 통해 처음 등장하는 아이언하트까지 좀 더 테크니컬하고 진보된 형태의 히어로를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모니카 램보
<캡틴 마블>에서 아역으로 처음 등장했던 모니카 램보는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중 가장 성공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완다비전>을 통해 MCU에 본격적으로 재등장한 캐릭터다. 모니카 램보는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이 되기 전, 공군 파일럿으로 활약했을 당시 절친 사이였던 마리아 램보의 어린 딸이었는데, 작중 마지막 부분에서 캡틴 마블의 의상 색깔을 직접 골라준 그 소녀가 바로 모니카다.
모니카 램보는 <완다비전>에서 사건 현장인 웨스트뷰에 잠입해 사건의 실체를 알아내고 조사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웨스트뷰를 둘러싸고 있는 장막을 뚫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초능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코믹스 원작에서도 능력을 얻게 된 계기는 다르지만, 이능력을 얻고 히어로로 활동한 이력이 있으므로 등장을 확정 지은 <더 마블스>에서도 캡틴 마블과의 재회와 함께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완다비전>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해낸 이력이 있으므로 이후 프랜차이즈에서도 다년간의 경험과 지식을 십분 활용하는 형태의 캐릭터가 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는데, 캡틴 마블과는 친분이 꽤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남다른 케미를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해 볼 만하다. 새롭게 등장한 캡틴 마블 팬이자, 파키스탄계 미국인 고교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인 미즈 마블과는 어떤 관계가 될지도 포인트일 듯. 모니카 램보의 다음 출연작인 <더 마블스>는 스크린을 통해 23년 7월에 개봉 예정이다.
5) 에코
이전에도 소개한 바 있는 캐릭터인 에코는 <호크아이>의 조역으로 먼저 등장했다. 마야 로페즈는 원작과 동일하게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데다 한쪽 다리는 의수다. 작중에서는 호크아이가 인피니티 워 이후 블립으로 사라진 가족들을 잃은 아픔에 '로닌'으로 활동하며 각지의 범죄자들을 자비 없이 처리하고 다니던 시절 그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캐릭터였다.
MCU 전체에서 보면 <이터널스>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배우 로런 리들로프가 직접 같은 장애를 가진 캐릭터인 마카리를 연기했던 것에 이어 두 번째로 청각장애를 가진 캐릭터인데, 원작에서는 뉴욕의 검은 손이자 여러 히어로의 빌런인 킹핀의 지원을 받으며 자랐으나 그로부터 독립한 이후 히어로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작중에서는 원작의 히어로 네임인 '에코'로 불린 적은 없지만, <호크아이>를 통해 진정한 원수였던 킹핀에게 복수하고 그의 손으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에코'로서 거듭나는 것은 동명의 시리즈인 <에코>에서부터일 듯하다.
6) 애거사 하크니스
애거사 하크니스는 <완다비전>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에 남을 법한 캐릭터다. 웨스트뷰의 참견쟁이 이웃, 아그네스로 등장했던 바로 그 캐릭터, 하지만 최종장에 다다라서는 완다를 마법사로 각성시키는 한편 가장 강력한 적으로 돌변한 빌런이기도 했다. 웨스트뷰의 감초 캐릭터 느낌(...)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중반부까지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아닐까 싶을 만큼 시트콤 감초 캐릭터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지만, 정체를 드러내고 난 이후부터는 원작 코믹스의 설정만큼이나 관록 있는 마법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원작의 애거사 하크니스는 판타스틱 포와 더 인연이 깊은 캐릭터인데, 만 년 이상을 살아온 만큼 마법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식과 경험을 가진 관록 있는 마녀다. 판타스틱 포의 수장 미스터 판타스틱의 아들(즉 인비저블 우먼의 딸이기도 하다)인 프랭클린 리처즈의 가정교사로 처음 등장했는데,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완다비전>에서도 본인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서이기는 했으나 완다를 각성시키는 데 주효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나름의 원작 계승일지도.
디즈니 플러스의 아시아 서비스가 늦어진 것과 더불어 <완다비전>의 컨셉이나 스토리 자체가 다소 미국식 정서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한국에서는 미국 현지만큼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은 면이 있지만, 현지에서는 에미상 노미네이트 등 마블 스튜디오의 TV 시리즈 중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만큼 작중 애거사 하크니스 즉 아그네스의 캐릭터 역시 꽤 화제가 되었다. 이전에는 다소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캐서린 한은 이 역할로 다시금 연기력을 인정받았다고 하는데, 이에 힘입어 '애거사 하크니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독 시리즈가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완다비전> 후반부에서 간략하게 등장한 코빈(마법사들의 집회)과 관련된 애거사의 과거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서 보다 더 의미 있는 캐릭터로 발돋움하게 될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
케빈 파이기는 디즈니 플러스 출범 당시 이제 오리지널 콘텐츠를 보지 않고는 영화를 전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디즈니 플러스 콘텐츠는 MCU의 진입장벽이 되고 있고, 디즈니 플러스에 오리지널 콘텐츠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시기를 기점으로 MCU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콘텐츠들을 시청하는 것이 기본기가 된지 오래다.
물론 프랜차이즈로서는 옳은 선택일 것이다. 넷플릭스와 협업했던 TV 시리즈들의 총체적인 결과가 그리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자체 플랫폼을 통해 제작 전권을 가진 상태에서 만드는 콘텐츠가 더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 MCU는 이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관객들이 완다 막시모프를 보면서 느낀 당혹감만큼이나 진입장벽은 높아지고 있지만, 최소한 MCU의 영화를 보기 위해 매번 영화관을 방문하는 팬들에게 디즈니플러스의 콘텐츠를 강제하기보다는 영화 그 자체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요소들이 더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페이즈 5에 들어오면서 멀티버스 사가로 명명된 앞으로의 MCU는 꽤 흥미로운 아젠다를 가지고 있다. 기존 캐릭터들의 못다 한 이야기들과 더불어 새 시대를 열어갈 히어로로서의 도약, 거기에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에 힘입어 다시금 함께 모일 어벤져스까지. 천천히 쌓아올려 나간 이 히어로들의 스토리가 더욱 더 방대하게 확장된 세계관 속에서 겹쳐지는 순간이 제 2의 인피니티 워 그리고 엔드게임이 될 것을 예고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이 이전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이제 가장 대중적인 콘텐츠 중 하나가 된 히어로 무비가 갖고 있는 강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구나 볼 수 있을 만큼 흥미롭고, 가볍고 유쾌하지만, 현실성 있는 문제를 다루는 진중함을 갖춘, 그럼에도 화려한 CG와 블록버스터 액션으로 무장한 '가볍고 재미있게 볼 만한 영화'로서의 장점이 자체 콘텐츠라는 진입장벽에 너무 큰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라본다. 새롭게 등장할 캐릭터들과 주역이 된 과거의 사이드킥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도.
프리랜서 에디터 희재